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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Aug 05. 2022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2)

훈구대신들은 기개 있는 젊은 종친 이심원을 적대시했다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2)


 이심원은 기개가 있는 선비였다. 조선이 숭유억불정책으로 유교를 이상으로 삼고 개국한 지 80년이 넘었으나 불교의 문화에 젖어서 버리지 못하고 있던 축수재(祝壽齋)를 거듭 간청하여, 결국 폐지시켰다. 축수재는 국왕과 왕후 등의 장수(長壽)를 빌기 위하여 부처에게 올리던 공양이었다. 조선 태종 때에 축수재를 혁파하였으나 불교를 좋아하던 세조가 축수재를 다시 부활시켰다.


  1477년 성종 8년 9월 9일.

  편전에서 열린 아침 조회에서 이심원은 축수재를 반대하며 아뢰었다.  

 "축수재는 군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복을 구하기를 간사한 데 하지 말라 하였고, 모르는 귀신한테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왕이 능히 어진 정사를 행하면 근본이 굳어지고 나라가 편안하여 한없이 장수하실 것인데, 어찌 사도(邪道)에서 복을 구하겠습니까?”


 임금이 가까이에 입시한 정승들을 돌아보고 이심원의 의견에 대해 물었다. 우의정 윤자운이 나서서 아뢰었다. 

 "수명을 비는 것은 전하를 위하는 일이니 비록 정도(正道)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심원은 즉각 반박하였다. 

 "윤자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신하가 국왕의 수명을 빌면서, 겉으로는 따르고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고 여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대(先代)부터 행하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도(道)가 아니면 어찌 내버려 두겠습니까? 청컨대 즉시 폐지하소서.”

 성종이 답했다. 

 "과인이 고려해보겠다.”


 하지만 성종은 세 대비들의 반대로 축수재 폐지를 실행할 수 없었다. 세 명의 대비는 세조의 왕비인 할머니 정희대비, 예종의 비로 양모(養母)인 인혜대비, 그리고 생모(生母)인 인수대비였다. 세 대비는 모두 불교를 믿어, 부처에게 임금의 장수를 비는 축수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심원은 거듭거듭 축수재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은 종친으로 은혜를 외람되게 입었으므로, 나라를 사랑하고 군왕을 향한 견마지성(犬馬之誠)에서 매양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너무 간절하여 참지를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신(臣)을 모욕하고 헐뜯으며 미쳤다고 하고 분수를 모르고 지나치게 나선다고 하는 까닭입니다. 

 말씀드린 것이 비록 여러 차례에 이르렀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못하니, 전하께서는 신의 광망(狂妄)하고 지나친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신의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옵소서.” (성종실록, 성종 8년 11월 26일)

 

 임금은 이심원을 따로 불러 말했다. 

 "경이 축수재 폐지 등을 일찍이 조회에서도 말하였는데, 지금 또 이를 말하니 과인이 가상하게 여긴다. 하지만 축수재 시행은 세조께서 시작한 것이고 이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된 것이 아닌가.”

 이심원은 임금에게 아뢰었다. 

 “성상께서 축수재는 세조 대왕께서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에 감히 혁파할 수 없다고 하시니 신은 답답합니다. 신은 이것이 전하의 뜻이 아닌 줄 알지만, 한 나라의 주인이 되어서 나라의 책임을 지고 계신데,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신은 천 년 뒤에 반드시 이를 거론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대비전에서 과인의 수명과 복을 원해 치성을 드리기를 원하시고, 말려도 듣지 않으신다. 이것을 정색하고 억지로 말리면 불효가 되니 어려운 일이다.”


 성종은 이심원에게 상소를 돌려주며 경고성 당부를 하였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뒤에는 다시 말하지 말라!”

 성종은 이심원에게 표범가죽 한 장을 하사품으로 내려 주면서 한 번 더 경고했다.

 “축수재는 세조께서 개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손자가 되어 감히 혁파할 수 없다. 너의 말은 들어줄 수 없으니, 앞으로는 들어줄 수 있는 말이 아니면 아뢰지 말라.” (성종실록, 성종 8년 11월 26일)


 이심원은 그치지 않고, 또다시 상소를 올렸다.  

 “송(宋) 나라의 재상 조보(趙普)가 일찍이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태조가 허락하지 않자, 이튿날에 다시 아뢰니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조보가 이튿날에 또 아뢰니, 태조가 크게 노하여 추천장을 찢어발기어 땅에 팽개쳤습니다. 조보가 엎드려서 수습해 가지고 돌아갔다가 찢어진 서류를 다시 붙여 다시 처음과 같이 아뢰니, 태조가 이에 깨닫고 마침내 그 사람을 썼습니다.”

 조보는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신이 조보와는 비록 위치를 견줄 수 없으나, 다만 종친이라는 이유로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전하께서 다시 생각해보시고, 만약 채택할 수 없으시다면, 또한 함부로 상을 줄 필요도 없으니, 제게 내리신 하사품을 회수하였다가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리소서.” (성종실록, 성종 8년 12월 2일)


 드디어 임금은 이심원의 거듭된 상소를 읽고 결단을 내렸다.

 "과인으로 하여금 요(堯)·순(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니, 비록 과문하고 몽매하지만, 실로 경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이제 말한 바를 좇아 곧 축수재를 혁파하겠다.”


 성종은 세 대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생일을 맞아 전국 사찰에서 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축수재를 전면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이 과정을 지켜본 사관은 이심원이 성종으로 하여금 기어이 축수재를 폐지하게 한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관은 이날의 일을 기록하며 이심원이 도(道)를 숭상하며 지조와 절개를 귀하게 여긴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이심원의 기개가 과하여 상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기술하여, 당시 이심원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심원은 독서를 좋아하고, 옛 성현의 도(道)를 흠모하는 자이다. 유자(儒者)를 만나면 반드시 성리(性理)의 연원을 토론하고 지조와 절개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이심원은 이단(異端)의 책을 보면 찢어서 버리며 언행을 위태롭게 하여, 사람들이 간혹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8년 12월 2일)


 이심원이 정승의 앞에서 대놓고 꾸짖으며 비판하는 기개를 보였고, 그치지 않고 간하여 결국 임금으로부터 축수재 폐지를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한명회, 정창손, 윤필상 등 세조의 즉위를 도운 훈구대신들은 임금의 복을 비는 일을 신하가 그만두라고 청하는 것을 경박하고 불충한 것으로 보았다. 세조, 예종에 이어 성종까지 삼 대에 걸쳐 권세를 누리던 훈구대신들은 이날 이후 이심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고비마다 각을 세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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