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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Nov 26. 2024

<조선왕조실록>이 알려준 과천(果川) 이야기(세종시대)

 양녕대군과 과천


 내가 사는 과천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과 인연이 깊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큰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지만 폐위되었다. 대신 동생인 충녕대군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세종이다. 세종 즉위 후 신하들은 양녕대군을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사사건건 양녕을 경계하고 벌을 주자는 주장을 했다. 세종은 그런 논의를 물리치고 형님인 양녕대군에게 잘해 돈독한 우애를 유지했다. 


 양녕대군은 사냥을 좋아했다. 과천에 장인인 김한로의 농장이 있었고, 처의 할머니가 살았기에 사냥을 겸하여 자주 들렀다. 세종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양녕대군이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쌀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받으라고 경기 감사에게 지시했다.


“과천의 관아 창고에서 쌀 25석을 양녕 대군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벼로 환수하게 하라.” (세종실록, 재위 6년 8월 26일)


 임금의 형님이 자주 과천에 들르는데 고을 수령으로서 매번 못 본 척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귀한 음식과 풍악을 울리며 융숭히 대접한 것이 사헌부의 정보망에 걸려 과천현감은 탄핵을 당한고 만다. 


 사헌부 장령 이겸지가 대관(臺官)들과 함께 어전에 나와 아뢰었다. 


 "양녕 대군이 매사냥으로 인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니, 고을의 수령(守令)이 대체(大體)는 돌아보지도 않고 유밀과(油蜜果)를 성대히 준비했으며, 기생으로 하여금 풍악을 연주하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습니다. 유밀과는 이미 금지하는 법이 있는데, 법을 받들어 행하는 관리로서 국법을 감히 범하였사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은 형님 양녕대군을 대접했다는 이유로 과천현감을 벌줄 수 없었다.  


 "고을의 수령이 종친(宗親)을 보고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했으니, 무슨 죄가 되겠는가? 수령이 종친을 보고 만약 접대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죄가 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말하지 말라." (세종실록, 재위 24년 10월 15일)


 실록의 기사에 등장하는 유밀과(油蜜果)는 오늘날 약과(藥果)를 의미한다. 밀가루를 꿀과 참기름으로 반죽하여 과일모양으로 만들고 기름에 튀겨 꿀에 절여 두었다가 먹는 과자다. 고려시대부터 최고급 음식으로 원나라에까지 유명하였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 공주와 혼례를 올리는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경에 갈 때 유밀과를 가져갔다. 결혼식 피로연 잔치에 올렸더니 입속에서 슬슬 녹는다고 원의 황제와 고관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 요즘 약과가 K-디저트로 세계에서 인기가 상승 중인 게 새롭거나 우연이 아닌 일이다. 


 유밀과(油蜜果)는 조선 왕조 들어 사치품으로 지정되어 환갑, 혼인, 제사와 같은 특별한 행사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는 만들어 먹지 못하게 하였다. 사헌부는 과천현감이 이를 어겼다고 지적한 것이다.


 조선의 언관(言官)들은 임금이라도 법을 어기는 지시를 하면 물러서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아니되옵니다.” 혹은 “통촉하소서.”가 이번 사례에서도 등장한다. 


 사헌부 지평(持平) 이영견(李永肩)은 기회를 잡아 임금에게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양녕의 매사냥하는 행차에 과천의 수령이 법을 어기면서 그를 접대하였사오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서 다른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당사자는 물론, 세상 사람들도 또한 경계하는 바가 없을까 우려됩니다. 통촉하소서." (세종실록, 재위 24년 11월 6일) 


 임금은 고개를 저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기도 관찰사가 관할 수령들의 업적을 고과 평가하면서 법을 어긴 과천현감에게 좋은 등급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과천현감에게 최하점수인 하등(下等)의 업적 평가를 내렸다.  관찰사의 수령의 직무에 대한 고과성적 평가는 6월과 12월 매년 두 번 실시했다. 평가는 상등(上等), 중등(中等), 하등(下等)으로 나누어지는데, 중등을 두 번 받거나 하등을 한 번이라도  받으면 파직되었다.


 사간원 언관(言官)이 가만있지 않았다. 우정언(右正言) 이휘(李徽)가 어전에 나아가 과천현감 최영순을 파직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수령(守令)을 포폄(褒貶: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해 상과 벌을 주는 인사행정 제도)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일인데, 지금 과천(果川)의 수령은 고과가 하등(下等)을 받았는데도 교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되면 장차 수령들은 징계할 바가 없게 되고, 관찰사의 평가도 소용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수령의 임무는 가벼운 일이 아니하므로, 마땅히 감사의 평가에 따라야 될 것입니다."


 세종은 단호히 거부했다. 


 "과천 현감은 일찍이 평가에 상등(上等)을 연달아 받았던 사람이니, 이로써 본다면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있다. 지금 고과를 낮게 주어 벼슬을 잃게 만든 것은 양녕의 일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세종실록, 재위 24년 12월 8일) 


 임금이 단호하게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에도 언관들은 굽히지 않았다. 사간원이 다시 나섰다. 우헌납(右獻納) 윤사윤(尹士昀)이 사간원 간관(諫官)들과 함께 어전에 나와 아뢰었다. 


 "과천 현감은 감사(監司)의 고과평가에 하등(下等)을 받았는데도 특별히 파직하지 말기를 명하셨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포폄(褒貶)은 대사(大事)이오니, 원하옵건대, 감사의 판단에 따르소서."


 임금이 말했다. 


 "과천현감에 대한 평가가 폄직(貶職: 벼슬아치의 고과 등을 바탕으로 관직을 떨어뜨림)에 해당하는 일은 비록 어린아이라도 모두 양녕을 후대(厚待)한 까닭인 줄 알고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청이니 모두 물러가라." (세종실록, 재위 24년 12월 15일)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지평(持平) 이영견이 대관들과 함께 어전에 나아와 다시 한번 과천현감을 파직하라고 아뢰었다세종은 이번에도 거부했다

 

“과천(果川) 현감은 수령에 부임한 이후로 고과평가가 매양 상등(上等)에 있었는데 지금 하등(下等)을 받은 것은 곧 양녕의 일 때문이다. 신하가 종친(宗親)을 보고 후(厚)하게 위로하는 것은 예절이며, 또 양녕은 다른 종친(宗親)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한 그를 접대하고는 즉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으니, 어찌 죄가 있겠다고 하겠는가." (세종실록, 재위 24년 12월 17일) 


 사헌부는 임금이 계속하여 단호하게 거부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관리 인사의 책임부서인 이조(吏曹)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헌부와 이조의 관리들이 함께 어전에 나아와 수령의 고과평가에 하등(下等)을 한 번이라도 받으면 반드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임금을 압박했다. 


 "포폄(褒貶)의 법(法)은 당세(當世)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사옵니다. 이번 일로 잘못된 사람을 내쫓는 출척(黜陟)의 법(法)이 장차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지금 명하시어 파직시켰다가 후일에 다시 쓴다면, 신들은 생각하옵기를 법도 지켜지고 성상(聖上)의 은혜도 행해질 것이라 여기옵나이다." (세종실록, 재위 24년 12월 17일) 


 임금은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은 양녕대군에 아부하는 관리를 벌주자고 하는 주장을 모두 물리침으로 형님에 대한 예의와 우애를 지켰다.



 흰 노루의 출현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시절에 길조인 흰 노루가 과천에 출현한 일이 있음을 알려준다. 왕조시대 흰 노루는 왕의 덕이 높을 때 등장한다는 고귀한 짐승으로 여겼다. 흰 노루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어전에 몰려와 임금에게 하례를 올렸다.


 "흰 까치와 흰 꿩은 일찍이 보고 들은 일이 있으나, 흰 노루가 등장하는 복되고 길한 조짐은 태평성대에나 보는 것이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이 하는 좋은 말에 담담하게 말했다. 


 "과천(果川)에서 흰 노루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사복시(司僕寺)에서 가서 잡으려 하기에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복시는 말과 목장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세종은 흰 노루를 잡아서 우리에 가두고 보면서 즐기는 관상용으로 두지 말고 노루가 살던 산과 들에서 살도록 하라고 명했다. 


 "내가 본래 기이한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다. 흰 노루는 우연히 나온 것이니 잡아서 두지 말고 원래 살던 곳에서 살게 하라. 또 예조는 이런 일로 번거롭게 어전에 달려와서 하례하지 말게 하라.(세종실록, 재위 27년 8월 8일)

 

이러한 세종의 말과 태도는 당대에도 그랬겠지만 후세의 우리들에도 그가 얼마나 성군(聖君)이었는지 감탄하게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과천


 1454년 완성된 <세종실록 지리지>를 살펴보면 과천현(果川縣)은 경기도 광주목의 관할이었다.  


 “과천현은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인데, 신라가 율진군(栗津郡)으로 바꾸었고, 고려대에 과주(果州)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 과천현으로 하였다. 별호(別號)는 부림(富林)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보면 당시 과천 인구는 천명이 되지 않았고(7백43명) 호수는 2백44호의 작은 고을이었다. 손(孫)·이(李)·전(田)·변(邊)의 네 개 토성(土姓: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씨족집단의 성씨)이 주로 살았다. 


 관할에 양재(良才) 역이 있었고. 노도진(露渡津: 노돌나루)과 흑석진(黑石津: 검은돌나루)의 두 나루터가 있었다. 노돌은 노들과 노량(백로(鷺)가 노니는 징검돌(梁)이란 의미)으로 바뀌어 불렸다. 조선의 과천은 지금의 과천시 구역에 더하여 남태령 너머의 노량진과 흑석동, 양재를 포함한 꽤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사진출처: 과천시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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