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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울린 100분: 판소리 뮤지컬 <적벽> 리뷰

by 두류산

비 오는 4월의 토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국립 정동극장을 찾았다. 아들이 생일 선물로 예매해 준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소재로 한 판소리 <적벽가>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탄생한 판소리 뮤지컬이다. <적벽>은 전통 판소리에 뮤지컬의 리듬, 무용의 몸짓을 융합하여 재창조한 새로운 무대예술이다.


판소리 <적벽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도 극적 긴장감이 높고, 화려한 묘사와 유머, 병사들의 고통까지도 담은 작품이다.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이 서사적 뼈대를 유지하면서도 무대 언어와 시각적 장치를 적극 활용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였다.


가장 눈길을 끈 건 판소리와 현대무용의 결합이다. 소리꾼이 이야기를 풀어내면, 무용수의 몸짓이 그것을 형상화한다. 판소리의 ‘소리’가 관객의 감정을 흔들고, 현대무용의 ‘몸’이 그 감정을 시각화하여 극적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연은 소규모 공연장이 지닌 한계를 강점으로 바꾸는 연출로 극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가까운 무대에서 전달되는 배우들의 호흡, 소리꾼의 입모양, 무용수의 손끝 하나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소리, 빛, 몸짓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무대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적벽의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대를 압도한 장면은 출연진이 한 목소리로 터뜨리는 가슴을 울리는 소리와 격정적인 몸짓이다. 마치 수십 명의 군사가 일제히 진군하는 듯한 에너지가 무대를 꽉 채우고, 그 목소리는 객석까지 진동하였다. 칼군무로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작은 무대임에도, 배우들의 열정과 움직임이 공간을 수십 배로 확장시켰다.


인상적인 소도구는 부채였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장수들의 활과 칼을 모두 부채 하나로 표현해 냈다. 무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부채는 병사들의 칼과 방패가 되고 동남풍이 되었다가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이러한 미니멀한 무대 연출은 부채 하나로 극을 전개하는 판소리의 본질적 미덕을 계승함과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극을 완성시켰다.


소리의 구성도 인상 깊었다. 판소리의 주된 소리틀인 북과 고수의 장단 위에 대금, 아쟁, 해금 등 국악기와 드럼 등 서양 악기가 어우러졌다. 전통의 정제된 울림과 현대 악기의 파워풀한 질감이 겹쳐지며, 극의 몰입을 이끄는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배우들이 입은 의상은 전사들의 갑옷을 모티프로 하여, 현대무용의 유연한 움직임을 살릴 수 있게 만든 듯 보였다. 단단함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이 의상은, 캐릭터의 성격과 전투의 리듬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조조, 공명, 주유, 조자룡 등 굵직한 인물들을 여성 배우들이 맡아 연기하였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배우가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 자체가 그 배우의 ‘몸’과 ‘소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특정 배역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캐릭터를 넘나들었다. 조자룡과 주유였던 배우가 조조의 군사가 되기도 했다. 출연진의 최대 활용으로 예산 절감은 말할 것도 없고, 배역의 정체성보다 ‘지금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100분간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된 공연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판소리 특유의 고어와 한자어, 사투리가 많아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한글과 함께 나온 영어자막이 도움이 되었다. 판소리는 배우와 청중이 소통하는 장르인 만큼 공연 도중 관객이 “지화자!”, “좋다!”, “얼쑤!” 같은 추임새로 배우들을 신명 나게 해야 했다. 그런 장면이 없어 아쉬웠다. 나라도 하지 그랬냐고? 아내에게 옆구리를 찔릴까 봐 끝내 참았다.


정동극장에서 만난 <적벽>은 전통의 소리인 판소리가 시대의 감각과 만나 되살아나는 작품으로, 한국 공연예술의 새 지평을 여는 실험으로 보였다. 공연장에 외국인도 꽤 보였다. 이 무대에서 한국 전통예술의 세계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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