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는 우리나라 인재의 고장이자 도학(道學)의 산실이다. 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일컫는 목은 이색이 영덕에서, 포은 정몽주가 영일에서, 야은 길재가 구미에서 태어났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림의 스승인 김종직이 밀양에서,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각각 대구와 함양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언적이 경주에서, 남명 조식이 합천에서, 6개월 뒤 퇴계 이황이 안동에서 태어났다.
안동과 산청의 선비촌을 찾았을 때 퇴계와 남명을 배향한 도산서원과 덕천서원을 방문하였다. 정여창과 조광조를 배향한 함양의 남계서원과 수원의 심곡서원도 찾아볼 기회가 있었다. 다음 방문지로 대구의 도동서원과 경주의 옥산서원을 꼽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김굉필과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는 도동서원과 옥산서원을 돌아보는 ‘과문향(果文香)’의 일정에 참가했다. 과문향은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과천 사람들의 모임이다.
도동서원은 대구 달성 산기슭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앉아있었다.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서원은 선조가 현판을 내려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높은 팔작지붕의 화려한 단청을 한 수월루(水月樓)가 먼저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를 지나면 강학공간으로 가는 좁은 계단을 올라 지붕이 낮은 환주문(喚主門)을 만난다. 환주는 주인을 부른다는 뜻이니, 이 문을 들어서기 앞서 내 마음의 주인을 불러 깨우라는 의미인 듯하다.
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어른 키 높이의 기단 위에 앉아있다. 기단 담장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을 서로 물고 물리도록 다듬어 쌓아, 마치 고운 조각보를 둘러친 듯하다. 기둥 윗부분에 흰 종이 띠가 둘러져 있다. 상지(上紙)이다. 동방 오현 중에 수현(首賢)을 모셨다는 표식이다.
김굉필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1569년 선조 2년, 좌승지 기대승이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조선 유학의 계보에 대해 아뢰며 김굉필의 위치를 알려준다. "성리학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말씀드리면, 정몽주가 동방 성리학의 시조이고, 길재가 정몽주에게서 배우고, 김숙자는 길재에게서 배웠습니다. 김종직은 김숙자에게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수받았는데 행실 또한 바르고 단정했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김종직의 제자가 김굉필이었고,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배웠습니다.”
김굉필은 19세가 되던 해에 장가를 들어 처가인 합천으로 옮겼다. 조선 시대에 장가를 든다는 것은 ‘장가(丈家), 즉 장인의 집에 들어가서 살다’라는 뜻이다. 김굉필은 합천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지어놓고 학문에 몰두했다. 한훤당에 벗 곽승화가 찾아왔다. 곽승화는 밀양의 유력한 집안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곽승화는 김종직 함양 군수가 문장과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배우러 간다는 말을 했다. 김굉필은 책을 읽으며 의문이 생길 때마다 주변에 제대로 가르치며 지도해 줄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망설임 없이 곽승화를 따라 길을 나섰다.
함양 군수 김종직은 새로 맞은 제자에게 <소학(小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김굉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학>은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책이 아닌가. 김종직은 어린 시절부터 배워 아는 것을 성인이 되어도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면 안다고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학문을 하는 목적은 성인(聖人)의 삶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인데 성현의 훌륭한 인품도 <소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김굉필은 학문의 출발점이 어린아이의 학습서인 <소학>에 있다는 스승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이후로 김굉필은 스승의 당부를 명심하고 <소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학>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니, 그 깊이의 오묘함에 무릎을 칠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성현이 바라본 우주가 있었고, 삶이 있었다. 또한 도덕이 있었고, 역사가 있었다. 김굉필은 책을 내려놓고, 감격하여 붓을 들었다. “글공부를 업으로 삼고도 하늘의 이치 몰랐는데,/ 소학의 글에서 지난 잘못 깨달았네./ 이것을 쫓아 정성껏 자식도리 다하리니,/ 구차하게 부귀영화 어찌 부러워하랴.”
김굉필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매일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김굉필에게 나랏일을 물으면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습니까.’하며 겸손하게 답했다. 김굉필은 학문의 심오한 이치를 나날이 깨달으니 글공부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보면 성인(聖人)이 될 사람의 바탕을 보는 듯하다’고 그의 사람됨과 학문하는 자세를 칭찬하였다. 김굉필은 스승이 예언한 대로 훗날 사림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김굉필은 조광조와 김안국 등 걸출한 제자를 길러내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 사숙하였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이다. 아들 김집과 함께 문묘와 종묘에 동시 배향된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수학했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서 김종직까지 올라가게 된다.
김굉필이 죽은 지 15년 후인 중종 12년 8월, 경연에서 임금이 물었다. “어제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를 보니,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文廟)에 모시자는 것이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연관 기준(奇遵)이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여 사람의 마음 또한 밝지 못하였는데 고려 말에 정몽주가 성리학을 조금 열어 놓았습니다. 김굉필이 젊어서 정몽주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종직에게서 배워 도학의 실마리를 깨치고 정도(正道)를 닦은 공은 지극히 큽니다. 그 뒤로 사림이 그를 사모하여 본받았으니 후학(後學)에게 미친 영향이 지극합니다. 그러니 문묘에 모시는 일은 단연코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조정은 김굉필이 동방 성리학의 학문을 이어받아 도학의 참뜻을 실천하고, 조광조 등 많은 제자를 길러 도학을 전파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문묘에 모셨다.
우리 일행은 서원의 뒷산을 넘어가는 중턱의 다람재에 올랐다. 산 아래 저만치 도동서원이 보였다.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오늘 사당 앞 철쭉을 즐겼지만 깊은 봄엔 화왕(花王) 모란꽃을, 여름은 배롱나무 붉은 꽃을, 가을엔 은행잎의 노란 향연을, 겨울엔 흰 눈 덮어쓴 산과 들에 모습을 드러낸 서원을 즐길 수 있을 터이다. (25년 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