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을 다스린 고조선의 역사
丙申元年帝命修築鹿山改官制秋九月親幸藏唐京立廟祀高登王十一月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得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垈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辰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乙卯二十年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逐諸賊南遷至俺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邠岐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辛未三十六年邊將申督因兵作亂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
癸未四十八年帝崩太子阿忽立
<해설>
병신 원년(BCE1285), 단제 명하사 녹산(鹿山)을 개축(修築)시키고 관제를 개정(三朝鮮)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시어 묘(廟)를 세우고 고등왕(高登王)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구환(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BCE1280),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大運)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데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BCE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邠)․기(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살게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BCE1250),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계미 48년(BCE1238),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개관제改官制: 삼한三韓->삼조선三朝鮮으로 변경
❖회대(淮岱): 회수(산동성)와 태산
甲申元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置六邑於殷地殷人相爭不決乃進兵攻破之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해설>
갑신 원년(BCE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分封蒲古氏於淹盈古氏於徐邦古氏於淮殷人望風煌怯莫敢近之
戊子五年召二韓及五加議停寧古塔移都事
己亥七十六年帝崩太子延那立
<해설>
을유 2년(BCE1236), 남국(藍國) 왕 금달(今達)이 청구(靑邱) 왕, 구려(句麗) 왕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여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까지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한 뒤 포고씨(蒲古氏)를 엄(淹) 땅에, 영고씨(寧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BCE1233),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BCE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庚子元年命皇叔固弗加爲攝政
辛丑二年諸汗奉詔增設蘇塗祭天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定民志于一
庚戌十一年帝崩太子率那立
<해설>
경자 원년(BCE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신축 2년(BCE1160), 여러 한(汗)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BCE1151), 단재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辛亥元年
丁亥三十七年箕徙居西華謝絶人事
丁酉四十七年帝在上蘇塗講古禮因間侫臣直臣之分三郞洪雲性進對曰執理不屈者直臣也畏威曲從者侫臣也君源臣流源旣濁矣流其求淸是爲不可故君聖然後臣直帝曰善哉
己酉五十九年田穀豊登有一莖五穗之栗
戊寅八十八年帝崩太子鄒魯立
<해설>
신해 원년(BCE1150)
정해 37년(BCE1114), 기자(箕子)가 서화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은둔 생활)하였다.
정유 47년(BCE1104), 단제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영신侫臣(侫은 佞의 속자)>과 바른 신하<직신直臣>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를 바른 신하<直臣>라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신하를 아첨하는 신하<侫臣>라 합니다. 임금이 물의 근원이라면 신하는 흘러가는 물이니 근원이 흐리면 흐름이 맑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거룩한 다음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
기유 59년(BCE1092),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BCE106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서화는 지금의 하남성개봉지역
❖기는 은나라 제후국인 송나라 기 땅에 살아 기자라 했고 이름은 "자서여"이다. 기자의 성은 자씨이다.
❖서유여는 서여(기자)가 아니다. 년도(시대)도 서로 맞지 않다.
❖주나라 건국 해는 BCE1122년
❖기자묘는 산동성 조현에 있다. 기자독서대는 하남성 서화현에 있다.
❖중국의 사기, 제왕세기에 황조헌원의 삼황오제의 족보를 알 수 있다.
己卯元年秋七月白岳山溪谷白鹿二百作隊而來遊
癸末六十五年帝崩太子豆密立
<해설>
기묘 원년(BCE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 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65년(BCE998),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甲申元年天海水溢斯阿蘭山崩是歲須密爾國養雲國句茶川國 皆遣使獻方物
辛卯八年太旱之餘大雨注下民無收穫帝命發倉周給
己酉二十六年帝崩奚牟立
<해설>
갑신 원년(BCE997),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BCE990),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BCE972), 단제 붕어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庚戌元年帝有疾使白衣童子禱天尋瘉
庚申十一年夏四月旋風大起暴雨注下陸上魚類亂墜
丁卯十八年氷海諸汗遣使入貢
丁丑二十八年帝崩摩休立
<해설>
경술 원년(BCE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경신 11년(BCE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BCE954), 빙해(氷海)의 뭇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BCE944),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戊寅元年周人入貢
乙酉八年夏地震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尺
辛亥三十四年帝崩太子奈休立
<해설>
무인 원년(BCE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BCE936)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BCE935), 남해의 조수(潮水)가 3척이나 물러났다. 육지가 넒어졌다.
신해 34년(BCE9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했다.
壬子元年
帝南巡觀靑邱之政刻石蚩尤天王功德西至奄瀆忽會分朝諸汗閱兵祭天與周人修好
丙辰五年凶奴入貢
丙戌三十五年帝崩太子登兀立
<해설>
임자원년(BCE909)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汗)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BCE905),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BCE87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登屼)이 즉위하였다.
丁亥元年
壬寅十六年鳳鳴白岳麒麟來遊上苑
辛亥二十五年帝崩子鄒密立
<해설>
정해 원년(BCE874)
임인 16년(BCE859),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BCE850),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雛密)이 즉위하였다.
壬子元年
甲寅三年鮮卑山酋長 們古入貢
癸亥十二年楚大夫李文起入朝
甲子十三年三月日蝕
丙寅十五年農作大饑
辛巳三十年帝崩太子甘勿立
<해설>
임자 원년(BCE849)
갑인 3년(BCE847),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BCE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BCE837), 3월에 일식이 있었다. (천문학을 통해 입증, 수도 지역도 확인)
병인 15년(BCE835),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30년(BCE82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했다.
❖선비족의 시작: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
壬午元年
癸未二年周人來獻虎象之皮
戊子七年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建三聖祠親祭有誓告文曰
三聖之尊與神齊功三神之德因聖益大虛粗同體個全一如智生雙修形魂俱衍眞敎乃立信久自明乘勢以尊回光反躬截彼白岳萬古一蒼列聖繼作文興禮樂規模斯大道術淵宏執一含三會三歸一大演天戒永世爲法
乙巳二十四年帝崩太子奧婁門立
<해설>
임오 원년(BCE819)
계미 2년(BCE818),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BCE813),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서고문(誓告文-축문)>이 있으니,
「삼성의 존귀함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며 삼신의 덕은 성인으로 인하여 크게 유익하나니, 빈 것과 찬 것은 한 몸이요<虛粗同體>, 낱개와 전체는 오직 하나일 뿐<個全一如>,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智生雙修>,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히나니<形魂俱衍>, 이에 따라 참다운 가르침이 서고 믿음이 오래감은 자명한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 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會三歸一>.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
을사 24년(BCE79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 즉위하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사당
❖감물산 = 구월산
丙午元年是歲五穀豊熟萬姓歡康作兜里之歌其歌曰
天有朝暾明光熙耀國有聖人德敎廣被大邑國
我倍達聖朝多多人不見苛政熙皞歌之長太平
乙卯十年兩日竝出仍黃霧四塞
戊辰二十三年帝崩太子沙伐立
<해설>
병오 원년(BCE795),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之歌)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BCE786),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BCE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했다.
己巳元年
甲戌六年是歲有蝗蟲大水
壬午十四年虎入宮殿
壬辰二十四年有大水山崩壞谷充塡
戊午五十年帝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甲戌六十六年帝遣祖乙直穿燕都與齊兵戰于臨淄之南郊告捷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賣勒立
<해설>
기사 원년(BCE772)
갑술 6년(BCE767), 이 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BCE759),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BCE748),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BCE723),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
갑술 66년(BCE707), 단제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BCE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했다.
❖웅熊은 일본어로 구마이며, 일본에 곰이 살지 않았다.
丁丑元年
甲辰二十八年有地震海溢
戊申三十二年西村民家牛生八足犢
辛亥三十五年龍馬出於天河背有星文
<해설>
정축 원년(BCE704)
갑진 28년(BCE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진 32년(BCE673),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BCE670),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甲寅三十八年遣陜野侯裵幋命往討海上十二月三道悉平
戊辰五十二年帝遣兵與須臾兵伐燕燕人告急於齊齊人大擧入孤竹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甲戌五十八年帝崩太子麻勿立
<해설>
갑인 38년(BCE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BCE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8)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BCE647),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했다.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 :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협야존(狹野尊) 일면 신무천황이라 적혀있다.
❖<마한세가 상>에는「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乙亥元年
庚午五十六年帝南巡至淇水崩太子多勿立
<해설>
을해 원년(BCE646)
경오 56년(BCE591),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辛未元年
乙卯四十五年帝崩太子豆忽立
<해설>
신미 원년(B.C.590)
을묘 45년(B.C.54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丙辰元年
辛卯三十六年帝崩太子達音立
<해설>
병진 원년(B.C.545)
신묘 36년(B.C.5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壬辰元年
己酉十八年帝崩太子音次立
<해설>
임진 원년(B.C.509)
기유 18년(B.C.4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庚戌元年
己巳二十年帝崩太子乙于支立
<해설>
경술 원년(BCE491)
기사 20년(BCE47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庚午元年
己卯十年帝崩太子勿理立
<해설>
경오 원년(BCE471)
기묘 10년(BCE4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勿里)가 즉위하였다.
庚辰元年
乙卯三十六年隆安獵戶于和沖自稱將軍聚衆數萬陷西北三十六郡帝遣兵不克冬賊圍都城急攻帝與左右宮人奉廟社主浮舟而下之海頭尋崩
是歲白民城褥薩丘勿以命起兵先據藏唐京九地師從之東西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해설>
경진 원년(BCE461)
을묘 36년(BCE426), 융안(隆安)의 사냥족<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니 동․서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서압록은 대요하
출처 및 참고
환단고기 원전강독ㅣ단군세기 강독ㅣ안병우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npX-gN5Bxk0
한류아카데미
https://m.cafe.daum.net/chunbooi/eOCI/221?listURI=%2Fchunbooi%2FeO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