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를 구한 헤라클레스가 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게 되었다는 절망감을 가진 한 과학자의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다. 미국의 수많은 젊은 생명을 구한 영웅으로 찬양받다가 반역자로 의심받는 오펜하이머의 굴곡진 안생을 보여주는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핵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후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침몰해 가는 오펜하이머의 고뇌와 아픔을 긴장과 흥분으로 채우며 관객을 몰입하게 했다. 놀란 감독은 원자력위원회와 상원의원들이 벌이는 두 청문회를 교차편집하며, 컬러와 흑백의 전환을 통한 시각적 연출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하였다. 당대 타임지 표지 모델로 화제의 인물인 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를 통하여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만큼 숨을 죽이는 긴장감을 관객에게 맛보게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소설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신이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주었다는 죄로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는다. 프로메테우스는 높은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도록 한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간을 쪼는 독수리들을 처지하고 사슬을 풀어주어 프로메테우스를 구해내었듯이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를 통해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전해준 오펜하이머를 궁지에 몰아넣어 심장을 쪼아댄 원자력 위원회의 루이스 스트로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를 징벌하고, 50년대 미국을 휘몰아친 매카시즘의 사슬에서 오펜하이머를 구해낸 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내놓는 영화마다 탄탄한 작품성에 뛰어난 대중성을 갖추어 영화의 예술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등이 그랬다. <오펜하이머>는 이 점에 있어서 다른 영화와 다소 결이 다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단한 영화지만, 러닝타임을 30분 정도 줄였으면 어땠을까?”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들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영화가 지루했다.’라는 말도 귓전으로 들었다. 영화 촬영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콤팩트했다고 들었으나, 러닝타임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가 보다 상업적인 측면과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아내의 말처럼 덜 중요한 장면은 덜어내는 게 관객들의 몰입을 위해 더 좋은 선택이었으리라. 하지만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놀란 감독은 관객이나 제작사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단 한 컷도 양보할 마음이 들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