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몰락沒落과 북부여 시대의 개창
기후(箕詡)
丙辰元年三月大水浸都城賊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遂斬于和沖
<해설>
병진 원년(BCE425)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렸다.
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作離宮
丁巳二年禮官請行三神迎鼓祭乃三月十六日也帝親幸敬拜初拜三叩再拜六叩三拜九叩禮也從衆特爲十叩是爲三六大禮也
壬申十七年遣監察官于州郡糾察吏民擧孝廉
戊寅二十三年燕遣使賀正
甲申二十九年帝崩太子余婁立
<해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에게서 추앙을 받는 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대영절)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의 이름은 대부여(大夫餘)라 고치고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오로지 한 분에게만 맡겨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壤)
정사 2년(BCE424), 예관(禮官)이 청하여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고 한다.
임신 17년(BCE409), 감찰관을 각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BCE403),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BCE397),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평양(平壤) : 고구려때 수도 명칭으로, 골본(忽本) 또는 아사달(阿斯達)이라고도 불렀다. 백제는 미추골(彌鄒忽),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이었고, 신라는 금성(金城) 또는 월성(月城)이었다.
❖대영절: 3월16일과 10월3일은 천제께 제사하는 대영절
乙酉元年築城長嶺狼山
辛丑十七年燕人侵邊郡守將苗長春擊敗之
<해설>
을유 원년(BCE396),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신축 17년(BCE380),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 군을 침범하니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丙辰三十二年燕人倍道入寇陷遼西逼雲障番朝鮮命上將于文言禦之 眞莫二朝鮮赤派兵來救設伏來攻破燕齊之兵於五道河遼西諸城悉復
丁巳三十三年燕人敗屯連雲島造船將來襲于文言追擊大破射殺其將
辛未四十七年北漠酋長厄尼車吉來朝獻馬二百匹請共伐燕乃以番朝鮮少將申不私率兵一萬合攻燕上谷援之置城邑
戊寅五十四年自上谷役後燕連年來侵至是遣使請和許之復以造陽以西爲界
己卯五十五年夏大旱慮有冤獄大赦親幸祈雨九月帝崩太子普乙立
<해설>
병진 32년(BCE365), 연나라가 빠르게 쳐들어와서(배도-倍道)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番)조선이 대장군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眞)조선, 막(莫)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모두 되찾았다.
정사 33년(BCE364),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BCE350), 북막(北漠-몽골지역)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BCE343),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 55년(BCE342)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배도(倍道): 빠른 속도로 란 뜻
❖운장(雲障): 번조선의 지역명
❖상곡(上谷): 지금의 북경 북쪽에 위치한 하북성 회래현
❖조양(造陽): 상곡지역내에 있었으며, 북경 북쪽 만리장성 부근, 연나라 장수 진개가 번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가 도망친후 BCE300년경 반조산의 서쪽 변두리땅 일부을 빼앗고 축조한 연나라 장성의 서쪽기점이다.
庚辰元年十二月番朝鮮王解仁爲燕所遣刺客所害五加爭立
<해설>
경진 원년(BCE341) 12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해인(解仁) : 일명 산한(山韓) 번조선 68세 왕
戊戌十九年正月邑借箕詡以兵入宮自以番朝鮮王遣人請允帝許之使堅備燕
丁巳三十八年都城大火盡燒 避御于海城離宮
癸亥四十四年北漠酋長尼舍獻樂乃受而厚賞
<해설>
무술 19년(BCE323) 정월, 읍차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니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BCE304),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BCE298), 북막의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수유사람 기후(箕詡)
❖번조선의 기자와 연관성은 없다. 기자의 성씨는 자씨이다.
乙丑四十六年韓介率須臾兵犯闕自立上將高列加起義擊破之帝還都大赦自此國勢甚微國用不敷尋帝崩無嗣高列加以檀君勿理之玄孫爲衆愛戴且有功遂卽位
<해설>
을축 46년(BCE296),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어, 고열가가 단군 물리(勿里 : 43세)의 현손으로써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읍차邑借: 국읍의 군장에대한 칭호의 하나이다. 가장 유력한 거수를 신지라하고, 제일 작은 지방의 군장을 읍차라 하였다.
丙寅元年 己卯十四年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令有司四時祭之帝歲一親祭
己酉四十四年燕遣使賀正
癸丑四十八年十月朔日蝕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請出師伐燕帝不從自是怨不朝貢
<해설>
병인 원년(BCE295)
기묘 14년(BCE282), 단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시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3월15일 어천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BCE252),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왔다.
계축 48년(BCE248).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백악산(白岳山) : 농안(農安). 장춘(長春)으로 비정
❖3월15일 어천절, 3월16일, 10월3일 대영절
壬戌五十七年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槀離國人也
癸亥五十八年 帝仁柔不斷令多不行 諸將恃勇禍亂頻起國用不敷民氣益
<해설>
임술 57년(BCE239), 4월 8일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계해 58년(BCE238),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4월 8일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우리나라 석가탄신일과 연관됨; 석가탄신일은 나라마다 다름.=> 해모수는 망해가는 고조선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의 영웅
❖웅상: 대웅전, 환웅전
❖고리국(藁離國): 이두식 표현
哀三月祭天之夕乃與五加議曰 昔我列聖肇極垂統種德宏遠永世爲法今王道哀微諸汗爭强惟朕涼德懦不能理無策招撫百姓離散惟爾五加擇賢以薦大開獄門放還死囚以下諸俘虜
<해설>
3월, 천제를 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옛 우리 선조 열성(列聖)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諸汗>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를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翌日遂棄位入山 修道登仙於是五加 共治國事六年
先是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四境之內皆爲聽命於是封諸將陞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往守上下雲障蓋北夫餘之興始此而高句麗乃解慕漱之生鄕也故亦稱高句麗也
自檀君紀元元年戊辰至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凡三千六百(九)十六年也
是歲十月三日紅杏村臾書于江都之海雲堂
<해설>
이에 오가(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今上陛下-고려공민왕)의 천조(踐祚-보위에 오른 것) 후 12년 계묘(BCE1363)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三千六百(九)十六年: (九)자가 빠진 오기인 듯
출처 및 참고
환단고기 원전강독ㅣ단군세기 강독ㅣ안병우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hikL02zCNTk&list=TLPQMDkwNzIwMjOB1_9_Uh88Pw&index=2
한류아카데미
https://m.cafe.daum.net/chunbooi/eOCI/221?listURI=%2Fchunbooi%2FeO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