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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May 17. 2023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은 왜 항명을 하였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타일러 왜적을 대응하는 군사를 모으는 임무를 맡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은 진주가 전략적 군사 거점임을 강조했다. 당나라 시절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순(張巡) 등이 수양성을 사수하여 반란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던 일과 같은 요충지라고 했다.

 “신이 보건대 진주는 남쪽 지방의 주요 군사 거점으로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흙더미가 무너지듯이 와해되고,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수양(睢陽) 1군(郡)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임진년 1592년 가을,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남해 해전에서 거듭 패배를 당하여 서해로 나아가는 바닷길이 막혀 해로를 이용한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함대가 버티고 있는 바닷길을 포기하고 싸움에 필요한 군량 등 전쟁 물자를 조선 현지에서 동원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의 진주성 격파는 호남침공의 길을 열어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이순신 함대의 뒷마당을 위협해 조선수군을 견제하며, 경상우도에 창궐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를 장악해 의병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계략이었다.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은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목사를 보좌하던 판관에서 목사로 승진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 판관 김시민의 전공은 장계에 의하면 매우 뛰어납니다. 급히 벼슬을 올려 격려함으로써 권장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7월 26일)

 선조는 비변사의 요청대로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 28권, 재위 25년 7월 26일)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취임하자 왜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염초 150여 근을 비축하고 총통 170여 정을 만들며 수성군을 훈련시키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생각하고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다. 풍신수길의 명을 받은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로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부산과 김해에 집결한 병력 3만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晋州)를 포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진주성으로 향하던 3만의 대병력은 진주로 가는 길목인 함안 등지에서 조선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조선군은 팔천여 전사자를 내며 일본군에 거듭 패하였다. 경상우도 최고의 군 지휘관인 병마절도사 유숭인은 본영인 창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숭인은 임진년 개전 초에 함안군수로서 관군 및 고을 백성을 규합하여 성을 지키고, 곽재우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 47급을 베어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공으로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파직당한 김성일 후임으로 경상 우병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함안 군수 유숭인은 목을 벤 왜적의 수가 47명이나 되니, 그 공을 칭찬할 만합니다. 벼슬을 올리고 품계를 올려주어 권장함을 보이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7월 25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을 대신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4월 14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유숭인은 진주성의 길목인 창원의 노현 고개에서 2천여 명의 병력으로 매복하여 왜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유숭인은 3만여 명의 왜적과 맞닥뜨려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창원성으로 퇴각하였다.

 “부산·김해 등지에 주둔한 여러 곳의 적이 연합하여 창원을 공격하니, 병사 유숭인이 두 번 싸웠으나 패하여 도망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9월 1)

 “(진주로 진격하던) 적은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여러 고을을 분탕질한 뒤 진주로 향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유숭인은 소수의 병력으로 분투했으나 창원성마저 함락당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김시민이 지키고 있는 진주성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도 진주성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진주성 공원에 위치한 김시민 목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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