매일 반복되는 하루
1.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
새하얀 아침.
컨퍼런스실이 부산해진다.
병원장이하, 영상의학과부터 전공의까지.
모두 커피 한 잔씩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 누구도 마시지 않는다.
실내의 공기는 깨끗하게 걸러진 산소처럼 차갑고, 조명은 과도할 정도로 어둡다. 스크린에는 오늘 수술 예정자의 리스트가 띄워진다.
X-ray, MRI, CT 등 영상 자료, 차트 요약, 각종 검사 수치, 과거 수술 기록 등이 정리된 화면.
주치의가 환자의 히스토리를 설명하는 동안,
다른 의사들과 수술팀은 조용히 노트나 태블릿을 펼치고 데이터를 대조하거나 추가한다.
“이분은 지난번 수술 후에 합병증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게 봉합 부위 감염인가요, 아니면 수술 부위 염증 반응이었나요?”
"수술 예정 부위와 환자의 통증 부위가 일치하나요?"
“심전도상 PVC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없었죠?”
짧고 정확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단 하나의 정보가 누락되면, 수술 계획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 대화를 들으며 환자의 차트를 다시 훑는다.
히스토리, 검사 결과, 혈액형, 마취 이력, 약물 알레르기, 약물 상호작용...
한 명의 환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얼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위험도를 낮추기 위한 의료인들의 설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환자의 모든 자료를 확인하고 나면,
지휘봉을 지휘하듯 병원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확실히, 놓친 부분은 없는 거죠?"
그 질문이 나오면 자리에 참석한 그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모든 심력을 환자에게 올곧게 쏟아낸다.
병의 진단과 치료 방향은 기록 위에 남겨지지만, 그 기록은 결국 사람에게 의존한다.
2. 완벽에 가깝게
모니터 불빛이 살아있는 나만의 공간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그 짧은 틈에서 일련의 사태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나는 차트와 기록을 다시 검토한다.
진단명, 수술 예정 부위, 검사 수치, 약물 알레르기, 지난 수술 기록.
이미 숙지한 내용이지만 다시 그 자료를 열람한다.
인간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아서 좋을 대로 기억하고 또는 망각하기 때문에.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계처럼 외워서 필드에 들어가면 어느 순간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정말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처음 1년은 환자번호까지 외워서 들어가곤 했다.
컴퓨터가 다운되고 다시 켜졌을 때, "이 사람 환자번호가 뭐였지?"라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변했던 나는 요즘 웹소설의 흔한 대사인 '이게 되네?'라는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타임아웃의 체크리스트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환자 이름, 나이 (환자 등록번호, 생년월일, 동명이인 확인)
환자 수술명
환자 수술 예정 부위 (좌측, 우측 확인)
환자 수술 부위 마킹
환자 특이사항 (환자의 과거 수술기록, 혈액형, 알레르기, 복용 약, 골다공증 여부, 출혈 경향등)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것들은 이렇게 다양하다.
타임아웃이 시행되면 수술팀들은 숙지한 내용을 서로 교차확인하며 오류를 잡아낸다.
3. 세밀한 부분까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분들은 알겠지만, X-ray나 MRI를 자세히 보다 보면 2D가 3D로 느껴질 때,
'이제 기본은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MRI를 모드 별로 컷별로 외워서 필드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이론과 실제의 괴리감이 줄어들 때,
그리고 그것이 실제 수술에 큰 도움이 되었을 때 수술팀 각자는 큰 보람을 느낀다.
웹툰처럼 각 단면이 서로 겹쳐지고, 조직의 두께, 혈관의 깊이, 신경의 흐름까지 입체적으로 보인다기보다는
이론과 실제가 끊임없이 싸우고 또,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공든 탑이 되었을 때 비로소 느껴진다고 본다.
각종 수술도구가 의사와 간호사 사이를 오고 가며 수술 순서에 따른 데이터를 만든다.
그 데이터는 큰 자산이 되어 미래의 환자에게 본인은 모르는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밀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라 모를 수도 있는 부분을 채워 넣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애쓰면서도, 언제든 어긋날 수 있음을 자각한다.
그 자각을 감수하고도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은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다.
4. 하루의 끝은 찾아오고
수술이 끝난 후 장갑을 벗으면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천천히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세밀하게 기억하고 정성스레 쌓아 올린 모든 정보가 하나씩 내 머리에서 흩어진다.
약 20년을 하다 보니 빠르게 기억하고 지워지는 과정을 매일 반복한다.
'학창 시절에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을지니...
하지만 유독, 잘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환자의 눈빛과 표정이다.
내 손과 마음으로 느낀 삶의 무게, 그것만은 기록도, 의도적 망각도 쉬이 덮을 수 없는 흉터로 남는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급박했던 전쟁터의 기억을 몸으로부터 떨쳐내고, 의식과 집중의 잔해를 마음속에서 털어낸다.
그리고 고요한 밤이 찾아온다.
밤이 찾아오면 기억은 리셋되고 내일의 새하얀 아침이 찾아오겠지?
그럼에도 어딘가에는 기억의 편린들이 조각, 조각으로 무의식 속에 떠다니지 않을까?
환자 분.
의료인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병원을 다시 찾아오지 않을 때 가장 훌륭한 환자가 되는 겁니다.
저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