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 가려면 과천에서부터 긴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사는 과천은 언제부터 지명이 과천이 되었을까? 고구려 때는 율목군(栗木郡)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과천에는 도성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과일을 재배하는 과수원이 많았다고 한다. '밤나무(율목)'를 비롯해 많은 과일나무(果木)를 과천에서 길러 과일의 고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게다.
과천과 금천(영등포를 포함한 시흥군의 예전 명칭), 수원은 가까운 이웃 고을이었다. 고을의 수령끼리도 친하게 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과 가까운 과천의 현감은 평안감사나 나주목사와 견줄 정도로 지방관으로서 요직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웃 고을의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면 수령들끼리 모여 전별회를 열어주었다. 이때 불상사가 생겼다. 전별회를 열어주던 수령이 술을 못 이겨 죽고 만 것이다. 1417년 태종 17년에 일어난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추어보니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오늘날 검찰청에 해당하는 사헌부는 함께 술자리를 한 수원부사와 과천현감에게 벌주기를 임금에게 청했다.
“과천 현감 윤돈이 교대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수원부사 박강생과 금천 현감 김문(金汶) 등이 윤돈을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김문이 술에 상하여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자리를 함께하여 많은 술을 권한 자들에게 죄가 있습니다.”
태종이 사헌부의 보고에 말했다.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이웃 수령을 전별함도 또한 흔히 있는 일이다. 하니 다른 벌은 제외하고 파직만 하게 하라.” (태종실록, 재위 17년 윤 5월 4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과천의 지명이 없어질뻔한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과천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이웃 고을인 금천에 통합될 뻔한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 14년 8월 호조의 신하들이 의논하여 임금에게 아뢰었다.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을 병합하여 용인(龍仁)으로 하고,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衿果)로 하소서." (태종실록, 재위 14년 8월 21일)
태종은 호조에서 과천을 금천에 통합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과천에는 유력인사들의 과수원과 농장이 많았다. 그래서 과천의 별칭을 부자들이 숲을 이룬다는 뜻의 부림(富林)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부림의 이름은 과천의 부림동으로 남아있다. 부림동은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가구당 평균소득이 높은 동네이니, 이름 그대로이다. 과천의 이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한 태종 당시, 과천에 근거지를 둔 한 유력자가 지명을 지켜내었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대제학 김한로(金漢老)의 농장이 과천에 있었는데, 그는 호조에 항의했다.
“과천이 비록 땅이 좁고 인구가 적더라도 도성 가는 길목에 있는데 어찌 금천에 통합할 수 있는가?”
호조는 당대 세력가인 김한로의 청을 받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지난번에 과천을 금천에 병합하였으나,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기까지 사객(使客)을 영송(迎送)하는 데 길이 멀고 험하니, 과천을 다시 두도록 청합니다.” (태종실록, 재위 14년 윤 9월 24일)
사객(使客)은 왕의 명을 받들고 심부름을 가는 신하, 즉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말했다. 사객은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과 국내의 지방에 파견되는 사신이 있었다. 사객이 지나가는 관할 수령은 그들에게 필요한 숙식을 제공해야 했다. 태종은 호조가 원래대로 과천의 지명을 유지하자고 아뢴 일을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사돈인 김한로의 청임을 알고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과천시는 일제강점기에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과천면으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 이후 1980년 대에 이르러 과천면이 과천시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