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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Aug 04. 2022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내부고발자 이심원은 당대의 삶은 비참했으나 훗날 충신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1)


 내부고발자란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집단 구성원이 저지른 비리를 폭로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부고발 사건이 사회개혁의 계기로 높게 평가받더라도, 내부고발자 자신은 구성원의 손가락질과 따돌림, 그들의 의도적인 핍박으로 인한 비참한 삶을 각오해야 한다. 


 조선 시대 최대의 내부고발자는 자신이 속한 친족 집단의 한 사람인 고모부 임사홍과 사돈 임원준의 비리를 고발한 이심원(李深源)이다. 그는 친족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정보를 임금에게 고발하여 도승지이며 정승으로, 또한 임금의 사돈이기도 한 그들을 탄핵하였다.


 이심원은 '태종의 4대 손자로써 총명하고 박학하며 경전을 연구하는 마음이 조금도 해이한 때가 없으므로 종실의 영재라고 칭찬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10월)  이심원은 세종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증손자이자 세조의 사촌 형인 보성군의 손자이며, 내금위장인 평성도정의 아들로 나라에서 주계부정(朱溪副正)이라는 봉작명을 내려주었다. 종친 봉작명은 대개 연고지 지명이었고, 부정(副正)은 대군의 직계 자손인 종친에게 주는 종 3품의 칭호였다. 


 이심원은 성종 때에 내부고발자로 나섰다가 당대에는 화를 당하고 비참하게 살았다. 손자 때문에 사랑하는 사위를 귀양을 보낸 조부 보성군으로부터의 박해와 임사홍 부자의 원한으로 평생 어렵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사관은 이심원이 그의 아들들과 함께 비참하게 처형된 사실을 기록하며 논평하였다.

 '이심원은 천성이 충효스럽고 정직하여, 일찍이 성종을 면대하여 임사홍의 간사한 형상을 극력 논하니, 임사홍은 이로써 죄를 받았다. 임사홍은 이심원의 고모부이므로 그 조부 보성군의 미움을 받아, 불효로써 죄를 받아 수십 년 폐치되니, 인륜의 변을 당한 것을 스스로 상심함이 몸 둘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아들 이유녕이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서용(敍用)되지 못하였는데, 갑자년에 이르러 임사홍 부자의 모함으로 화를 당한 것이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10월 1일)


 후세에 이심원은 친족의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지 않고 군신의 의리를 다한 그의 충정을 높이 평가받아, 조선 최고의 충신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세종대왕이 명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삼강행실도》를 훗날 속편을 만들며 개정할 때 이심원의 이름이 충신 편에 추가되었다. 가까운 친척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먼저 생각했으며,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충절이 지극하여 선공후사(先公後私)로 충신의 모범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명종 때 《삼강행실도》를 개정할 때 종친 이호원이 이심원을 충신으로 포함시키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사홍 부자가 성종의 성덕(盛德)을 좀먹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이심원만은 나라만 생각하고 자기 집은 잊었으며 공사만 생각하고 자기 몸은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일어나 외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며 종사의 안위에 대해서 힘껏 진달하고 간신의 죄를 밝혀내었으니, 당시에 사림의 경사와 국가의 다행함을 이루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연산조에 이르러 소인(小人. 임사홍을 일컬음)이 뜻을 얻고 나서 마침내 평소에 품고 있던 원망 때문에 큰 옥사를 일으켜 이심원 세 부자가 연달아 주륙을 당했으니 그 참혹한 화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명종실록, 명종 15년 6월 26일)


 명종은 승지에게 상소를 대신들에게 전하여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들의 의논 끝에, 결국 내부고발자 이심원은 친족의 정도 돌아보지 않고 군신의 의리를 다했다 하여 《삼강행실도》의 충신 편에 이름을 올렸다. 

 명종 15년 7월 2일,  예조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심원을 《삼강행실도》에 추가하여 넣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심원의 일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서 인쇄하여 출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심원은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서 사사로운 일보다 공적인 일을 앞세우는 충신의 모범으로 인용되었다.  명종 1년 2월, 병조좌랑 윤춘년이 친족인 윤원로를 고발한 내용을 담은 실록의 기록도 이를 잘 드러낸다.

 '윤원로와 교분이 두텁기로는 신(臣)만한 자가 없고, 윤원로의 심사를 알기로도 역시 신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를 위해 차라리 윤원로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릴 수는 없기에 할 말을 다 하겠습니다.

 성종 때 이심원은 조카로서 고모부 임사홍의 간악함을 상소하였는데, 그의 말이 바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심원은 임사홍의 손에 죽었으니, 지금까지도 이를 슬퍼합니다. 신은 형제의 정도 돌아보지 않고 군신이 의리를 다하려고 합니다. 진실로 후일에 반드시 심원이 당하던 그런 화가 있을 줄 알지만 신의 한 몸을 애석해할 것은 못됩니다.' 


 이심원은 스승인 김종직에게 배운 대로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던 악습이었던 궁중의 불교행사를 타파하게 하였고, 임금의 개혁을 가로막는 세조 때의 훈구대신을 더 이상 쓰지 말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었다. 


 그럼 이심원이 왜 내부고발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어떤 불이익과 화(禍)를 당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찬찬히 알아보기로 하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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