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전범 일왕을 처단하라

해방이 된 조국에서도 또다시 침묵을 강요당하자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by 두류산


전범 일왕을 처단하라


1946년 6월 10일, 해방 후에 처음으로 맞는 6.10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마침 20주년이 되는 해여서 조선영화 동맹은 '6·10 만세운동 기념 연예 대회'를 서울 국제극장에서 이틀간 성대히 개최하기로 하였다. 나의 만담 공연은 연예 대회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게 되었다. 나는 태극기에서 이번에 공연할 만담의 소재를 찾아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우익청년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있었다. 일제 치하 엄혹한 시절인 1940년 6월 10일에도 창씨개명을 풍자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무대에 섰는데, 해방 조국의 6.10 만세 날에 무엇이 두려워 무대를 피하겠는가?

극장 앞에는 ‘신불출 선생의 실소 사전(失笑辭典)'이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첫날의 공연은 대비를 잘한 탓인지 우익청년들의 객석 점거 소동이나 소란 없이 잘 진행되었다. 다만 수상한 청년들이 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할까 우려하여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피했다.

둘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극장은 나의 등장만으로도 소란해지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드디어, 신불출이다!”

나는 관객들을 향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서, 태극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중앙의 태극 문양을 유심히 보세요.”

관객들은 붉은색과 청색이 회오리치는 태극문양을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태극 문양의 윗부분은 붉은색이고 아래 부분은 청색이에요. 꼭 38선으로 그은 남과 북 같지 않아요?”

많은 관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을 둘러싼 저 사괘(四卦)를 보세요. 우리나라를 둘러싼 4대 강국처럼 보입니다.”

관객들은 웅성거렸다.

“그러네. 영락없이 강대국에 뺑 둘러싸여 있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색은 이른바 우(右) 요, 적색은 좌(左)에요. 그리고 사괘는 연합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태극기가 보여주듯이 조선은 좌우가 갈리고 연합국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어요.”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그러네, 그대로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태극기의 4괘(四卦)는 모스크바 회담을 개최한 4대 강국이에요. 4대 강국이 가운데 태극인 우리 조선을 감싸고 있는 것이에요.”

나의 목소리는 점점 웅변조로 변했다.

“이 태극기에 나타났듯이 우리나라는 아직 사대 강국의 보호가 필요한 갓난아기와 같아요.”

객석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친 소리 그만해라!”

관객들은 크게 웅성거렸고 내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신불출도 맛이 갔군. 너무 나가는 것 아니야?”

“이건 숫제 정치 만담이야. 이제 보니 신불출도 완전 빨갱이네.”

나는 관객들의 거친 반응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남북을 통일한 민주정부를 세우고, 우리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연합국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길어야 5년이고 우리가 준비되면 더 빨리 끝낼 수도 있다, 이 말이에요. 동의하십니까, 여러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렀다.

“집어치워!”

“헛소리하지 마!”

이때 객석에 앉아 있던 수명의 청년들이 소리치며 무대로 달려들었다.

“저, 빨갱이 새끼 잡아라!”

무대 아래서 달려드는 우익청년들과 이들을 가로막는 극장을 지키는 청년들의 격투가 벌어졌다. 무대 아래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였다. 극장 출입구 쪽에서 웅성이며 큰 소리가 들렸다.

“빨갱이 신불출을 잡아라!”

놀란 관객들이 술렁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몽둥이와 흉기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극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일제히 우르르 무대로 달려들었다. 나는 무대에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대명천지에, 이게 무슨 짓이야! 저 깡패들을 막으시오!”

행사의 기도를 보던 청년들과 몇몇 관객들은 일어나서 달려드는 청년들을 가로막았다. 몽둥이와 삽을 들고 난입한 청년들은 일어서서 막으려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극장으로 흉기를 들고 들이닥치는 청년들의 숫자는 점점 늘었다. 관객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극장은 삽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상황이 위급함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저 놈들이! 저 놈들을 막아라!”

이때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무대에 뛰어올라 몽둥이로 사정없이 나의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고 무대는 머리에서 터져 나온 피로 얼룩졌다.

그때 몇몇 청년들이 달려와 깡패들을 물리치고 나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선생님, 피하셔야 합니다!”

청년들은 피가 흐르는 나의 머리를 압박한 채로, 나를 들쳐 메고 무대 뒤로 빠져나갔다. 우익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무대 위로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신불출이 도망간다! 빨갱이를 잡아라!”


나를 에워싸서 부축하는 청년들과 함께 나는 뒷문을 통해 극장을 빠져나가 근처의 작은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우익청년들의 추격을 피해 명동을 속히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길목을 지키고 있던 몽둥이와 흉기를 든 깡패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낙심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소리쳤다.

“너희 놈들은 누구냐? 이러고도 무사할성싶으냐!”

“이것 봐라? 죽어도 천하의 신불출이다, 이 말이지. 우리는 애국청년단이다. 나라를 망치게 하는 빨갱이 짓거리는 눈뜨고 볼 수 없어 응징하러 왔다.”

우두머리 깡패는 몽둥이, 삽과 흉기를 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이 빨갱이 새끼, 앞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반쯤 죽여 버려!”


뒤늦게 피 흘리며 쓰러진 채로 발견된 나는 근처의 백인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리가 부러지고 피를 너무 흘러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며칠을 혼수상태로 보내다 눈을 떴다.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깡패들에게 무자비하게 맞으면서 ‘기어이,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제 치하에도 살아남은 목숨이 해방 조국의 길바닥에서 죽는다는 원통한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침묵을 강요당하던 내가 해방조국에서도 침묵을 강요당한다는 것이 억울했다. 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무대에서 만담을 하다가 일본 경찰도 아니고 같은 동포에게 폭력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민주주의가 뭔가? 누구든지, 무슨 생각이든지,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폭력으로 다른 의견을 묵살하려고 하다니.’

죽음에서 깨어나 겨우 목숨을 건진 나는 홀로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분노에서 나온 것인지, 절망감에서 나온 것인지, 근원모를 웃음이었다.


병원에 두 달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후속 테러를 염려하여 청년들이 24시간 병실을 지켰다. 광복절 1주년 기념행사가 서울 국제극장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러진 다리는 아직도 완전하지 않았다. 나는 목발이라도 짚고 무대에 서고 싶었다. 몸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우익청년들이 다시 습격할까 봐 걱정이 되어 말리는 분위기였다. 미군정에서도 태평양 사령부와 사령관인 맥아더를 무대에서 비판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경고를 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바뀐 세상마저 내입을 틀어막지 못해 안달이라니.’

나는 목발을 지탱하여 병실에서 조금씩 걸어보았다.

“누가 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가? 무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하는 것이 나, 신불출다운 거야.’


광복절 기념행사의 마지막 순서에 내가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환호를 질렀다.

“신불출이다! 다행히 무사하네.”

나는 부축을 받으며 목발을 짚은 발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나는 관객들에게 히틀러와 무솔리니, 일왕(日王)을 강도에 비유하는 만담을 시작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인 히틀러는 자살하고, 무솔리니는 잡혀 죽었는데, 일왕은 전쟁에 패하고 1년이나 지난 오늘까지 왜 재판도 받지 않고 무사한 겁니까?”

나는 동경의 연합국 총사령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비난했다.

“전범 일왕을 처단해야 할 사람이, 동경에서 쇼군 놀이나 즐기고, 도대체 맥아더는 뭐하고 자빠져있는 겁니까?”

나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었다. 내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치안방해라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혀 실소가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조국에서도 치안방해라니......’

나는 맥아더 포고령 제3호 위반인 연합국 비방과 치안방해 혐의로 미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는 무대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무죄를 주장했다. 민주주의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일반 대중에게 공연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정 재판은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 결과는 징역 1년의 실형 또는 벌금 2만 원이 선고되었다.

나라를 잃은 시절에 무대에서 침묵을 강요했듯이, 해방이 된 조국에서도 나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더 이상 자유롭게 무대에 오를 수가 없게 되고 일제 치하처럼 또다시 침묵을 강요당하자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해방 직전에 걸린 극도의 우울증이 다시 찾아왔다.

인간은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세상만 벗어나면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게 했듯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미군정청이 원하는 메시지 외의 말은 물리적인 힘으로 침묵하기를 강요하였다. 폭력적인 일제의 거대한 힘에 맞선 것처럼,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자유롭게 말하기를 거부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에 순순히 굴복할 수는 없었다. 나의 생각을 그대로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 깊은 연못에 몸이 잠겨 있는 듯 숨쉬기가 버거웠다.



*****


을씨년스러운 날씨처럼 마음도 어지러웠다. 더 이상 미군정하에 있는 남쪽의 무대에서 자유롭게 내 생각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홍명희 선생은 내가 무대에 계속 서려면, 북으로 넘어가는 것이 해결 방안이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취성좌 입단 시절의 열아홉 청년의 몸도 아니고, 이제 사십 살이 넘어 가족을 다 남쪽에 두고 무대를 위해 혼자 북으로 간다? 그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단성사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경찰 정복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마달영이었다.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마달영은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바꾸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 보았다.

‘종로경찰서 형사과장 마달영’

나는 소름이 끼쳤다.

‘종로경찰서 형사과장이라니?’

마달영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도둑도 잡고 빨갱이도 잡고, 나라에 나쁜 짓을 하는 놈은 다 잡습니다.”

마달영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불출 선생, 여전히 위태롭게 살고 있네요.”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말하는 건가?’

마달영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마달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무대에서 위험한 발언만 하고 다닌다던데.”

싹싹 빌어도 용서가 안 될 마달영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욕이라도 퍼부어야 하는데, 가위눌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 조만간 경찰서에서 또 보게 될 것 같소.”

나는 한마디도 못했는데 마달영은 하고 싶은 말을 다 뱉고 행인들 틈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며칠 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서울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갔다. 그곳에서 어렵게 어선을 얻어 타고 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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