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가 올라왔다. 김성일은 김수의 주장과는 달리 곽재우가 충성심에서 가산을 풀어 의병을 일으킨 정상을 낱낱이 밝히고, 이어서 아뢰었다.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 정병(精兵)을 장악하고 있으니 쉽사리 체포할 수 없고 만약 역심이 없다면 한 장의 편지로도 충분히 타이를 수 있겠기에 신이 직접 편지를 써서 경계시켰습니다. 그러자 재우가 바로 태도를 바꿔 순종하였으며, 진주가 포위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벌써 구원하러 달려갔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조정은 김성일의 장계를 보고 곽재우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김성일은 김수와 함께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으므로 김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김수를 경상감사에서 물러나게 하여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였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7일)
사관은 이때의 일을 상세히 기록하며 평하였다.
“곽재우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으니,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자이다. 왜적들이 정암진을 건너 감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곽재우의 공이다.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는 것에 분격하여, 의병을 일으킬 적에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김수의 죄를 일일이 따져 책망하고 그를 베려고 하였다. 김수가 매우 두려워하여 장계까지 올려 변명하면서 곽재우의 일을 마치 역적처럼 말하니 비변사의 여러 사람들도 재우를 의심하였다. 그러자 곽재우도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사람을 의주로 보내 상소하기로 하고 김수의 죄를 따져 책망한 말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문을 만들고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불효하며 패전으로 왜적을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또 금관자(金貫子, 높은 벼슬아치의 망건을 조이는 고리)를 잃어버리고 달아났으니 머리 없는 시체 귀신이라고 김수를 욕했다. 김성일이 힘껏 저지하지 않았다면 김수가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수가 산음현(山陰縣, 지금의 산청)에 피해 있다가 곽재우의 선봉이 바싹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갈 때에는 심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김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재우에게 겁먹은 것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비변사에서 임금에게 전황을 아뢰면서 곽재우를 포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곽재우는 일찍이 조정에서 관직 한번 받은 바 없건만, 심지어는 의병들이 벤 왜적의 머리를 모두 강 속에 던져버리고 전공을 스스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위를 보면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으니 후하게 포상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선조가 곽재우의 공을 칭찬하였다.
“듣건대 정인홍·김면·박성·곽율·조종도·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경상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8월 1일)
곽재우가 여러 번 왜적을 물리친 소식을 들은 비변사가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곽재우가 행한 일을 보면 세속을 벗어난 사람의 행위와 같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이 진군하는 길을 막고 죽인 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공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5품의 관직을 제수하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16일)
김수가 경상도 감사에서 물러나 임금을 뵈었다. 선조가 김수를 보고 말했다.
"과인이 부덕(不德)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였다."
김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신은 아뢸 말씀이 없고 오직 죽고 싶을 뿐입니다."
선조는 곽재우에 대해 물었다.
"곽재우는 지모(智謀)가 있는가?"
김수가 아뢰었다.
"신이 그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사람됨이 보통은 아닙니다. 어려서 무예를 닦고 병법서를 읽었습니다. 문자를 터득해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의병을 남보다 제일 먼저 일으켜 4월 20일 사이에 기병(起兵)하였는데 처음 기병할 때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만 신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을 사로잡으면 목을 베지 않고 심장을 구워 먹습니다. 의령과 합천이 온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입니다."
김수도 왜적과 상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곽재우를 더 이상 역적이라고 할 명분이 없었다. 곽재우는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스승인 남명처럼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지내기로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1592년 4월 22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 1일이다. 곽재우가 궐기한 6월 1일은 '의병의 날'로 지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