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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May 18. 2023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은 왜 항명을 하였을까? (2)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소속 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진주성에 도착한 유숭인은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나 수성장 김시민은 거절하였다. 진주목사는 정 3품이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는 종 2품으로 유숭인이 상급자다. 더구나 경상우도 관내에서는 병마절도사가 군의 최고 지휘관이다. 그럼에도 김시민이 유숭인의 명을 거역했으니 명백히 항명인 셈이다. 김시민은 3,800여 명의 병사로 10배에 가까운 3만 대군에 맞서고 있어 한 명의 병사가 아쉬울법한데 왜 유숭인의 병사를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적이 진주에 육박했을 때 유숭인이 말을 달려 성 아래에 이르러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김시민이 장수의 명령 계통이 일관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계엄 중에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우병사께서는 밖에서 응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김시민은 병마절도사로 상관인 유숭인이 성 내로 들어오게 되면 지금까지 짜놓은 방어계획이나 지휘 계통 등에 혼선이 생겨 일사불란한 수성전이 되지 못하게 됨을 염려했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유숭인은 김시민의 항명을 수성장의 권한으로 인정하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김시민보다 상관인 유숭인은 군의 지휘계통을 거론하여 겁박하며 성문을 열라고 명령해 진주성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숭인은 김시민의 말을 듣고 자신의 군대를 성 밖에 주둔하여 성안의 군사들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지키기로 결단하였다.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주성 근처에 적당한 지역을 찾아 주둔하려고 길을 나서다 빠르게 진주성으로 진격하는 대병력의 왜군과 마주하고 말았다.  결국 유숭인은 일본군과 만나 교전 중 천여 명의 경상우도 병력과 함께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하였다.

 “유숭인이 (진주성에서) 돌아오다 적을 만나 패하여 사천 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유숭인이 진주성에 들어가면 지휘체계에 문제를 유발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영남과 호남의 보루인 진주성을 지켜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김시민은 군법에 회부될 각오를 하고 항명을 하였다. 의병장 곽재우는 김시민의 항명을 칭찬하였다.

 “곽재우가 김시민이 유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김시민은 6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 일본군의 끈질긴 공격을 봉쇄하고, 여러 적장을 죽이고 왜군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히며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진주성 대승은 행주 대첩과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불린다. 김시민의 진주성 방어로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군은 보급에 큰 타격을 입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조차 힘들어졌다.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이순신 장군처럼 마지막날 전투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아 전사했다. 조선 조정은 김시민의 충정과 공로를 기려 이순신 장군과 동일하게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진 출처)

진주성 공원에 위치한 김시민 목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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