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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May 22. 2023

오늘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한 사관은 왕과 대신들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였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조정내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와 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니 오늘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국내외에서 매일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는 언론인일 것이다. 


 사관들이 기록한 문서인 사초(史草)는 예전에는 왕도 보지 못했다. 사초는 대개 무기명으로 실록청에 제출되는데, 예외적인 일이 있었다.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부왕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을 한 사관들의 붓을 무디게 하기 위해 사초실명제를 하였다가 사초조작사건이 일어나는 부작용을 겪었다. 조선 최대의 사초 조작 사건을 역사에서는 ‘민수의 옥(獄)’이라 부른다. 

 "나라의 역사는 만세(萬世)의 공론입니다. 민수가 사초를 건드려 나중에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예종실록, 재위 1년 4월 24일)


 대신들이 대개 실록 편찬을 책임지는 고위직인 실록청 당상이므로 이름을 적은 자신의 사초를 보고 필화를 입을까 두려워 기록된 내용을 고치다가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관으로서 역사가 내리는 평가보다 권세를 가진 대신들의 평가를 더 중하게 여겨 생긴 비극이었다. 


 오늘날의 사회는 통치자나 권세가들이 훗날 역사로 남을 언론인이 적은 기사를 매일 들여다본다. 그러니 통치자나 권세가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억압하려 할 것이므로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로 헌법상 보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다. 벌어진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하거나 아예 없는 사건인 듯 보도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조선시대의 사관은 스스로 자신들의 직책이 역사를 바로잡는 일임을 알고 자부심을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예문관 소속의 사관들이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는 자신들 직책의 중요성에 대해 임금에게 아뢰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대에 내려오는 나라마다 사관(史官)을 두어, 당시의 일을 기록하되, 아름다운 점을 드러내고 나쁜 점을 숨기지도 않아 사실에 따라 바르게 써서, 하나같이 공정하여 기록에 늠름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함이 부월(鈇鉞, 도끼)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으니,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중종실록, 재위 2년 6월 10일)


 한국의 뉴스에 대한 신뢰도가 조사대상 46개국 중 40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한국 사람 3명 가운데 2명(67%)은 뉴스를 외면한 경험이 있는 데, ‘신뢰할 수 없거나 편향적’(42%)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왜 우리 뉴스의 신뢰도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고, 정파적이며 편향적이라고 외면받는 걸까? 


 사(史)라는 글자는 손(手)으로써 중심(中)을 잡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날의 사관인 언론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가필이나 곡필을 하면 어찌 역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실록은 사관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관은 지위는 낮지만 만세의 공론(公論)을 쥐고 있으니, 권세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사사롭게 아부해도 안 된다.” (중종실록, 재위 11년 8월 1일)


 사관은 오로지 역사와 후세 사람들의 평가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기록하려는 사관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양심을 걸고 역사 앞에 진실을 말하려는 언론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림출처)

https://www.ytn.co.kr/_ln/0484_201712112050058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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