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QI 핵심 전술 회의실.
보조 부대를 제외한 전원이 모여있다.
공기가 점성이 느껴질 정도로 무겁다.
“크흠.”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도 천둥처럼 울렸다.
드미트리 본부장과 하르켄 팀장의 빈자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상준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숙하게 기댔다.
회의실 중앙의 홀로그램.
지난 뉴욕 전투 영상.
상준의 전투 모습이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내면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6급의 힘이 혈관을 타고 거대하게 흐르고 있다.
회의실, 아니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더욱 지루했다.
그는 턱을 괸 채 중앙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화면 속의 자신은 공간을 찢고 있었다.
'상준은 공간을 찢어.'
선조들이 즐겨 쓰던 '곰이 사람을 찢어'가 생각났다.
‘아… 숙소에 가고 싶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서 웃음을 가장한 하품을 한다.
‘충무공 이순신, 넬슨, 나폴레옹은
절충 어모, 위강적덕의 명장이었지만,
난 뭐냐고.’
"거... 잘생긴 얼굴 그만 좀 봅시다."
"..."
회의실을 가득 채운 정적.
때마침 EQ의 음성이 들려온다.
EQ :
차요원은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존 장비로 정밀한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제라프에 잔존하는지, 특무대로 향할 건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특무대가 당연히 그를 품어야지."
카르시아 특무대장이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우리 제라프는 본부장과 1 팀장님이 공석이라고요!"
2 전술팀장 빅토르와 3 전술팀장 카이라 아오키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카엘럼에도 뛰어난 요원이 하나 필요한데 말이야."
카엘럼 국장이 유스폴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EQ :
아니 지겹지도 않나요? 왜 인간들은 겉으로 '평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는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회의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
EQ는 인간들의 당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EQ :
싸움을 멈추시죠.
더 중요한 데이터가 도착했습니다.
하르켄 전 팀장의 생체 신호 소멸과 동시에 전송된
'데드맨 스위치(돌발적으로 죽거나 무력해지면 작동하는 트리거)'입니다."
중앙 홀로그램의 전투 영상이 꺼졌다.
대신 붉은색 암호화 파일이 떴다.
[파일 명: Harken_Legacy]
"하르켄…?"
유스폴 본부장이 미간을 좁혔다.
EQ :
내부 감사를 위해 죽은 하르켄 팀장이 심어둔 파일입니다.
"EQ 인간에게 죽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무례한 거야."
"사람의 죽음은 존중받아야 한다. 고인, 돌아가다, 별세하다..."
EQ :
모든 AI의 정점.
이 행성에서 가장 똑똑한 제가 모를 것 같나요?
로봇은 로봇답게, AI는 AI 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그게 제 모토랍니다.
잔소리는 사양이에요. 인간.
'그래,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가끔 깜짝 놀라긴 하지.'
EQ :
소중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지금 바로 재생합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하르켄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르켄은 평소의 기름진 미소가 아니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피곤에 찌든 얼굴.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하르켄(녹음) : 이게 재생되고 있다면 난 뒤졌겠군.
샴페인이라도 터트리고 있나? 유스폴?
유스폴이 헛기침을 했다.
하르켄(녹음) : 다들 내가 승진에 미친 간신배인 줄 알았겠지.
그래야 했어. 내부에 쥐새끼들이 너무 많거든.
서로 으르렁대던 팀장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르켄(녹음) : 내가 비굴하게 굴면서 모은 데이터다.
스파이 명단, 자금 흐름, 그리고… 부팀장에 대한 진실.
상준은 턱을 괸 채 스크린을 응시했다.
'저 양반, 죽어서도 참 바쁘다.'
홀로그램은 항상 최적화되어 흐려질 리 없건마는
그의 얼굴이 유독 뿌옇게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리커버리 캡슐이라도 들어가야 하나보다.
하르켄(녹음) :
차요원의 제라프행? 내가 조작했다.
부팀장의 진짜 잠재력은 진작에 셀 존을 넘어섰어.
강제 각성의 부작용을 극복할 대답이 그 존 뒤에 숨어있겠지.
그대로 보고하면 휴머니스 측에서 암살이 들어올게 뻔하니까
제라프에 숨기고 있었다.
좌중이 술렁였다.
그는 무능한 야심가가 아니었다.
하르켄(녹음) :
내 마지막 명령이다.
멍청한 위원회 놈들아.
차상준을 본부장에 앉혀.
나만 쫓아다니던 드미트리 영감도 아마 갔을 테니,
ZERAF를 통제할 수 있는 건 그 괴물뿐이야.
놈한테 전권을 줘라. 안 그러면 지구는 끝이다.
영상 속 하르켄이 피식 웃었다.
시선이 마치 지금의 상준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르켄(녹음) :
그리고 상준아.
귀찮다고 도망갈 생각 마라.
네가 짊어져야 할 무게다.
네 그 잘생긴 얼굴, 좀 써먹으라고. 밥 잘 챙겨 먹고.
이상.
틱. 영상이 꺼졌다.
정적...
하르켄은 죽음으로 증명했다.
자신이 가장 교활한 야심가가 아니라,
가장 헌신적인 리더였음을.
그리고 그 바통을 상준에게 넘겼음을.
상준은 마른세수를 했다.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유언이라니. 끝까지 꼰대 같군."
릴리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확고했다.
더 이상의 검증이나 파벌 싸움은 무의미했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눈앞에 있고, 죽은 영웅이 그를 지목했다.
"하르켄의 유지는 명확합니다."
그녀가 상준을 바라봤다.
“하르켄의 뜻을 기리며, 차상준 부팀장을
제라프의 본부장을 겸임한 총단장으로 임명한다."
그 순간, 회의실에 모인 모든 팀장들과 간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일어서자, 자동화된 의자가 소리 없이 외곽의 벽 속으로 사라졌다.
경직된 침묵 속에서, 제라프의 총단장인 상준을 향해 예외 없이 예를 표했다.
노련한 베테랑들부터 신참 팀장들까지, 그들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EQI 규정에 의거, 차상준 요원. 아니, 총 단장(Grand Commander)."
상준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음... 거절은 못 하겠군요."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동도, 비장함도 없었다.
그저 야근을 확정받은 직장인의 피로감일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게. 무엇이든."
상준은 무심하게 툭 던졌다.
"휴가부터 주시죠. 월급도 좀 올려주시고요."
"그거면 되겠나?"
그는 멍하니 서 있는 간부들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를 독. 미라고 부러던데,
독거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만 좀 쳐다보고 자기 일들 하시죠."
전 세계를 아우르는 EQI의 핵심세력.
제라프의 본부장.
최고의 자리에 초고속 승진 치고는
너무나 소박한 시작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든 인원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넓은 공간에는 릴리와 상준, 그리고 EQ만이 남아 있었다.
"총 단장, 축하해. 그리고 잘 부탁하네."
상준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리에게 크나큰 희망일세.”
그녀는 상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네의 힘이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휴머니스를 상대할 수 없어. 이제 제라프 전 부대는 자네의 지휘 아래 움직일 거야. 자네는 그들을 이끌고 휴머니스에 맞서 싸울 강한 전력으로 만들어야 해.”
상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상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