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후 불과 10일도 되지 않아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제자이다. 남명은 곽재우를 귀하게 여겨 외손녀의 배필로 삼았다. 남명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고 하며, 학문을 배워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제자에게 가르쳤다. 남명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왜적이 나라를 침범하여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제자들에게 병법도 익히도록 하며 왜적을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도록 가르쳤다. 경상도 의병장의 대다수가 남명의 제자였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의병장 곽재우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다.
“곽재우는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풀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사귀었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며, 무예를 익힌 자들을 찾아 권유하여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의병장 곽재우가 도성을 빠져나와 행재소에 머물고 있는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왜구가 침입하자 자신이 먼저 도망침으로써, 경상도의 성을 지키는 장수들로 하여금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김수의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면서 처벌하더라도 민심을 달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격문을 도내에 보내어 그의 죄를 나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주(道主)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아무런 일이 없는 평상시라면 진실로 도의 감사를 비난하는 것이 부당하겠으나 이처럼 위급한 때에 모두가 각자 침묵만 지킨다면, 이는 한갓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천지가 놀랄 일이었다. 일반 백성이 관(官)을 그것도 도의 우두머리를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탄핵한 일이다. 곽재우는 관찰사뿐만 아니라 적을 맞아 싸우지 않고 도망간 수령이나 장수들을 보면 바로 처형하라고 격문을 돌렸다.
“곽재우는 도망한 수령이나 변방 장수들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斬首)하라고 하였다. 심지어는 경상 감사와 경상 병마절도사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비등하여 미친 도적이라고 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창고 문을 열어 곡식을 풀고, 처자의 의복까지 모두 군복을 짓기 위해 내놓았다. 하지만 수많은 장정들을 먹일 곡식도 부족하고 이들을 무장시키기에는 무기도 태부족이었다. 의령 관아의 창고는 수령이 불을 지르고 도망가버려, 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곽재우는 인접한 관아의 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강에 버려진 세곡선의 곡식을 가져다 군량에 보태었다.
곽재우는 격문을 지어 도내에 전파시켜 경상 감사 김수의 10가지 죄를 지적한 뒤, 도내 여러 장령으로 하여금 김수의 머리를 베어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에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곽재우는 김수에게 경고하는 말로 격문을 마무리했다.
"네가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실제로는 머리가 없는 시체와 같다. 네가 조금이라도 신자(臣子)의 의리를 안다면 너의 군관으로 하여금 너의 머리를 베게 하여 천하 후세에 사죄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겠다. 너는 그것을 알라."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김수는 곽재우의 격문에 크게 노하여 휘하 수령 등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들이라고 명하고, 곽재우를 역적이라 부르며 군사를 일으킨 일이 나라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반역을 도모하는 양상이라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조정은 김수와 곽재우가 각각 다른 주장을 하는 장계를 보고 갑론을박했다. 곽재우가 일개 유생의 신분으로 관찰사를 처단하려고 격문을 돌려 성토한 일은, 아무리 국가를 위한 분노로 그랬다 하더라도 질서를 어지럽힌 백성의 행위에 해당되니 즉시 중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선조는 대신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선조가 물었다.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혹 자신의 병세(兵勢)를 믿고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도승지 유근이 아뢰었다.
“재우가 김수의 장수에게 통문(通文)을 보내어 ‘네가 김수를 죽이지 않으며 내가 군사를 일으켜 죽이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물었다.
“김수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군사를 거느린 곽재우를 꾸짖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김성일을 시켜 타이르는 것이 옳겠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김수의 형편이 위급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장계에 ‘신의 생사(生死)가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7일)
김성일은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고 군사를 모으는 일을 하던 직책인 초유사를 맡고 있었다. 조정의 지시를 받은 김성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