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주는 여유

2026년 4월 27일 월요일

by Mundane Affairs

지출 : 토마토 두 팩 £3.8, 아보카도 두 개들이 한 팩 £1.5, 두부 한 모 £1.43, 세미오트밀크 £1.9, 100% 피넛버터 £2.2(세일 가격), 달걀 15개 한 판 £3.5, 총 £14.33

이동 경로 : 병원(GP), 공원, 세인즈베리

날씨 : 기온 7-15도, 전체적으로 흐림. 가끔씩 맑은 하늘.



지난 10월인가, 코바늘 뜨기를 하루 종일 하다가 손목이 아파왔다. 통증을 완화하는 방법을 찾다가 펜그립(코바늘을 펜을 잡는 것)에서 나이프그립(칼을 쥐듯이 잡고 뜨는 것)이 더 낫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보고 그립 방식을 바꾸어 다시 열심히 떴는데 갑자기 손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더 이상 뜨개질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증상을 찾아보니 드퀘르벵 신드롬(손목 건초염)과 가장 유사했다. 손을 안 쓰고 무리하지 않으면 나아진다고 해서 그대로 2주 정도 더 버텼다. 그런데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증상을 얘기하니 젊고 친절한 백인 여의사는 "손목 터널 증후군일까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이게 뭐인 것 같으세요?" 라며 나에게 진단을 떠넘긴다. 나는 의사들이 환자들이 구글링을 해서(게다가 요즘은 AI까지) 자가진단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만 의사의 표정은 진심으로 알고 싶어 묻는 듯했다.


"찾아본 바로는 드퀘르벵 신드롬인 것 같아요"라고 하자 의사는 처음에 내 말을 못 알아듣다가, 내가 프랑스어인 것 같다고 하면서 드와 퀘르벵을 따로 발음했더니, "아! 드! 퀘-르방! 그거 알아요. 그거 맞는 것 같아요" 하면서 내가 보는 앞에서 컴퓨터의 스크린에 구글창을 열고 De Quervin tenosynovitis라고 쳤다. 의사는 민망했는지 며칠 전에도 이것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너무 정직하고 친절하게 생긴 의사였기 때문에. 어이없는 일은 그다음이었다. 이제 아픈 지 한 2주 남짓 되었다고 했더니 이런 경우 적어도 증상이 시작된 지 6주는 지나야 치료를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그동안에는 NHS 근골격계 서비스에 의사의 진단 및 추천 하에 본인이 신청(Self-referral) 한 뒤에 그 기관에서 연락을 취할 때까지(그러니까 적어도 4주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미안해하며 그동안 바를 이부프로펜 연고를 알려주고(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연고였다) 손목 보호대를 쓰면 좋다는 말을 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의사가 문자로 보내 준 근골격계 기관 웹사이트 링크로 들어가 내 생년월일과 몇 가지 항목을 입력하니 바로 등록이 되었다. 이틀 뒤에 그 기관에서 두툼한 편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그 기관에 등록되었다는 내용의 커버레터와 자가 물리치료 방법이 적힌 네다섯 장의 안내문이 함께 들어있었다. 손목 건초염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손목 관련 질환에 대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리치료 방법은 흑백으로 된 사진을 결들인 손 운동 방법이었는데 만든 지 족히 10년도 더 된 것 같았다. 손운동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고 심지어 악화되는 듯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일주일 정도 후에 그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아직 증상이 여전한지 묻고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놔줄 수 있는 우리 집 근처 세 군데의 전문병원 중 한 군데를 선택하라고 했다. 나머지 두 병원은 매우 큰 종합병원이었고 버스나 차를 타고 가야 했고 다른 하나는 내가 등록되어 있는 집에서 3분 거리인 GP(일반의를 의미하는 General practitioner, 혹은 일반의들이 일하는 일반 1차 병원 자체를 의미하는 General Practice의 약자)였다. 우리 집 근처 GP를 선택했지만 그건 의사가 당장 나를 봐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단 그렇게 선택을 하고 그 GP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절차의 일부에 불과했다.


2주를 더 기다리다가 미리 예정된 한국 방문 날짜가 다가와서 나는 다시 GP에 찾아갔다. 아직 수련 2년 차라고 밝힌 젊은 백인 남의사는 나에게 당장 해줄 일은 없고 그 전문의가 수요일에 오면 내 문제를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연락이 없어서 한국에 가게 되었고, 나는 그냥 한국에서 주사를 맞았다. 의료보험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엑스레이와 스테로이드 주사 두 대, 손목 보호대까지 9만 원이었다. 영국 파운드로 하면 45파운드인데, 물론 NHS 시스템은 모든 치료가 무료지만, 이런 치료를 NHS가 아닌 민간 의료 기관에서 받으려면 45파운드가 아니라 300파운드 이상은 받지 않을까 싶다.


치료비는 싸고 치료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지만, 그 병원에서 내가 받은 대우는 환자로서 받을 대우가 아닌, 폭발적으로 잘 팔리는 물건을 사러 온 사람 취급이었다. 이쪽 분야에 명의라는 소문을 듣고 온 수십 명의 환자들이(오전 진료를 등록한 환자만)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간호사가 10명씩 호명하면 진료실 문 옆벽에 줄 지워 세워 놓고 간호사가 온 이유를 묻는다. 그때부터 기분이 불편했다. 차례대로 불려 들어간 사람들은 1분도 채 안 돼 쫓기듯 진료실을 나온다. 나는 처음 온 환자였기 때문에 그보다는 오래 걸리겠지 싶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앉을자리도 없이 의사와 간호사들은 스탠딩 데스크에 서 있었고, 의사는 내게 어디가 문제냐고 한 마디 묻고 빨간 펜으로 두 군데에 거칠게 x자 표시를 하더니, 엑스레이를 찍고 오라고 한다. 엑스레이를 찍고 온 다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엑스레이는 왜 찍었는지 의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손목 건초염이네요" 하더니 아까 표시한 자리에 그냥 대뜸 바늘을 찔러 넣는다. 그 통증이 너무 심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주사를 맞기 전에 문 근처에 내려놓았던 두꺼운 외투와 가방을 들어 올릴 수도 없을 만큼 아파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데도 간호사들은 다음 환자를 호명하면서 나에게 "다음 절차는 밖에서 안내받으세요" 라며 다급한 손짓을 한다. 치료해 줘서 고마워야 하는데 하나도 고맙지 않고 화가 났다. 굉장히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주사를 맞고 난 이틀 후에 영국 의사에게서 다음 날 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주사를 맞았고 아직 한국에 있어서 갈 수 없으니 일단 경과를 지켜보겠다고 답장을 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증상은 다행히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두 달쯤 지나니 완전히 나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공원에서 큰 물조리개가 세 개나 든 수레를 잠깐 끌고 다닌 이후에 갑자기 손목의 날카로운 통증이 되돌아왔다. 며칠을 버티다가 다시 지난주 금요일에 GP에 연락했고 근골격계 전문의는 월요일에 출근하니 연락해 주겠다고 해서 오늘 아침 9시 15분에 약속이 잡혔다. 이미 내 이력을 다 알고 있어서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부분은 이런 경우 주사를 놓을 날을 다시 잡는데, 의사는 갑자기, "지금 바로 놓아줄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한국에서 맞은 주사가 너무 아팠던 기억과, 예상외의 빠른 전개에 놀라서, "지금요?"라고 물었다. 의사는 "혹시 오늘 바로 맞는 것이 불편하면 다시 약속을 잡아줄까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요, 그냥 한국에서 맞은 주사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긴장이 돼서 그래요"라고 하자 의사는 되도록 가장 가는 바늘로 놔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주사를 준비한 뒤 자리에 앉아 내 손목에 놓아야 할 자리를 뭔가로 살짝 눌러 표시한 뒤에 아주 조심스레 소독한 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 "잠깐 따끔합니다. 그런데 겉에서만 따끔하고 괜찮아져요"라고 나를 안심시키며 주사를 놓았다. 한국에서 맞은 주사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아주 잠깐 따끔하고 전혀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지도 않고 수치스럽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한국의 모든 의사가 불친절하고 영국의 모든 의사가 친절하다거나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편리하고 영국은 불편하다고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겪은 경험의 단면, 그것도 극히 그 일부에 해당하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어느 시스템에나 상대적인 장단점은 있고, 영국 내에서도 지역마다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적어도 내가 만난 영국 의사들은 환자를 대할 때 적어도 겸손하고 온화하다고 느꼈다. 이미 아파서 병원에 온 사람들을 더 긴장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심이 보인다. 환자는 그런 태도에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GP에 가면 의사들은 허리를 굽혀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했고 어떤 의사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무뚝뚝할지언정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태도의 의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또한 NHS 시스템의 만성적 재정 부족, 긴 대기 시간, 인력 부족으로 받아야 할 치료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부정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니까).


오늘 아침에도 주사를 맞은 뒤 공원에 들러 봉사자 동료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중 한 아저씨가 내가 방금 주사를 맞고 왔다고 하니까, "그래도 뭐라도 그렇게 빨리 해주니 다행이네. 난 얼마 전에 머리에 뭐가 나서 갔더니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던데"라고 말하며 웃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한국 의료 시스템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겪어본 적는 이들은 불편함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불평을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더딘 대처도, 암이나 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심각한 병이거나, 빠른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정말 신속하게 대처해 준다.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평소에도 중증도 분류(triage)를 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것도 바쁜 NHS 시스템 안에서 진짜 중환자를 먼저 치료해 주려는 배려심으로 본다면 불평할 수도 없다. 정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민간 의료 기관으로 가서 돈을 내고 치료받으면 되니까.


이제 이번 주사만 맞으면 완전히 나을 것 같다는 의사의 위로 담긴 설명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공원에 잠깐 들렀는데 날씨가 정말 따뜻했다. 오래간만에 겉옷을 벗어 들고 얇은 스웨터 차림으로 공원을 거닐다가 옆에 있는 몰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평소에 느끼고 누리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잊는다. 의사 개개인에 따른 상대적 편의성과 상대적 배려심, 영국의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궂은 날씨 뒤에 찾아오는 단명의 햇살에서 느끼는 감동과 설렘. 나는 어쩌면 그동안 편리하고 좋은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일시적이고 드문 불편에 발끈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결핍이 없는 환경은 인내라는 마음의 근육을 서서히 녹인다. 남들은 정신승리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오늘 만큼은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미화하고 변명하기도 하는, 자의타의로 키워 온 인내력과 그 결과에 감사한다. 가끔은 부족과 결핍이 야기하는 공평한 불편함에 안심한다. 그리고 부족함과 불편함 속에서도 친절과 배려라는 가치를 저버리지 않는 모든 의사들, 흐린 날씨에도 간간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에 감사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