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에서의 에피소드.
종이컵 헹궈서 사용하기.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이 찝찝함을 참는 거다.'
탕비실.
종이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새 거다.
누가 봐도 하얗고 깨끗하다.
하지만 손은 이미 정수기 레버를 누르고 있다.
쪼르르, 물이 차오른다.
대충 흔들어 버린다.
다시 물을 받는다. 이 짓을 매일 한다.
"아니, 새 종이컵인데 왜 헹궈요? 누가 썼던 것도 아닌데."
신입이 신기한 생물 보듯 묻는다.
귀찮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길어진다.
그냥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냥. 공정 과정에서 묻었을 미세한 가루와 나의 심적 안정을 교환하는 중이야."
"와, 진짜 피곤하게 사시네요."
"맞아. 나도 내가 피곤해. 그러니까 말 걸지 마. 기운 달려."
종이컵을 헹구는 행위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신앙에 가깝다.
누군가는 이상하다 할 거고,
누군가는 물 낭비라고 할 거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헹구지 않은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면,
목구멍에 종이 필터가 걸리는 기분이 든다.
기분 탓인 거 안다.
내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이 미세한
찝찝함 하나 제거 못하는 인생이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출연진 이상하다고 욕할게 아니네.'
자조 섞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사실 세상엔 이런 부류가 꽤 있다.
식당에 가면 수저 밑에 꼭 휴지를 까는 사람.
아니, 요즘은 휴지 형광증백제가 더 나쁘다며
앞접시 위에 수저를 올리는 사람.
그게 나다. 남들이 보면 유난이다.
하지만 이건 유난이 아니라,
세상의 무질서에 대항하는 나만의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선배, 그럼 밖에서 외식은 어떻게 해요?
거긴 더러운 거 투성이일 텐데."
"눈 감으면 안 보여. 여긴 내 구역이니까 관리하는 거고."
"참 편리한 논리네요."
"원래 인생은 선택적 결벽으로 버티는 거야. 안 그러면 미쳐."
정수기 앞에서 신입과 나누는 대화도
이제 에너지가 바닥났다.
컵 안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헹궈내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혀끝에 닿는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평화다.
'이러고 살아서 뭐 하나 싶다가도,
헹구지 않은 컵은 도저히 못 참겠단 말이지.'
귀찮음이 온몸을 지배하지만,
이 사소한 루틴만큼은 포기 못 한다.
강한 힘엔 책임이 따른다는데, 내 강박엔 늘 피로가 따른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헹궈야 마실 수 있는 걸.
"자, 이제 일하자. 컵 헹구느라 기운 다 썼으니까
점심 전까지는 찾지 마."
등 뒤에서 신입의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비웃음이면 어떻고 동정이면 어떠랴.
내 종이컵은 지금 아주 깨끗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