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역사 강좌를 통해 연암 박지원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자 문학가가 아니라,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알았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연암은 44살에 청나라를 다녀오며 그곳의 문물과 제도를 깊이 탐구하여, 나라와 백성을 더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5개월 동안의 여정과 느낌을 메모한 글을 3년에 걸쳐 작업한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당대의 중국 사회를 깊이 연구한 결과물이고, 조선 사회에 던지는 과감한 제안이 담긴 책이다.
연암은 실용을 중시하는 학자였다. 그는 학문이란 이상적인 이론에 그쳐서는 안 되고,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암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서얼 출신의 박제가, 이덕무 등 유능한 인재를 제자로 삼았다. 연암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재능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지, 출신 배경이 아니었다.
연암은 유쾌하고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양양 부사를 마치고 집으로 왔을 때 친구가 녹봉을 얼마나 받았냐고 묻자, 그는 "1만 2천 냥을 받았다"라고 했다. 친구들이 깜짝 놀라자 연암은 웃으며 대답했다. "양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1만 냥, 녹봉은 2천 냥이니 합쳐서 1만 2천 냥 아니겠느냐"라고. 연암은 물질적 보상보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위험에 처했을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귀양을 가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서촉과 강남을 여행해 볼 절호의 기회라며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역경에서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봤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자세라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인생이 훨씬 덜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연암은 죽음조차 두려움 없이 담담히 맞이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 약을 물리치고, 친구들을 불러서 생전 장례식을 치렀다.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인생 여정을 좋은 벗들과 함께 마무리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연암은 가족을 향한 사랑도 깊었다. 안의(安義: 현재 경남 함양 지역) 현감 시절 두 아들에게 손수 담근 고추장을 보내며, “밥 먹을 때마다 같이 먹으라.”고 챙겼고, 지난번 보낸 고추장은 맛이 어땠는지 세심하게 물었다.
연암은 아내를 향한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암은 시를 지으며 그리워했다. “천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며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눈이 가물가물해지도록 바라보며 아내를 생각했다. 또한 연암은 한글을 배우지 않아 평생 아내와 한글편지를 주고받지 못한 걸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깨끗한 몸으로 아내 곁에 가고 싶다며 아들에게 목욕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연암은 형제애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형님의 얼굴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더는 볼 수 없으니, 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형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연암의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4년에 걸쳐 《과정록(過庭錄)》(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완성해 연암의 삶과 정신을 기록했다. 덕분에 우리는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손자 박규수가 연암의 사상을 이어받아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를 태동시켰으니 대단하기도 하고, 아버지로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연암 박지원의 삶을 통해 배우는 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며,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즐기는 힘,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삶을 당당하게 마주하는 자세,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더욱 알차게 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