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과 허성 등이 적극적으로 일본에서 보고 느낀 바를 제대로 설파하지 못한 이유의 실마리를 실록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서인) 조헌(趙憲)이 화의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군사를 일으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황윤길의 말에 동조하여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민심을 의혹되고 소란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편을 지어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재위 24년 3월 1일)
일본에 건너간 통신사가 돌아오기 전에 이미 도성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일본국 사신 겐소(玄蘇) 등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고,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었다. 또한 조선인 삼백 명이 일본에 투항해 그들을 길잡이로 삼을 거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선조실록, 재위 24년 10월 24일)
관직을 내려놓고 옥천에서 제자양성과 학문에만 전념하던 조헌은 백의(白衣)로 한양까지 걸어와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자사(子思)가 ‘모든 일에 있어 미리 준비를 하면 그 일이 잘 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미리 명장(名將)을 선발해서 군사들을 뽑아 적이 올 때 반드시 점령하려고 할 지역에다 은밀히 배들을 소각시킬 도구를 준비하게 하소서.”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이 내리지 않자, 조헌은 거듭 상소를 올렸다.
“풍신수길은 자기의 임금을 주저 없이 풀을 베듯 하였는데 이웃 나라라 하여 엿보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을 살펴보아도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신이 기필코 명장(名將)을 시켜 은밀히 동남쪽을 방비하게 하라고 청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조헌이 엎드려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이 있기를 사흘을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했다. 그래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조헌은 통곡하면서 물러갔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4년 3월 1일)
통신사가 돌아와 일본의 사정을 알린 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김성일이 속한 동인 측의 판단대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김성일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조는 불안한 나머지 최소한의 전쟁 대비태세를 갖추고자 하였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군이 진격할 길목인 경상, 전라, 충청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각 도의 감사들에게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유능한 무인들을 선발하여 남쪽 방어선에 배치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김성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준비를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왜노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은 백성들에게 폐단이 심하옵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3월 3일)
“왜란을 대비하여 성의 해자를 수축하고 군사를 선발하자 영남의 사민(士民)들은 원망이 심하였다. 김성일은 본래 왜변을 염려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잘못된 계책이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4년 11월 1일)
김성일은 또한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된 인사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비변사에서 장수를 선발하는데 이순신을 우선 발탁하니 성일은 또 잘못된 정사(政事)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4년 11월 1일)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허황된 말은 권력을 잃은 서인들의 선동이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조정에서 배척당한 자들이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틈을 타 자기들의 뜻을 풀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4년 11월 1일)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성을 쌓는 일에 대해 경상도내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장계를 읽고 김성일이 백성들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경상도 사대부들을 대변하여 성곽 수축을 반대한 걸로 생각하여 그를 곧지 못하다고 하여 경상 우병사로 임명하였다. 비변사가 ‘김성일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라서 무인이 가야 할 변방 장수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은 고집을 부렸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3월 3일)
1592년 봄, 김성일의 주장이나 희망과는 달리 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두려움 속에 화가 치밀었다.
“의금부는 도사를 보내어 경상 우병사 임지로 가고 있는 김성일을 당장 잡아다 국문하라. 김성일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적이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민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친 일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3월 3일)
유성룡이 김성일을 위해 변명하여 임금이 김성일을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삼았다. 초유사는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고 군사를 모으는 일을 맡아하던 직책이었다.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로 삼았다. 유성룡이 김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임금이 노여움을 풀고 이와 같은 명을 하게 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4월 14일)
선조는 김성일이 왜란을 앞두고 유비유환(有備有患)을 주창한 일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으나 선조는 지난 일을 탄식하며 김성일을 들먹였다.
"지난날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드러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나라의 형세가 위급함을 걱정하여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대비책을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과인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비웃으며 놀렸고, 변방 방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34년 2월 1일)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해 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