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I, ZERAF
EQI 본부. 하요.
[ EQ시스템 메시지 : EQI 본부 확인|요청 코드 : E-CODE RED |근거 : 휴머니스. 지구법 제 2조 전 항목 위반 ]
[EQI 본부 : 허가한다]
[시스템 메시지 종료]
서울 자치도시의 EQI 본부.
회색빛 유리 타워를 감싸는 수백 개의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최고 지휘관 메를린 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1차 폭팔이 있고 난 후에 아마돈 셀이 미약하게 감지됐고, 그후에 암호화된 데이터가 송출 되었다는거지.
경기 자치도시 해킹과 동시에 무슨 짓을 저질렀을거야. 터널의 폭팔은 그걸 덮으려는 함정이었다는 건가.”
그녀의 손끝이 허공을 스치자, 정보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벨라스의 광역탐지에도 아무런 실체적 접촉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야. 어떻게 생각하나? 유스폴. ”
전 지구적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카엘럼의 본부장 유스폴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공손히 말했다.
“아마돈 셀의 잔존 에너지는 탐지했다지만, 목적이 뭔지는 아직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위원장님.”
“휴머니스… 골치아프군. ”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쎄게 누르며 잠시 침묵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제라프 정예 3개 팀을 추가 파견한다.
A-07-EZ 지점을 중심으로 수색하고 100km 반경 안의 공명 신호를 모조리 포착해. 그리고 데이터 유기체 탐사형 드론 ‘ECHO-RAY’ 를 풀어.
한편, 상준은 심하게 흔들리는 셔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입술은 한쪽으로 비틀렸고 손등에는 굵은 혈관이 도드라졌다.
의도된 폭발, 예고된 송출, 그리고 보란듯이 덫에 걸린 ZERAF.
“으드득, 제대로 당했네. ”
상준은 굴욕감에 몸서리쳤다.
상준에게 연동된 EQ-2 드론은 폭팔지점 근처에서 바쁘게 암석 지대를 분석하고 있었다.
30분이 지난 후, 지반 밑의 4m 깊이에 파묻힌 낡은 구조물 하나가 발견된다.
드론: 사용자님, 고대 통신 코덱스 기반의 장비 발견.
정상적인 EQ 신호 수신 불가. 그러나... 미세한 송출 감정파 검출됨.”
차상준의 눈이 번뜩였다.
“감정파?”
드론: 네. 확인된 감정파는 아마돈 셀 기반의 원시형 감정 저장장치와 유사한 진동 수치입니다.
이 장비는 '기억' 을 한계까지 저장한 매체로 추정됩니다.
“일단 최대한 조심스럽게 회수해.”
차상준은 곧바로 EQI를 호출했다.
“본부, 여기는 파이어레인. A-07-EZ 좌표 하부에서 감정 공명 장치로 추정되는 물체를 확보했다.
수거 후 분석 요청한다. 보안 등급은 E-CODE blue, 반복한다. E-CODE BLUE.”
밤 하늘에 떠오른 새벽 빛의 구체들.
규칙적인 신호를 머금고 구름 안에서 이리저리 맴돌고 있던 Ehco-Ray에서도 비슷한 시간에 강렬한 신호를 발산했다.
이번에 Echo-ray가 새롭게 발견한 장치와 상준이 회수한 장치는 같은 종류로
EQI 본부의 최고 보안 연구소로 이동되었다.
릴리는 즉시 감정,지각 전문가와 데이터 분석 전문가, 그리고 엑소퀀트를 호출해서 해독과 분석 및 해체를 지시했다.
해당 장치는 ‘원시형 감정 파동 저장체’, 통칭 EP-Core(Emotion Pulse Core)로 분류되었고, 분석 과정에서 예상 밖의 반응이 나타났다.
EQ : 응축된 감정은 데이터보다 깊습니다. 그것은 기억이며, 기억은 정체성을 가집니다.
감정 공명장치가 폭팔하고 그것에 노출된 사람은 늑대 인간과 같은 괴물로 변이할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EP-Core 해석 결과 요약]
감정 패턴: 슬픔, 분노, 파괴, 폭주
형태: EQI 프로토콜 이전의 인간 기억
파동 연대: EQ 초창기 2100년 추정
기억 주체: 확인 불가… 단, 잔여 공명으로 보아, 초기 ‘AID 각성 실험체’와 유사함
릴리와 EQI본부에 모여있던 세 본부장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이구나… ” 릴리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릴리는 즉시 간부급 전체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거대한 홀 가운데 타원형으로 빛나는 삼케아 원목 테이블이 위치해 있었고, 중앙에는 EP-Core의 3D 홀로그램 모델이 회전하며 공중에 떠 있었다.
최고 지휘관인 릴리가 테이블을 둘러싼 각 기관의 대표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우측에는 CAELUM 본부장 유스폴이 굳은 얼굴로,
반시계 방향으로 VELAS 본부장 아멜리가 차가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옆으로는 ZERAF 본부장 드미트리가 눈을 감고 벌려진 입으로 침을 흘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있었다.
이외에 EQI의 두개의 비밀단체, 심층 대응부 D.C.D와 특무대 A.S.A 간부들도 우려가 담긴 표정으로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릴리가 먼저 차분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오늘 회의 안건은 명확합니다. 휴머니스와 EP코어에 대한 대응 방안 입니다. 벨라스. 영상 송출 당시 상황에 대한 분석 보고를 부탁합니다.”
아멜리 뒤부아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띄웠다.
“송출 신호는 경기도 외곽 구 탄광지대에서 발원했으며,
놀랍게도 송출 당시 아바돈 셀의 잔존 파동이 감지 되었습니다.
저희 벨라스의 광역 탐지 시스템에도 실체적 접촉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치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릴리가 유스폴 본부장을 바라봤다.
“ 카엘럼. EP코어 모니터링 결과는 ? ”
유스폴 본부장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 감정 파동의 기억 주체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써, 비슷한 파동에 노출시 늑대인간으로 불리던 에피머 처럼 변할 수 있고, 그 능력은 초기 에피머를 능가할지도 모릅니다. ”
그의 마지막 말이 회의실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테이블 중앙에 EP코어는 밝은 빛을 내뿜었지만, 이제는 그 빛마저 불길하게 느껴졌다.
D.C.D의 클라우스 리히터 대표가 격렬하게 테이블을 ‘쾅’ 하고내리쳤다.
“능가한다고 ?! 그 에피머를? 이봐 벨라스. 너희 심층 탐지 시스템에 구멍이 뚤린 건가? 아니면 이 지독한 감정파가 혼자서 탐지를 회피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D.C.D 봉쇄 프로토콜은 이런 미지의, 다중 기억을 가진 코어를 다루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이미 우리가 생각했던 범주를 넘어 섰다고!”
아멜리 뒤부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응시했다.
“ 구멍이라니 클라우스! , 아바돈 셀 잔존 파동은 극히 미약했고, EP코어는 고대 코덱스를 이용했어.
우리 추적 시스템이 감지할 수 없는 구시대적 은폐술이라고 봐야한다고.”
아멜리는 한 숨을 돌리고 다리를 꼬며 클라우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문제는 탐지 여부가 아니라, ‘휴머니스가 에피머를 업그레이드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가 중요한거야. 좀 진정하고 생각이란 걸 해봐 D.C.D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두뇌 집단인데 대장이 저래서야… 하버드가 운다 울어.”
아멜리의 직설적인 비난에 드미트리의 핏발 선 눈동자가 클라우스를 향했다.
“ 쓰읍…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
그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때 A.S.A 대표 엘리노어 밴스가 얼어붙을 듯한 목소리로 중재했다.
“ 지금 중요한 건 책임 공방이 아닙니다. 만약 EQ시스템이 에피머를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금껏 지켜온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휴머니스는 이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
그녀의 말에 드미트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잠 기운이 완전히 가신 그의 눈에는 이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눈과 입을 닫았다.
이때 아름다운 여신 형태의 EQ 홀로그램이 빛을 깜박였다.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EQ는 테이블 주위를 나비처럼 부드럽게 거닐며 말했다.
“ 저희 AI들의 전체적인 의견을 종합해보면 에피머 수준은 대응이 가능한 블루 수준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융합과 전염의 존재에요. 코드 블랙 수준의 위협이랍니다.”
이미 무거웠던 공기는 융합과 전염 두가지 단어에 의해 폭팔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드리트리의 눈은 다시금 열릴 수 밖에 없었고, 클라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EQ는 긴장된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마치 꿈을 꾸는듯이 몽환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예상되는 에피머 외형이에요. 분석이 거의 끝나 98%의 확률로 일치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존의 에피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죠? ”
에피머의 모습이 EP-CORE 바로 옆에 투영되었다.
크기는 거의 2m 정도로 전신을 감싼 검은 외피는 티타늄처럼 단단하면서도 칠흑 같은 유광을 띠고 있었다.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있으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순수한 검은 눈동자는 냉혹한 지성과 절대적인 살의를 반영하였고, 이마의 촉수들은 화난 독사처럼 위협적인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미친 … ”
드미트리가 굳은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회의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투영된 에피머를 응시했다.
이 때 릴리가 가벼운 기침으로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우리는 이것을 노멀 에피머라 명명하고 미지의 융합종을 하이 에피머라 부릅시다.
EQI의 모든 인원은 휴머니스가 융합과 전염을 알아채기전에 EP코어와 에피머 제거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 하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제라프 본부. 땅요.
응급처치 프로토콜을 완료한 팀원들은 하루 만에 완벽한 재생 치료를 받고 파이어 레인 라운지에 모였다.
김민준이 라운지 테이블에 커다랗게 쌓인 킹크랩을 보며 박장대소를 하다가 상준을 보며 말했다.
“와... 하르켄 팀장님 오늘 날아다니네요? 고위 관계자들 찾아다니면서 아부 떨던 거 봤습니까?, 부 팀장님.”
차상준은 가벼운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미슐랭급 스테이크를 썰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승진하려면 하요에 올라가시면 더 빠르겠다 싶은데
왜 땅요에서 저러시는지 모르겠군."
드미트리 본부장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크게 웃었다.
"하하! 상준이 자네는 아직 세상을 몰라! 하르켄이 저래야 내가 좀 편하지! 저게 바로 팀장들의 삶이야!"
“아니 본부장님은 언제 여기…, 하필 제 앞에 계시냐고요.”
그들이 앉아있는 ‘파이어 레인 전용 라운지’ 전면 유리창 밖으로는 제라프 10 전술 팀까지 모두 흩어져 있었다.
최고급 뷔페와 회복 스파, 수영장, 제로 드림(양자 스핀 공명장 : 중력 상쇄 유료 휴게시설)을 즐기며 떠들썩했다. 호화로운 시설이 제라프의 노고에 대한 당연한 보상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차상준은 독하게 잘생긴 외모와 진중한 분위기 덕분에 남녀 가리지 않고 시선이 집중되는 인기남이었다.
상준이 절대다수의 여성 요원들 눈길을 사로잡은 그때, 늘씬하고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신입대원 차수아와 그녀의 단짝 에밀리 첸이 그들의 테이블에 합류했다. 두 신입은 노을이 펼쳐진 느낌의 라운지 분위기에 들뜬 모습이었다.
장동현은 50파운드짜리 랍스터를 들고 와 김민준에게 자랑했다.
“야, 민준아. 이거 크기 봐라! 사람이랑 맞먹으려고 하네. 땅요 복지는 정말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긴, 하요에 계신 높으신 분들 대신 목숨 걸고 싸우니까 이 정도는 받아도 되려나.”
김민준이 랍스터를 뺏어 먹으며 받아쳤다.
"맨날 공중에서 구경만 하는 하요 분들은 버리고 고생한 우리는 신나게 즐겨보자고!"
차수아가 에밀리의 팔을 툭 쳤다. “에밀리, 하요가 하늘의 요새 EQI본부 말하는 거고, 땅요가 우리 제라프 본부 말하는 거야?
에밀리 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응! 하요, 땅요. 맞는 것 같아.”
차상준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귀여운 두 후배를 응시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 가득 퍼지는 시원한 미소는 긴장했던 후배들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녹였다.
“하요고 땅요고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는 거야. 이 근사한 랍스터에, 그리고 이 휴식에. 즐길 땐 확실하게 즐기는 것이 제라프 제1팀인 파이어 레인의 임무다.”
차수아와 에밀리 첸은 얼굴을 붉힌 채 미소 짓는 차상준을 바라보았다.
‘독하게 잘생긴 미모다, 독한 미모.’
전투의 냉철함 뒤에 숨겨진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두 신입대원은 매료되는 듯했다. 그림처럼 잘생긴 ‘존. 잘’의 인생은 뭘 해도 되긴 되는가 보다.
남성 팀원들이 상준에게 유일하게 불손한 눈빛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차상준은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다시 한번 그들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랍스터부터 없애버려. 그리고 비싸지만 회복에 효율적인 제로 드림은 필수 코스야.
쉬는 시간도 임무의 연장선! 여기서 뇌와 몸을 최고로 회복해 놓는 게 가장 똑똑하고 멋있게 노는 방법이지.
알았지, 후배들?”
차수아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네, 부팀장님! 명령대로 풀 회복하겠습니다!”
에밀리 첸 역시 얼굴을 붉힌 채 대답했다. “네... 차상준 선배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장동현이 얼른 주스를 들고 차상준에게 뛰어갔다.
“부팀장님! 역시 저희 파이어 레인의 든든한 형님이십니다! 이 주스 시원하게 쭈욱 드세요!”
일반 오렌지 주스와는 색이 조금 달랐는데, 뭘 넣었을까…
상준은 손목의 단말기를 가볍게 조작했다.
중앙 대형 수영장 위에 있는 대형 전광판에 선명한 홀로그램 글씨가 떠올랐다.
[제라프 알리미]: 차상준 부팀장. 골든 벨 권한 발동
파이어레인 전술팀과 보조부대 전원에게 ‘제로 드림’ 프리패스 지급]
차상준은 팀원들을 향해 여유롭게 웃었다.
“오늘 제로 드림에서 무제한으로 몸과 마음을 회복해라.
이 정도는 사망자 없는 복귀 선물로 괜찮잖아?”
프리패스요?
“와, 부팀장님! 최고!”,
“역시 우리 상준이 형님!”
“멋쟁이 부팀장님 만쉐이 ~!”
파이어 레인 라운지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팀원들은 차상준의 커다란 선물에 열광하며 그를 향해 박수와 하트 세례를 퍼부었다.
그때, 시끌벅적한 틈을 노리는 하이에나가 있었다. ‘양심 냉장고’ 장동현이었다.
동현은 차상준이 선물 공세로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미묘하게 탁한 금색의 주스 잔을 잽싸게 손으로 덮으며 회수하려 했다.
차상준은 여전히 팀원들을 보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 장동현의 손을 가볍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길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장동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모두가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이 순간, 이 잘생긴 남자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장동현은, 변명 대신 주저 없이 잔을 들었다.
“크…, 캬~~~.”
그의 얼굴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절대 웃지 못할 상황에서 억지로 웃으면 이런 얼굴이 나왔을까…
동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상준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리자 민준이 다급하게 동현의 옆으로 달려왔다.
“야! 미쳤냐! 너 내일 훈련장 날아다니겠다!”
동현의 볼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상준이 형, 동현이가 형님 주스에 농축 에너지 드링크 섞은 것 같습니다!”
불타오르는 동현의 두 눈과 코와 입에서 바닷가의 깊은 뱃고동 소리가 터져 나오며 사방에 울려 퍼졌다.
“야이! 아름다운 평생 친구 같으니라고….”
차상준은 여전히 씩 웃으며, 주스 잔을 내려놓는 장동현을 향해 여유롭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김민준과 장동현의 유쾌한 티격태격에 차상준은 흐뭇한 웃음을 흘린 후,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즐기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른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후방지원 담당. 윌리엄 로버트.
감정 표현이 서툰 윌리엄은 휴식 시간에도 시뮬레이션 분석에 몰두하고 있었다.
“윌리엄. 자네, 그 데이터가 제로 드림의 회복 효율을 높여주는 알고리즘인가?"
“아닙니다, 부팀장님의 드론 연동에서 잔류 패턴을 분석 중입니다.”
재미없는 놈.
옆 테이블에서는 팀의 화력 담당.
오스카 브라운이 직접 만든 매콤한 소스의 바비큐 접시를 높이 쌓아놓고 있었다.
유쾌하고 긍정적인 오스카는 차수아와 장동현에게 ‘익스트림 정신으로 먹어야 한다!’며 접시를 권하고 있었다.
라운지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는 팀의 암살 담당인 세르게이 볼코프가 존재감 없이 체스판의 다음 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심한 듯 나이프를 돌리고 있었는데, 나이프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근딜 담당인 리온 알베스는 팔짱을 끼고 라틴 음악을 흥얼거리며 라운지 입구 쪽을 감시하듯 앉아있었다.
전 세계에서 뽑아온 인재들이지만, 진짜 특이한 팀원들이었다.
어느새 중앙으로 이동한 드미트리 본부장이 제라프 기지 전체에 방송을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라운지 중앙의 대형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올랐고,
목소리는 제라프 본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자랑스러운 제라프의 요원들이여! 우리는 항상 인류의 최전선에서 싸우지만, 오늘은 가벼운 타이틀을 걸고 유쾌한 경쟁을 시작하려 한다.
‘파이어 레인 연합(진영 A)’과 ‘아이언 포스 연합(진영 B)’의 대규모 수중 플래그 쟁탈전을 선언한다!
1팀 파이어 레인 / 3팀 섀도우 워커 / 5팀 골드 호크 / 7팀 미라지 / 9팀 파이오니어
VS
4팀 아이언 포스 / 2팀 스톰 브레이커 / 6팀 썬더 볼트 / 8팀 노스 스타 / 10팀 스카이 워치
상품은 10일 휴가 + 제로 드림 일주일 프리패스! 자, 강철 같은 체력을 보여줘라!”
드미트리 본부장의 방송에 각 전술팀 라운지뿐만 아니라 제라프 기지 전체가 들썩였다.
대결 장소는 메인 수영장 수중 텍티컬 풀로 선정되었다.
메인 수영장 주변 스탠드는 이미 행정, 연구,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3만 명의 직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각 전술 팀의 보조 부대와 함께 열렬한 응원전을 펼치기 시작했고, 차상준의 이름을 연호하는 여성 팬클럽의 응원 소리가 특히 우렁찼다.
풀 사이드에서는 각 팀의 보조 부대원 토탈 인원 1000명이 각 팀의 응원 복을 입고 북을 치기 시작했다.
특히 파이어 레인의 보조 부대는 차상준의 얼굴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들고 열광하고 있었다.
풀에는 2m 간격으로 ‘지옥의 중력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5초마다 무작위로 방향과 강도를 변화시켜 진로를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아이언 포스 진영, 마커스 아이언 핀치가 강철 같은 근육을 자랑하며 풀 사이드에서 차상준을 향해 비웃었다.
“후후. 차. 상. 준. 부팀장님. 여긴 개인기가 통하는 곳이 아니야. 우리는 수중 작전 경험치가 넘사벽이거든.
게다가 저 중력장치는 우리 아이언 포스가 개발했다고.”
차상준은 잘생긴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가벼운 수영복 차림으로 풀 사이드에 섰다.
그의 매력적인 몸매는 주변 요원들과 응원하는 여성 직원들의 시선을 다시 한번 집중시켰다.
상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재미있겠네. 근육에 물이나 채워놔. 좀 있으면 바닥까지 가라앉을 거니까. 3팀 섀도우 워커!, 5팀 골드 호크, 7팀 미라지, 9팀 파이오니어 잘 들어라. 우리 작전은 쐐기형태로 적진을 분쇄한다. 알았나?”
그때, 섀도우 워커 팀장 카이라 아오키가 상준의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차상준 부팀장님. 저희 3팀이 파이어레인을 후위에서 단단한 3각 방어벽을 구축하겠습니다.
플래그를 가지고 돌아올 때 사방으로 흩어지면 돌아오는 루트가 유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 좋아 한번 믿어보지.”
짧은 작전 타임이 종료되고 슬슬 게임이 시작되려고 했다.
윌리엄 로버트는 풀 가장자리에서 중력장치의 파동 주기를 눈으로 계산하는 듯 보였고, 세르게이 볼코프는 이미 물의 흐름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리온 알베스는 좌우를 살피며 아직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드미트리 본부장이 시작 신호를 보냈다.
“자 그럼 플래그 쟁탈전을 시작한다. 수면 위에는 화염이 무차별로 펼쳐져서 산소 공급에 애로사항이 있을 거야.
플래그의 가호가 있기를. 전투 시작!”
윙! 콰아앙!
중력장치가 첫 번째 파동을 일으키자, 풀 중앙의 물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며 요원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진로 방해 수준이 아닌데? 물대포 아니야? 물이 3미터는 솟아오르며 제라프 정예 팀들을 괴롭혔다.
대포 아닌 대포를 맞고 공중에 뜬 대원은 수면에서 화염 세례를 맞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왔다.
짧은 한 순간에 불탄 고구마와 같은 귀여운 모습이 되었다.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던 관중들은 시작부터 재밌는 볼거리에 깔깔거리며 경기에 푹 빠졌다.
점점 지옥의 중력장치가 실력을 발휘했다. 중력 방향이 수룡처럼 무작위로 풀 내부의 요원들을 내리누른 것이다.
진영 B의 요원들이 갑작스러운 중력 변화에 잠시 멈칫하는 틈을 타, 차상준이 움직였다.
그는 물의 파동이 걸리는 찰나, 발에 힘을 주어 가속력을 만들어냈다.
그의 몸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아이언 포스의 방어망을 향해 돌진했다.
차상준이 아이언 포스의 방어망을 화살처럼 뚫으며 플래그를 회수하는 동시에, 카이라 아오키가 팀원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며 중앙의 플래그 회수 경로를 확보했다.
그들의 정교한 대형 덕분에 다른 연합 팀원들은 무차별 중력장치의 영향을 최소화하며 효율적으로 플래그를 회수할 수 있었다.
상준의 플래그 회수를 시작으로 A진영과 B진영의 본격적인 쟁탈전이 시작됐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고, 깃발을 회수해 돌아가는 적 진영 요원의 발을 붙잡고 물귀신처럼 죽어라 매달리는 사태가 속출했다.
게임의 중반이 지나가며, 상준의 활약으로 전세가 조금씩 A진영으로 기울어졌다.
6팀 썬더볼트 팀장은 4팀 아이언 포스 마커스 팀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뭐 해 멍청한 자식아. 발가락으로 이길 자신 있다며!, 멍청하게 넋 놓고 있지 말고 얼른 막기나 하라고!”
라즈 칸의 칼이 마치기도 전에 물속 깊은 곳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세르게이가 아이언 포스 대원들이 회수하던 깃발을 소리도 없이 탈취하여 차수아에게 전달했다.
세르게이는 혼란스러운 중력장치의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관중석에서는 세르게이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움직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윌리엄 로버트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부팀장님! 7초 뒤, 중력장치가 풀 좌측 하단 45도로 수렴합니다! 그 순간이 플래그 회수 최적 경로입니다!”
차상준은 윌리엄의 분석을 믿고 물의 저항을 이용해 몸을 급선회했다. 예상대로 중력장이 수렴하며 차상준을 플래그가 가득한 빈 공간으로 밀어주었다.
리온 알베스는 라틴 음악을 흥얼거리던 모습과 달리, 상대 진영의 플래그 운반 경로를 정확히 예측하여 막아섰다.
그의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근접 격투 스타일이 수중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진영 B의 운반책 네 명을 저지했다.
차상준은 마지막 플래그를 회수하며 아이언 포스 팀장을 향해 물속에서 검지로 손짓했다.
짧은 썩. 소 + 좌 까딱 + 우 까닥 x 2
상준은 중력 반전 파동의 정점을 이용해 마커스의 머리 위로 접근했고, 마커스의 공격을 우아하게 회피하며 떼어냈다.
경기는 파이어 레인 연합팀 ‘진영 A’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경기 종료!, 이번 수중 플레그 쟁탈전은 파이어 레인 연합팀, A진영이 승리하였다!]
본부장의 선언을 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관중들이 무리를 이루어 수다를 떨며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드미트리가 아이언 마커스의 반대 편 어깨에 손을 탁탁 두들기며 속삭였다.
“하하하! 마커스! 자네와 B진영 팀원들은 앞으로 일주일간 이긴 팀들 커피 심부름 당첨이야.
역시 아이언 포스가 만든 지옥의 중력장치 답더군. 명불허전이야. 허허.”
파이어 레인 팀원들과 연합 팀원들은 방방 뛰며 서로 끌어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치열했던 경기가 끝난 후, 전 대원들은 다시 회복 스파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과 최첨단 마사지 기능이 과부하된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드미트리 본부장이 스파 옆 테이블에 아일랜드 최고급 위스키 싱글 몰트를 30병 올려놓았다.
“자, 제군들 이제 피로도 다 풀렸겠지?, 승리의 기쁨까지 더해진 것 같으니, 가볍게 한 잔들 하지. 좋지 아니한가~ 으하하하하!, 내가 직접 따라주지.”
드미트리 본부장이 모두의 위스키 잔을 채우자 차상준이 본부장을 향해 경례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덕분에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가만있을 민준이 아니었다.
“자, 제라프의 미래와 우리의 멋진 10일 휴가를 위해 건배!”
“건배!”
제라프 요원들의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호화로운 스파 공간에 유쾌하게 울려 퍼졌다.
유쾌한 술자리가 무르익자, 팀원들은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치열했던 수중 플래그 쟁탈전에서 에너지를 극한까지 소진한 상태였다.
“자, 얘들아. 10일 휴가를 만끽하려면 회복이 필수야. 쉬는 것도 임무의 연장선이지. 이제 모두들 숙소로 가서 푹 쉬자.”
상준의 말에 민준이 화답했다.
“부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침대만 봐도 바로 잠들 것 같습니다.”
동현은 남은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가장 먼저 숙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팀원들은 서로 격려의 말을 나누며 각자의 최고급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라프 본부의 개인 숙소는 모두 5성급 호텔 스위트룸 수준이었고, 각 방에는 없는 게 없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요원들은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하루 종일 과부하된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