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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Nov 04. 2024

맹사성 그 사람

 조선 시대 청백리의 상징인 맹사성이 태어난 동네와 살았던 고택을 방문했다. 맹사성은 660여 년 전, 고려 공민왕 시절인 1360년에 온양(현 아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롭다.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며느리가 해를 치마로 품었다는 범상하지 않은 태몽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맹유는 절에서 과거 공부하던 아들에게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했다. 아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후 며느리와 동침하게 하여 태어난 아이가 맹사성이다. 


 맹사성의 아내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는 말로 유명한 최영 장군의 손녀다. 맹사성의 조부 맹유와 최영은 친구 사이로 이웃에 살았다. 최영은 친구의 손자인 맹사성의 비범함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손녀사위로 점찍었다. 그 후 맹사성은 최영의 집을 물려받았다. 


 맹사성 고택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거의 7백 년이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한옥이다. 고려와 조선 초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고택 뒤 언덕에는 구괴정(九槐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종 당시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었던 황희, 맹사성, 권진 정승이 모여 각각 세 그루의 느티나무(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맹사성이 은퇴를 청할 때 세종은 좌의정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여 녹봉도 받게 하고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아마 세 정승이 모인 날도 국가 중대사를 논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황희와 권진 정승이 맹사성 집을 방문한 게 아닌가 싶다. 세 분이 정자 아래로 보이는 탁 트인 너른 들을 보며 나랏일을 상의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맹사성은 관직 생활 동안 공정하고 청렴하게 일을 처리해 존경을 받았다. 그는 소탈한 성품으로 신분을 막론하고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가 맞아들였다.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타고 등을 보인 뒤에야 들어왔다. 70세가 넘어 벼슬을 내려놓기를 청했으나 세종의 거부로 76세까지 일했다. 은퇴 후 고향 온양에서 여생을 보내며 한가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한 <강호사시사>를 남기고 79세에 사망하였다. 


 맹사성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세종 때 박연과 악공들을 지휘하여 국악의 기초를 확립했다. 대금도 직접 만들어 즐겨 불었고, 집을 찾은 사람들은 대금 소리로 그가 집에 있음을 알았다.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바깥출입 시에는 가마를 타지 않고 검은 소를 타고 다녀,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 호는 고불인데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어진(꼬불아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해학적으로 지은 별호이다.  


 맹사성 고택을 다녀온 후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조선왕조실록을 찾았다. 먼저 당시의 사람들은 맹사성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해서 ‘맹사성 졸(卒)’이라고 쓴 후에 사관(史官)이 망자에 대한 세간과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졸기(卒記)’를 보았다. 


 세종 재위 20년 10월 4일 실록의 기록이다. 

 “(맹사성의) 부음(訃音)이 주상께 전해지니 임금이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 장례식에서 소리 내어 울며 슬픔을 나타냄)하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官)에서 장사를 돌보게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한다.”


 졸기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아 세종이 맹사성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것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맹사성의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지은 이유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하니 문(文)이라 하고, 청백하게 절조를 지켜 정(貞)을 넣었다고 밝혔으니 시호에서 그의 사람됨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엿보인다. 


 실록을 넘기다 조선사에 있어 맹사성이 남긴 중요한 사건을 볼 수 있었다. 세종 재위 13년, 임금은 선왕인 태종을 사관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세종은 《태종실록》을 감수한 맹사성과 실록청 당상들을 불러 자신의 뜻을  밝혔다. 

 “예전 (중국의) 제왕들은 선왕의 실록을 친히 보지 않은 자가 없는 것 같다. 이제 《태종실록》을 춘추관에서 편찬을 마쳤으니, 과인이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의정 맹사성이 나서서 간곡한 말로 반대하였다. 

 "이번에 편찬한 태종실록은 선왕의 좋은 말씀과 업적을 기록하여 다시 고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보시고 고치실 일이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굳이 보시겠다고 하시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전하를 핑계 삼아서 보고 고칠 것입니다. 사관(史官)도 국왕이 후에 볼 것을 의심하여 사실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후세에 진실한 역사를 전하겠습니까."

 세종은 맹사성의 말을 받아들였다.  

 "경의 말이 맞도다." (세종실록, 재위 13년 3월 20일)


 세종은 맹사성의 말을 듣고 선왕의 실록을 들여다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역대 조선의 왕은 실록이 완성되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 엄격한 관례가 되었다. 연산군이 유일하게 이 관례를 깨고 할아버지 세조에 대해 직필을 한 사관들을 참형에 처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하지만 연산군도 문제가 된 사초를 없애지는 못했다. 


 조선의 사관들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가감 없이 사초를 작성한 것은 맹사성의 덕분이다. 우리는 그 덕택으로 사관의 직필이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맹사성은 청렴과 소탈함을 겸비한 인물로, 그의 정신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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