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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창씨개명 한번 잘 못 하면, 자손 대대로 짐승 새끼 소리 듣게 됩니다

by 두류산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눈을 떠니 입이 바싹 말랐다. 아직 새벽이었다. 손을 넣어 속옷을 만져보니 땀으로 젖어있었다. 방 안은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긴 숨을 토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이었던가....’

나는 달리고, 미와와 마달영이 나를 추격하고, 홍명희 선생이 나타나 동굴을 가리키며 숨으라고 손짓하였다. 나는 동굴로 뛰어들었는데, 내 몸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바닥으로 빠지고 말았다.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동방이 밝아온다’ 연극으로 나는 연극무대를 잃었고, ‘장한가’ 노래로 극단을 잃었다. 이번 공연에서 총독부를 거스르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하필 이런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나서......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내 앞에 있는가.’


6월 10일, 공연 날이 되었다. 제일극장 건물에 걸린 벽보에는 ‘조선 문예회 주최 창씨개명 계몽 공연’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나란히 ‘세기의 만담가, 신불출 공연‘이라는 선전 깃발이 펄럭였다. 박부용이 ‘신민요 1호 노들강변’을 부른다는 안내도 있었다. 노들강변 덕에 박부용은 장안에서 최고의 민요가수가 되었다.

나의 일본식 이름 공개를 겸한 창씨개명 계몽 공연을 취재하기 위하여 신문기자들이 공연장 앞 좌석을 차지했다.

“권 기자는 안도(安東)로 일본식 성을 지었는데, 자네 작품인가?”

“안동(安東) 권(權)씨 문중 어른들이 안도(安東)로 짓고, 모두 바꾸라고 해서......”

“그나저나, 신불출도 창씨개명을 한다니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불출(不出)이라는 이름은 은근히 의미가 있었는데.”

매일신보 기자가 따끈따끈한 정보라고 하며 다른 기자들에게 말해주었다.

“총독부가 신불출에게 만담 학교를 세워준대.”

“역시 돈과 명예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건가?”

“우리라고 별수 있나? 동경 유학이다, 경성제대다, 다 나와 가지고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기사나 쓰려고 여기 있지 않나?”

“창씨개명으로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좋은 일인데, 뭘 그렇게까지.”


공연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노래와 춤, 촌극 등 여러 공연이 진행되고 마지막 차례로 내가 무대에 올랐다. 기대에 찬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나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신불출! 신불출!”

임석 경관석을 보니 미와와 마달영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춘원 선생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광수!”

관객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이광수? 아니올시다. 가야마 미쓰로, 향산광랑(香山光浪)입니다.”

관객들은 소곤거렸다.

‘맞아. 진작 창씨개명을 했어.’

나는 관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광수 선생이 원래 조선의 왕손이에요. 나라가 망했으니, 왕손 성을 가진 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나는 관객들들 둘러보고 말했다.

“이제부터 이광수 선생을 부를 때 일본식 이름 ‘가야마 미쓰로 센세’로 부르는 것이 맞아요. 본인도 원하시고요.”

객석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나는 관객을 보고 말을 이었다.

“신문에 보니 창씨개명을 못하겠다며 죽은 사람도 있어요.”

나는 미와와 마달영을 슬쩍 살피며 말했다.

“전남 곡성에 사는 류건영(柳健永)이라는 사람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서한을 보내고 자결을 했대요.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과 똑같이 일본식 이름을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데 그게 죽을 일이에요?”

관객들은 수런거렸다.

“전북 고창에 사는 임병수(林炳洙)라는 사람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로부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아이가 울면서 창씨개명을 해 달라고 하니 할 수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조상에게 죄를 지었다며 돌을 안고 마당의 우물로 뛰어들었어요.”

마달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주춤주춤 앉는 모습이 보였다. 객석의 분위기는 불안함이 번졌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분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류(柳)씨와 임(林)씨는 창씨개명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일본 성에도 류씨와 임씨가 있어요, 야나기와 하야시라고. 성을 바꿀 필요가 없었으니, 죽을 필요도 없었는데......”

객석 여기저기서 한숨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뭔 소리야?”

“창씨개명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앞자리의 신문기자들도 귓속말로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 이쯤 되면 여기 이 신불출이 창씨개명을 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어떻게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할 거예요. 그렇죠?”

객석 여기저기서 ‘네!’ 하고 호응했으나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내 일본식 이름은 현전 우일(玄田牛一)이에요. 성은 검을 현(玄)과 밭 전(田)으로 현전(玄田)이고 이름은 소 우(牛)에 하나 일(一)을 더하여 우일(牛一)이니, 일본식 발음으로는 구로다 규이치 올씨다.”

객석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문대로 신불출도 결국 창씨개명을 했네.”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며 미와와 마달영도 비로소 얼굴을 폈다. 나는 관객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경성부청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어요.”

관객들은 나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미리 준비한 붓글씨를 쓴 종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여기 현(玄) 자와 전(田) 자를 합치면 축(畜) 자가 되고, 우(牛) 자와 일(一) 자를 합치면 무슨 글자가 되겠습니까? 생(生) 자가 돼요. 두 글자를 합하면 뭐가 됩니까?”

눈치 빠른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축생?”

나는 관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축생(畜生), 일본말로 칙쇼, 개자식이 된다, 이 말이에요.”

객석은 일순 조용해졌다. 관객 중 한 사람이 소리 죽여 웃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꼬가 터진 듯 관객들은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미와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칙쇼!”

마달영이 입에 호각을 물고 벌떡 일어나 미와의 눈치를 살폈다. 미와는 손짓으로 마달영을 제지하였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창씨개명, 이것 신중히, 잘해야 해요. 한번 잘 못 지으면, 자손 대대로 짐승 새끼 소리 듣게 돼요.”

“옳소! 옳소!”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기 담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관객들은 무대를 향해 큰 박수를 보냈다. 나는 객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관객에게 물었다.

“경상도 산청군 덕산의 덕천(德川) 강가에 사는 조택강(曺宅康)은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거 괜찮겠습니까?”

관객들은 웃으며 큰 소리로 호응을 하였다.

“안됩니다!”

“그래요, 이렇게 이름을 지으면 덕천 가문 집안의 무사들이 가만히 두지를 않을 것입니다.”

나는 관객들의 마음을 읽으며 말을 이었다.

“제 고향 사람인 개성의 전병하(田炳夏)는 밭 전(田) 자 뒤에 농사 농(農)을 넣어 '전농병하(田農炳夏)라 했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덴노 헤이까’ 천황폐하가 돼요. 이거 괜찮겠습니까?”

관객들은 킥킥거리며 외쳤다.

“안됩니다!”

“그래요. 안됩니다. 실제로 군청에서 신고하여 바로 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관객들은 임석 경찰이 있는 좌석을 흘긋거리며 보다가 여기저기서 소리 죽여 웃으니, 웃음이 파도처럼 번졌다.

“남원에 사는 남일남(南一男)은 ‘미나미 타로(南太郎)’라고 미나미 집안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이거 괜찮겠습니까?”

관객들은 합창을 했다.

“안됩니다!”

여기저기서 ‘미나미 총독의 형이라고?’ 하며 웃음 배인 말로 웅성거렸다.

“조선총독의 이름이 미나미 집안의 차남이라는 뜻인 미나미 지로 (南次郎)인데, 미나미 집안의 장남으로 이름을 짓다니, 그러면 조선 총독의 형님이란 말입니까? 안됩니다!”

관객들은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웃었다. 미와는 인상이 구겨졌다.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내가 어떤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는지 밝힐 차례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신경 써서 이름을 지어 경성부청에 신고를 끝냈습니다. 여러분, 궁금하시죠?”

흥미로워진 관객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네!”

“강원야원(江原野原), 강원도의 산야(山野)를 성과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일본식 발음으로는 에하라 노하라가 됩니다.”

관객들은 서로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에하라 노하라?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에하라 놀아라, 망할 놈의 세상인가?”

“에하라 노(怒)하라, 일제에 분노하라?”

“에하라 놓아라, 제발 조선을 그만 놓아주라?”

관객들이 웅성거리며 하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자 마달영은 다시 벌떡 일어나 호각을 입에 물었다. 미와는 마달영의 허리춤을 잡아 강제로 앉히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일 벌이지 마! 기자들 와 있는 것 안 보여? 총독 각하의 숙원사업을 신문기사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어?”

나는 극장 대기실에서 곧바로 압송되어 종로경찰서 취조실에 끌려갔다.


다음날 창씨개명 계몽 공연과 나에 대한 내용이 신문기사에 나왔다.


세기의 만담가 신불출, 천황의 충직한 신민(臣民) 임을 과시

-일본식 이름은 강원야원(江原野原)으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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