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여름, 평양
1963년 여름, 평양.
‘동무는 천리마를 탔는가!’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며칠 채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거리의 벽에 붉게 휘갈겨 쓴 구호 탓에 날씨는 더욱 무덥게 느껴졌다. 주민 총동원 운동인 천리마운동은 어려운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들이 노동을 배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지도자들이 나라 운영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민들이 충분히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러니 대책이라는 것도 인민들이 더 많은 노동을 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나 일을 게을리하는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역설적으로 노동자를 괴롭히는 자본가들처럼 행동하는 비극이 북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57세로, 내가 취성좌에 입단했을 때의 단장님 나이보다 많은 나이가 되었다. 남에서 북으로 넘어와서 만담으로 훈장도 받고 공훈배우도 되었다. 문학예술 총동맹에서 만담을 연구하고 가르치도록 '신불출 만담 연구소’도 차려주었다. 이제 연구소를 만담 학교로 발전시킬 일만 남았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뭔가 틀어지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공연 무대에 대해 갑자기 심한 통제를 가하였다. 무대에 오르기 전 내용의 검열과 공연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였다. 사회안전청은 체제 강화와 정권수호를 위해 반국가, 반혁명 행위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경찰기능을 강화하였다. 참을 수없는 수준으로 무대공연에 간섭을 하고, 일제 치하의 경찰보다 더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1963년 가을, 북조선 정권 수립을 기념하는 9.9절 예술대회를 맞아 공훈배우로서 만담 공연을 하였다. 첫 만담은 평등을 내세우는 북조선에 왜 이리 장(長)이 많은가에 대해 풍자를 하였다. 평양 모란봉에 올라서 돌을 던지면 모두 감투 쓴 장(長)이 맞는다고 비꼬았다.
다음 만담은 김일성 이름 앞에 붙는 경칭과 찬양의 수사가 무려 180자에 달하는 충성편지를 공개하는 등 날로 도가 지나치는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풍자 만담이었다. 남조선에서 이승만이 망하여 외국으로 쫓겨 간 것은 이승만이 방귀 뀐 것까지 찬양하는 간신배 때문이라는 것을 비판하고 김일성 우상화 노름을 풍자하였다.
만담을 한창 하고 있는데, 무대 뒤쪽에서 웃통을 벗은 건장한 배우 두 명이 나에게 신속히 접근해왔다. 배우를 가장한 사회안전청 요원이었다. 두 요원은 나의 겨드랑이를 하나씩 끼고 강제로 무대 인사를 시켰다. 무대에서 두 사람에게 번쩍 들리어 희극적으로 퇴장하는 나의 모습에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나는 무대에서 바로 압송되어 평양 사회안전청으로 끌려갔다. 취조실에 들어서자마자 요원들은 온갖 욕을 퍼부으며 몽둥이로 내리쳤다.
“신 선생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야!”
무너지면서 바닥에 쓰러지자, 구둣발로 몸을 짓이겼다. 온몸이 뒤틀리고 살이 찢어지고 너덜거렸다. 무자비하게 매질을 하고, 정신을 잃으면 물통에 머리를 처넣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이 놈들이, 왜놈들이나 하는 짓은 똑같…….’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몽롱해지고 아프다는 감각도 약해져 갔다.
그때였다. 사회안전청 정치국장과 건장한 사람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쳤다. 요원들이 다짜고짜 내가 반동주의자들과 공모하여 김일성을 실각하려는 모의에 가담했는지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있는 힘을 다해 모르는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뒤로 비틀어 묶어놓고 취조실 천정에 거꾸로 매달았다. 포획된 짐승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으니 육체적 고통도 문제지만 점점 한낱 미물(微物)이 된 것 같았다.
끝까지 버티었으나,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나는 김일성 격하운동에 가담한 반혁명 분자로 무기한 노동교화 대상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얼마간을 구치소에서 보낸 후 나의 몸뚱이는 트럭에 실려졌다. 트럭은 평양을 빠져나와 삼수갑산 산간오지에 있다는 수용소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눈을 뜨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취성좌에 들어올 때 단장이 나에게 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연극은 왜 하고 싶은데?”
“무대가 좋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자유를 줍니다.”
나는 내 평생 무대에서 얼마나 자유를 누렸는지, 희곡 노트를 한 장씩 넘기듯 생각해 보았다. 일제 치하에서는 '동방이 밝아온다' 연극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라,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한다’고 외쳤다. '양산도' 연극에서는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면서 ‘에헤라 놓아라, 못 놓겠다.’를 외치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지를 관객들과 나누었다. '장한가' 노래를 만들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논개와 계월향을 되새기게 했고,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창씨개명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미군정하의 남한에서는 신생 독립국으로 당분간 연합국의 보호는 필요하다고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을 지지했고, 전범 일왕(日王)을 처단하지 않고 있는 맥아더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북쪽에서는 관료화되어 너무나도 장(長)이 많은 북조선을 비판했고, 김일성 우상화도 풍자했다.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검열과 철저한 통제 아래, 침묵을 강요당하며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살아야 했다. 해방이 되어, 세상도 무대도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남쪽의 무대도, 북쪽의 무대도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만담가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해방조국에서 전범 일왕(日王)을 처단하지 않고 있는 ‘동경의 쇼군’ 맥아더를 신랄하게 비난하다가 또다시 침묵을 강요당했고, 자유로운 무대를 찾아 월북을 했으나 북쪽에서도 내가 침묵하기를 원했다.
나는 힘으로 누르며, 무대를 검열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순순히 굴복할 수가 없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저항하여 자유롭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촘촘한 거미줄 같은 통제를 피하여, 내 생각을 가능한 한 그대로 객석에 전하고 싶었다. 한 층 밑에 감추어서라도, 관객들과 내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민들레 홀씨를 퍼뜨리듯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통제 망에 걸리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불 가까이 선회하던 나방이 한 순간 ‘빠지직’ 불에 타버리듯이.
내가 올라갔던 수많은 무대가 보인다. 김현 단장과 전수린, 이경화가 보인다. 단장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래도 막은 올라야 해!”
이경화는 손수건에 피를 토하고, 전수린은 슬픈 곡조의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대에서 목청껏 자유롭게 외치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무대에서 내려오니 미와와 마달영, 애국청년단과 사회안전청 정치국장이 보인다. 검열에 걸려 무대 밑에서 폭행과 고문으로 신음하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나, 신불출의 인생이다.
신불출은 노동교화소와 정치범 수용소로 옮겨 다니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는 가는 곳마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수용소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함경도 요덕 수용소에서 비참한 생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웃음을 안겨 주다가 1975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