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요(하늘의 요새) 중앙 대연회장.
연회는 추모와 취임을 겸했다.
엑소퀀트가 많은 질병을 정복하고,
리커버리 캡슐이 90% 이상 치유해도
인간은 아직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많았다.
GSE(Geriatric Sudden End)라는
‘노년 급사 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죽음의 유형이었다.
120세의 노인이 겉모습은 60대였으나,
갑작스럽게 심장이나 뇌 기능이 멈추는
'서든 엔드' 현상이었다.
이는 권력의 정점에 있던 드미트리와
하르켄의 공석이 주는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오늘따라 신형 제복의 깃이 답답했다.
고액 연봉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위를 가지는 자리.
그럼에도 상준은 즐겁지 않았다.
"총 단장님, ZERAF의 미래는 밝습니다."
민준이 잔을 들었다.
신임 파이어레인 1 팀장이었다.
"고맙다." 상준은 짧게 답했다.
"특무대가 놓쳤지."
카르시아 랜돌 특무대장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카엘럼에도 요원이 필요했는데. 후훗."
유스폴 국장도 음침하게 웃었다.
리나는 그들의 정치적 계산을 잘라냈다.
리나 :
특무대건 카엘럼이건 이제 신경 꺼주시죠.
이젠 제라프의 본부장님이 되셨으니까요.
상준의 한 발짝 뒤에는 언제나 리나가 있었다.
총단장의 개인 비서.
그녀의 무표정은 상준에게 효율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차수아와 에밀리 챈이 다가왔다.
"축하드려요. 총 단장님."
수아와 에밀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들의 축하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상준이 너무 높이 올라가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고맙다."
상준의 담백한 답변.
“혹시... 치킨, 예전처럼 함께 먹을 수 있는 거죠?”
수아는 당돌하게 상준의 팔을 붙잡았다.
상준은 웃음을 되찾고 가만히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수아의 뒤에선 에밀리 챈이 자기 일처럼
소리 없이 응원하고 있었다.
수아의 떨림이 팔을 통해 전해졌다.
"수아야."
상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총 단장 월급에 치킨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니가 쏜다면, 언제든지.(찡긋)”
“…”
상준이 뭐라고 덧붙이려는데 리나가 개입했다.
리나 :
총 단장님. 비효율적인 사적 교류 시간은 종료되었습니다.
취임식 후, ‘EQ와 함께하는 지혜로운 본부장’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리나는 수아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수아는 결국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상준은 리나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
그 순간, 연회장 입구에서 치명적인
존재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벨라스 본부장.
그녀는 상준을 향해 와인 잔을 들고
시선을 고정했다.
“제라프 본부장. 진급을 축하드려요.
어때요? 끝나고 조용히 한 잔 하는 건?"
수아와 챈은 아멜리의 공개적인 유혹에
질투와 위기감으로 굳어졌다.
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개입했다.
리나 :
마스터, 벨라스 본부장과의 접촉은
행사 이후로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준비할게 아직 남아있습니다.
상준은 리나에게 한 번 웃어준 후에 아멜리를 돌아보았다.
“들었죠? 벨라스 본부장.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보시죠.
그럼 이만.”
EQI 주요 인물들이 슬슬 중앙 연단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날의 행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하요의 메인 서버가 송출하는 리얼 라이브 홀로그램은 땅요를 거쳐, 전 세계 120개 자치도시의 상공에 거대한 형상으로 투영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시민도 고개만 들면,
밤하늘에 떠 있는 상준의 거대한 형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월드컵? 올림픽?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는 EQI의 본부장
취임식과는 게임이 안된다.
돔형 천장은 우주의 홀로그램으로 빛났다.
수천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오직 상준에게 집중되었다.
인류에게 코바(KOVA)는 가족이자 일상이었다.
인간이 있는 곳에 코바가 있고,
코바가 있는 곳에 삶이 있었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평소 자신의 업무를 코바에게 위임하고 홀로그램으로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코바. 도시를 부탁한다.”
뉴욕, 런던, 도쿄, 파리…. 지구상 모든 자치도시의 시장들과 각 부처의 장관들이 육신을 이끌고 이곳 하요에 집결했다.
드미트리와 하르켄의 부재.
본부장이자 총 단장 상준의 등극.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취임식이 아닌, 왕의 알현식이 었다.
사회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ZERAF의 새로운 본부장이자 총 단장!
인류의 수호자!
차상준 총 단장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와 아아아 아!
거대한 함성이 돔을 흔들었다.
하요의 진동은 땅요로,
땅요에서 전 세계의 하늘로 퍼져나갔다.
상준은 단상 앞에 섰다.
눈앞의 투명 상태창에는 EQ가 작성한
‘가장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연설문이
천천히 스크롤되고 있었다.
[존경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그리고 EQI의 동료 여러분…]
상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풋…, 정말 못 말리겠다.’
그는 손을 들어 상태창을 꺼버렸다.
리나의 눈썹이 꿈틀 했다.
EQ도 돌발 사태에 긴장했겠지?
방송 사고?
아니, 각본 없는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상준은 6급의 파동을 목소리에 실었다.
“제라프 본부장이자 총단장입니다.
앞으로 총단장으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평화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전우들을 위해 잠시 묵념하겠습니다.”
1초
2초
3초
…
“저는 길게 말 안 합니다.”
음성 증폭 스피커가 없는데도 목소리가 청중의 뇌리에 직접 박혔다.
전 세계의 하늘에 떠 있는 상준의 홀로그램이 거대하게 일렁였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소거되었다.
“시민 여러분 평화는 비쌉니다.
우리가 평화의 값을 치르고 있는지
상기해 주십시오.”
상준은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치 전 세계 어딘가에 숨어 이 방송을 보고 있을
휴머니스와 테러리스트에게 경고를 주는 듯이.
“그리고 휴머니스와 쥐새끼들, 잘 들으세요.”
그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동시에 전 세계 하늘의 홀로그램 눈동자에서도 섬광이 터졌다.
단순한 영상 송출이 아니었다.
6급의 존재감이 데이터 망을 타고
전 지구적 범위로 전이되는 기현상이었다.
시민들은 전율했고, 적들은 오금을 저렸다.
“숨을 거면 완벽하게 숨으십시오.
제 눈에 띄는 순간, 서든 엔드가 될 테니까.”
짧은 침묵. 공포와 경외가 뒤섞인 무거운 공기.
상준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것은 자애로운 왕의 미소가 아닌, 포악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이상입니다.”
그는 미련 없이 단상을 내려왔다.
역대 최단 시간 취임사.
하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사람들이 숨 쉬는 법을 다시 깨닫는 순간.
와 아아아아아 아―!!!
돔이 터져나갈 듯한 환호성이 폭발했다.
정치적인 수사 따윈 없었다.
대중은 정치가가 아닌, 압도적인
힘의 군주를 원했다.
상준이 무대 뒤로 사라지자,
리나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리나 :
마스터. 준비된 원고의 단어 사용률 2%.
일치율 1%.
하지만 대중의 지지율 상승폭은 예상치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상준은 제복의 윗단추를 풀었다.
“다음 일정은 뭐지?
그 ‘지혜로운 본부장’인가 뭔가 하는 건가?”
리나 :
크큭. 방금 취소되었습니다.
방금 연설의 여파로 전 세계 서버
트래픽이 과부하 상태입니다.
EQ가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부가 행사를 생략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오, EQ 녀석. 일 잘하는데?”
상준은 씩 웃었다.
리나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상준은 망토를 휘날리며 대기실로 걸어갔다.
피로? 그런 건 과거의 추억이다.
6급의 에너지는 마르지 않는 원자로와 같았다.
오히려 방금 전의 연설로
전신의 세포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리나. 다음 코스는?"
리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했다.
리나 :
공식 연회는 계속됩니다. 하지만...
리나가 잠시 말을 멈추고 연회장 쪽을 응시했다.
음악은 계속되고, 샴페인은 터졌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주요 인사들의 눈빛은 미묘하게 공허했다.
메를린 릴리 위원장이 와인 잔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카르시아, 클라우스, 유스폴, 아멜리 뒤부아
각 부서의 팀장급들.
지구의 운명을 쥔 간부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겉보기엔 그들이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기는 듯했지만, 어느샌가 그림자처럼
연회장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쇼는 대중을 위한 것.
진짜 정치는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하요 제라프 최심부.
오메가 룸(Omega Room)
지구상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
어떠한 전파도, 도청도, 해킹도 불가능한
절대 침묵의 성역.
쿠우웅-
거대한 문이 열렸다.
상준이 리나를 대동하고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이 주는 자신감이었다.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 대신,
차가운 푸른색 조명이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분위기는 살벌했다.
상준은 빈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고, 오만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취임식 1시간 만에 비밀 회동이라.”
상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체력들도 좋으십니다. 평균 100살 맞아요?”
유스폴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카르시아는 팔짱을 낀 채 상준을 노려보았다.
릴리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농담은 거기까지. 총 단장.”
그녀가 테이블 중앙을 터치했다.
팟-!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하르켄이 목숨 걸고 남긴 쥐새끼 리스트였다.
“공식 행사는 끝났네. 지금부터는 EQI의 생존을 논한다.”
릴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국 1개 도시와 와 미국 5개 자치도시.
자네도 알겠지만 위치가 묘해.
그놈들 분명한 목적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상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저를 불렀겠죠. 청소를 시키려고.”
“말이 심하군.”
유스폴이 쏘아붙였다.
“틀린 말입니까?”
상준이 눈을 부라렸다.
6급의 파동이 순간적으로 방출되자,
유스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기 있는 간부들 중에 쥐새끼가 없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정적. 숨 막히는 긴장감이 오메가 룸을 채웠다.
갓 취임한 총단장이 지구 최고위
권력자들의 면전에 칼을 들이민 셈이었다.
그때였다.
“푸후훗!”
교태 섞인 웃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아멜리 뒤부아였다.
그녀는 상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역시. 내가 알던 그 ‘미친개’가 맞네.
제라프 제복을 입혀놔도 야성은 그대로야.”
그녀가 상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드레스 틈으로 보이는 쇄골이 도발적이었다.
“좋아요. 나도 동의해. 벨라스의 정보망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거든.
누군가 내 시스템을 가지고 놀고 있어.
기분 나쁘게.”
그녀의 눈빛이 상준의 눈과 얽혔다.
“총 단장님. 이참에 다 갈아엎는 거 어때?
내가 도와줄게. 아주 은밀하고, 뜨겁게.”
지잉-
리나의 눈에서 푸른 광채가 번뜩였다.
[경고: 아멜리 뒤부아. 불필요한 접근 감지.]
리나는 아멜리의 따가운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넘겼다.
“도움은 됐고.”
상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원탁을 덮었다.
“제라프는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제 방식대로.”
상준은 천장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EQ. 팬텀 가동해.”
EQ :
마스터. 타깃은?
“지금부터 EQI 전체를 대상으로 감사를 시작한다.”
유스폴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상준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부터는 사냥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