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류산 Oct 06. 2023

조선 최악의 과거(科擧) 부정 사건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대한민국 최악의 입시부정사건은 2005년 대학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넘는 수많은 수험생들이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되었다. 당시의 부정행위는 대리시험을 치르거나 휴대전화를 이용해 답안을 백여 명의 공모자에게 전송하는 방식 등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교훈 삼아 2006학년도 수능시험부터 부정행위 단속을 위한 감독체계를 강화했다. 원서접수 때부터 대리 시험을 방지하기 위해 본인 확인을 위한 사진의 크기를 확대하고, 시험실 인원도 관리하기 좋게 줄였다. 또한 모든 전자기기의 시험장 반입을 금지하고 적발 시 시험성적 전체를 무효 처리하도록 하였다. 대리 시험 방지를 위해 답안지에 필적확인란 문구를 쓰는 방안도 도입하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의 유혹이 없을 수 없었다. 시험이 경쟁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입신양명해야 사람 구실을 했다. 오죽하면 퇴계 이황도 과거에 떨어지고 낙향해 방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이서방!'하고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종을 부르는 소리임을 확인하고 호칭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과거에 붙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고 했겠는가. 퇴계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학문이 높아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양반가는 아들이 다섯 살쯤 되면 천자문을 가르치며 과거시험을 준비시켰다.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0대 후반이니, 대개 30년 이상을 공부해야만 합격이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대략 1만 5천 명 남짓인데 평균으로는 매년 30명 정도의 합격자 배출에 그쳤다. 벼슬길에 오르는 관리의 길 문턱에 놓인 과거가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정의 유혹은 그만큼 커졌다. 그렇다면 경쟁률이 높기로 악명이 높은 조선시대 과거의 부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숙종 24년 11월 6일, 임금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으므로, 단종을 왕으로 복위한다고 공표했다. 단종의 복권이 세조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림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조선의 제6대 임금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죽어서 노산군으로 불렸다. 하지만 의리와 예의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배운 조선의 선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단종을 국왕으로 복권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연산군이 일으킨 수많은 선비들의 피를 부른 무오사화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을 쓴 김종직의 글을 제자들이 사초에 올리려다 발생하였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단종의 복권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왔으나 임금은 세조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일이라 복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단종의 복권 문제는 세조의 후손인 조선 국왕들에게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사림의 열망으로 남았다가 사망한 지 240여 년이 지나 비로소 숙종에 의해 복권되었다. 숙종과 신하들은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기 위해 임시 과거시험을 개최하였다.  

 "단종을 복위시킨 것은 진실로 큰 경사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으레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하는데, 국왕의 칭호를 드린 것도 즉위한 것과 다를 게 없다. 특별히 증광시를 시행하게 하라." (숙종실록, 재위 25년 5월 13일)

 증광시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이었다. 숙종 25년 10월 21일, 조정은 34명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합격자가 발표된 이후, 도성에서는 ‘어사화냐, 금은화냐?’하는 동요가 유포되었다. 과거 합격의 징표인 어사화를 돈으로 얻었다고 풍자하고 비꼬는 노래였다. 또한 과거 부정을 조롱하며 지은 시가 도성 유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백지로 시험지를 내어도 홍패지(紅牌紙), 과거 합격증)를 받고,

 머리에 어사화 꽂고 길에서 쳐다보는 이에게 으스대네.

 도적의 소굴에서 밤중에 휘파람 소리 들리니 

 저 도적의 무리들도 깨끗하다 해야 할까'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 이탄(李坦)은 과거 부정에 관한 풍문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탄은 숙종 21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재로 바른말을 잘하는 기개 있는 대간이었다. 이탄은 자신이 과거 부정을 막아야 할 감시관으로서 부정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음에도, 과거 부정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임금에게 알렸다. 

 "신(臣)이 이번 과거에 감시관(監試官)으로 임명되었는데,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니 사람들이 ‘학문에 어두운 사람이 합격하였고, 또 표(表)를 지어 올렸는데 부(賦)로 합격된 경우가 있었으니, 대리시험을 쳤거나,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남의 글을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는가 하면, 심지어, ‘차비관(差備官)이 피봉(皮封)을 바꾸어 이름을 속였다.’는 등의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문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단정적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고 보장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엄밀히 조사하여 그 실상을 알아낸다면 뒷 폐단을 근절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과거 급제자의 시권(試券,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을 거두어 부정 여부를 명백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일) 

 피봉(皮封)은 과거 응시생이 시험 답안지의 끝부분에 응시자의 이름과 사조(四祖·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등의 신상을 적고, 그 위를 연이어 접어서 풀로 봉한 것을 일컬었다. 피봉 부분과 시험지 부분에 각각 일정한 글자를 써넣어 표기한 다음 피봉을 시험지와 분할하여 따로 보관하였다. 과거 응시자의 신분을 채점자가 알지 못하게 하여 실력만으로 공정하게 합격자를 판단하기 위한 부정방지 조치였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관리되었다. 기능상 크게 고시관(考試官), 감시관, 차비관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시관의 임무는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답안을 채점하여 합격자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감시관의 임무는 시험부정을 적발하는 일이며,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차출되었다. 차비관은 과장(科場)을 관리하는 관원들을 말하며, 여러 부서에서 차출되었다.

 이탄의 폭탄 발언에 조정은 술렁거렸다. 숙종 25년 11월 5일, 임금은 이탄이 아뢴 과거의 부정의 소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대신들의 의논은 분분하였다. 우의정은 대간이 소문만을 가지고 아뢴 것으로는 과거 부정 여부의 실태를 살피기 어렵다고 아뢰었다. 다른 대신들은 시험을 무효화하고,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고, 차비관들을 옥에 가두고 부정에 개입했는지 엄중히 조사해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숙종은 문제를 제기한 사간원 정언 이탄을 불렀다. 

 "그대는 들은 대로 진달 하도록 하라."

 이탄이 아뢰었다. 

 "과거가 끝난 뒤 사람들의 말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급제자 이성휘가 표(表)를 지어 올린 것을 보았는데, 부(賦)로 합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급제자 송성의 시권이 바꿔치기되었다는 소문입니다. 송성은 본래 학문에 어둡다고 일컬어지므로, 감히 조사하여 처리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부(賦)는 미사여구를 구사하여 현란한 문장을 짓는 시험이고, 표(表)는 제갈량의 출사표처럼 임금에게 자신의 의견을 올리는 시험이었다. 임금이 재차 물었다. 

 "이밖에 달리 의심스러운 일은 없었는가?"

 이탄이 아뢰었다. 

 "박필위 또한 연소한 사람으로 아직 글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데 합격되었다고 합니다만, 이는 떠도는 말이어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은 이탄의 말을 듣고, 의금부에 명하여 이성휘와 송성을 엄하게 조사하라고 하였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5일) 

 의금부가 이성휘와 송성을 잡아 옥에 가두고 조사에 들어가게 되자, 부정에 개입한 명문가들은 이를 조기에 차단하려고 했다. 이성휘는 재상 이선의 아들이고, 박필위는 재상 박세채의 손자였다. 사헌부 지평 권업은 이탄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의 간원(이탄을 말함)이 당초 과장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으면 시험장 안의 모든 것을 일체 살펴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급제자를 발표한 뒤에서야 부정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신은 이를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다면 곧바로 조사하기를 청해야 하지만, 만약 실체가 없는 사실을 고했다면 나라 사람의 의혹만 일으키는 것이니 마땅치가 못합니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3일) 

 심지어 사간원의 동료인 박견선이나 사헌부의 장령 이광저도 과거 부정조사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이탄의 비판에 가담했다. 사관은 조정의 여론을 역사에 남기며 이들을 비난하였다. 

 “부정행위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개 권세가의 자제들인데, 사간원의 박견선과 사헌부의 이광저 등의 무리가 사사로운 부탁을 받고서 간혹 쓸데없는 말로 조사를 저지시키기도 하고, 또한 중요한 의논을 정지하여 임시변통으로 모면하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놀랍게 여겼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7일) 



 시권(試券, 답안지) 바꿔치기로 합격 가로채기  


 원래 과거제도는 귀족들이 세습하여 관직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고 가문의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관리의 선발기준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신분이 아닌 오직 능력으로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공정함이 과거제도의 핵심적 요소였다. 과거제도는 국가가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이므로 나라의 장래가 걸린 일이었다. 그러니 가장 공정하고 흠이 없어야 할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한다면 적절한 인재 충원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국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등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될 일이었다. 

 단종 복위를 축하하며 치른 과거시험의 급제자 이성휘와 송성은 합격의 기쁨을 누린 지 보름 만에 의금부 옥에 갇혔다. 의금부의 조사를 시작으로 부정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 대상은 확대되었고, 증광시 과거 부정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의금부는 차비관이 부정에 가담하여 피봉을 넣어둔 상자를 함부로 뜯고 미리 알아둔 합격자의 피봉을 찾아 공모한 자의 피봉으로 바꿔치기 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합격된 답안의 이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합격을 가로채는 수법을 쓴 것이었다. 의금부 문초로 공모자 홍수우가 자백하였다. 

 "일찍이 박태회와 알고 지냈는데, 하루는 박태회가 와서 말하기를, ‘나의 아들 박필위가 회시(會試)에 나아가는 데, 그대가 과장에 들어가면 돌보아줄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뒤 또 말하기를, ‘오석하와 그대를 이미 차비관에 임명되도록 도모하여 놓았으니, 모쪼록 서로 상의하여 돌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민시준과 정순억이 피봉(皮封) 4장을 빼내었는데, 민시준은 그 가운데 3장을 가지고 박필위·이성휘·이수철에게 나누어 주었고, 1장은 심익창에게 내주었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2월 30일)

 사람들은 과거 부정이 남의 글을 베껴 쓰거나 대신 답안을 작성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합격으로 채점된 된 답안지를 통째로 바꿔치기 한 전대미문의 간 큰 부정행위에 놀랐다. 사관은 탄식하며 기록을 남겼다.

 ‘대체로 대과나 소과의 시험지 끝에 응시자의 성명·나이·거주지·본관·사조(四祖)를 쓰고는 접어서 풀로 봉하고, 밖에 ’근봉(謹封, 삼가 봉함)‘이라고 쓰는 것은 옛날 피봉에 쓰는 제도였다. 하지만 고시관(考試官)이 몰래 피봉을 뜯어서 사사로운 정으로 부정으로 채점을 할까 염려하여 아예 피봉을 절단하여 분리해 두는 규정을 두었다. 차비관을 시켜서 시험지와 피봉에 글자를 써넣어 표시한 후, 분할하여 감독하며 맡아서 지키게 했다가, 채점을 마친 후 분할된 피봉을 가져와 합하게 하였다. 과거의 부정을 방지하는 도리가 이같이 엄밀하게 정해졌는데도, 별도로 준비한 피봉을 합격한 다른 사람의 시권과 몰래 합하게 하고, 이름을 바꾸어 함부로 합격을 차지하니, 실로 예사로운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과거 부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부정의 사실이 드러났다. 시험관의 부정채점도 밝혀졌다. 조사 결과 과거 응시자 심익창의 시험 답안 첫 문장을 쓴 쪽지를 정순억을 통해 인척이며 채점관인 홍문관 수찬 조대수에게 몰래 전해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심익창의 자백으로 드러났다. 

 "조대수와는 혼인 관계로 해서 서로 친한 사이이므로, 쪽지를 보고 채점할 때, 내 답안이 나의 글인 것을 알아차린다면 혹시 도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비록 도움은 주지 않더라도 반드시 고발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의 첫머리를 쓴 쪽지를 보내었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7월 28일)

 정순억은 과거 비리 사건에 재물이 거래되었음을 자백했다. 

 “김시흥이 은을 싼 봉투 한 덩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송성이 준 것인데, 과거에 합격을 시켜주면 나누어 가지면 된다.’ 하였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사관은 정순억의 자백을 실록에 기록하면서 한탄하였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하니, 동요에 이르기를, ‘어사화냐, 금은화냐? (御賜花耶 金銀花耶)’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여러 자백에 은이 등장하니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조정은 과거 부정에 대해 철저한 조사 끝에 법에 따라 엄하게 형을 집행하였다. 숙종은 과거 부정의 엄중함을 알고 의금부에 몸소 나가 죄인들을 심문하여 각각 엄중한 벌을 내렸다. (숙종실록, 재위 27년 5월 13일)

 피봉을 바꾸어 합격자 바꿔치기의 과거 부정을 획책한 이성휘와 박필위, 그리고 이를 도운 공모자들은 제주도와 흑산도 등 먼 섬의 관아에 노비로 내치는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았으며, 부정 채첨을 도모한 시관 조대수는 파직을 당하고, 국경지대의 군사로 복무하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과장(科場)의 관리 책임을 맡았던 자들도 부정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과거부정에 대한 의혹을 처음 임금에게 아뢰었던 이탄은 감시관으로서 부정을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역사는 기묘년에 일어난 과거 부정행위를 다룬 옥사(獄事)를 기묘과옥(己卯科獄)이라 하였다. 


 몇 달 후 도승지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번 과장(科場)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운데,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이탄 혼자서 아뢰었습니다. 설혹 감시관으로 시험장의 일을 방지하지 못한 실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한 일은 장려할 만하고 죄를 줄 수는 없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받아들여, 특별히 죄를 용서하고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하라 명하여, 이탄은 사간원 정언으로 곧 복귀하였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2월 6일과 11일) 


 조정의 대신들은 부정의 문제가 발생하였던 증광시의 문과 급제자 전원의 합격을 무효화하는 파방(罷榜)을 할지를 둘러싸고 임금 앞에서 격론을 벌였다. 임금은 결국 과거시험을 무효화하는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이번 일은 비상(非常)한 변고이므로, 일반적인 예(例)로 처리할 수 없다. 파방해야 한다는 의논이 옳다고 할 만하니, 파방하라."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7일)

 파방 조치로 부정에 개입하지 않은 합격자는 물론, 피봉 바꿔치기로 피해를 본 자들 모두가 급제가 취소되거나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수년 후 부정에 직접 관련이 없었던 자들과 억울하게 합격을 바꿔치기당한 자들에 대해 다시 합격을 시켜주었다.  

 숙종 36년 6월 16일, 대사간과 대간들이 아뢰었다. 

 "기묘과옥에서 이미 죄인이 밝혀져서 억울하게 불합격된 자들의 사정이 드러났으니, 다시 합격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숙종이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같음을 알고 말했다. 

 "단종을 복권한 일은 더할 수 없이 큰 경사인데, 이를 축하하는 과거에서 불행하게도 부정이 있어서 문과를 파방하였으니, 이는 심한 흠결이었다. 시관(試官)을 죄주고 과거 응시자를 죄주되, 파방(罷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엄청난 부정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과거를 없는 것으로 하였으므로, 마음이 항상 좋지 않았다. 기묘년의 문과를 특별히 복과 하되, 이후에도 과거에 부정행위가 있어 비록 파방의 의논이 있다 하더라도 부정을 저지른 시관과 과거 응시자를 엄하게 벌을 주되, 파방은 하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 (숙종실록, 재위 36년 6월 16일)

 과거 부정이 있은 후 조정은 과거제도의 허점을 보완하는데 힘썼다. 부정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벌을 더욱 엄하게 하였고, 과거장의 허점도 보완하였다. 숙종은 철저한 시험 관리를 위해 차비관을 각별히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 관원 중에 차출하는 등 만전을 기하라고 명하였다. 

 "내일은 바로 생원진사시가 있다. 과옥(科獄)이 있은 후이니, 모든 과장(科場)의 차비관은 가려 뽑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봉미관(封彌官)은 삼사(三司)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차출하라." (숙종실록, 재위 28년 2월 9일) 

 봉미관은 과거를 실시할 적에 과거 응시자가 답안지 끝에 응시자의 성명·생년월일·본관·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인 피봉을 분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리를 말했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과거 비리는 존재하였고, 부정행위는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며 지속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새롭게 진화된 과거 비리가 발생할 때마다 규정과 제도를 보완하며 대응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출신 가문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500여 년 동안 존속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대학 입시제도가 미국의 명문대학들과 달리, 출신 집안의 배경으로 합격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은 고려와 조선의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도의 DNA가 우리 사회에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 08화 조선의 신숙주 vs 당나라의 위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