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Jul 10. 2023

단군세기檀君世記 2世~21世

고려시대 독립운동하신 행촌이암 선생님

二世檀君 扶婁 在位五十八年

 

1.諸侯 虞舜(제후우순)이 정한 국경을 바로잡으심

辛丑元年帝賢而多福居財大富與民共治産業無一民飢寒每當春秋巡省國中祭天如禮察諸汗善惡克愼賞罰浚渠洫勸農桑設寮興學文化大進聲聞日彰 

신축원년제현이다복거재대부여민공치산업무일민기한매당춘추순성국중제천여예찰제한선악극신상벌준거혁권농상설요흥학문화대진성문일창 

<해설>

부루단군의 제위 원년은 신축년(BC2240)이다. 

단제께서 어질고 다복하셔서 재물을 쌓아 큰 부를 누리시니,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産業)을 다스리시어, 

한 사람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매년 봄 가을에는 나라 안을 순행하여 살피시고, 하늘에 예(禮)를 갖춰 제사를 지냈다. 여러 제후(한汗)들의 잘 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고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다. 또 요(寮)를 설치하고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흥이 되고 그 명성이 나날이 퍼져갔다. 

❖산업(産業) : 사기 권8 한고조본기에 ‘不能治産業(불능치산업), 산업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산업이라는 단어는 중국 정사에서만 1500여 차례, 경서 등을 포함하면 2500여 차례 나온다. 

따라서 산업이 근대의 용어이기 때문에 '한단고기 위서론(僞書論)'을 펴는 사람들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한(汗) : 지방지도자, 고조선 연방의 제후, ‘칸’ 

❖요(寮) : 집 료, 오늘날 ‘학교’를 의미한다. 마고(삼신)의 역사를 전수하는 부도, 성황당, 후대의 태학이나 경당이 연상된다. 

❖상桑 : 양잠을 의미한다. 우리민족은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비단(실크)를 사용하였으며, 상백지(桑白紙)를 사용하였다. 중국 일대에서 발굴되는 비단에 그려진 지도 등은 바로 고조선의 유물로 보여진다. 1973년 중국 호남성 장사에서는 비단에 그려진 지도 등 2200여년전 비단 유물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初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帝遣兵征之盡逐其君封東武道羅等以表其功 

초우순치유영이주어람국지인제견병정지진축기군봉동무도라등이표기공 

<해설>

우순(虞舜)이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인근 지역에 설치하자, 임금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고 그 우두머리(君)를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등을 그 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우순 : 우임금 

❖유주와 영주 : 하북성 일대를 말한다. 

❖람국 :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산동성을 포함하는 그 주변 일대로 보여짐  

 된 어아가 參佺戒律이 된 於阿歌 


2.배달과 단군조선 시대의 제천가

참전계율參佺戒律이 된 어하가於阿歌

神市以來每當祭天國中大會齊唱讚德諧和於阿爲樂感謝爲本神人以和四方爲式是爲參佺戒 

신시이래매당제천국중대회제창찬덕해화어아위락감사위본신인이화사방위식시위참전계 

<해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 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큰 모임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於阿)를 악(樂)으로 삼고 감사함을 근본으로 삼아 신(神)과 사람이 이로써 화합하게 되니 사방(四方)에서 법(法)으로 삼았다. 

이것이 참전계(參佺戒)이다. 

❖신시 : 18분의 한웅이 통치한 배달국을 말함이다(B.C3897~B.C2333) 

❖참전계 :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전한다. 


어아지악(於阿之樂) 其詞曰 

於阿於阿, 我等大祖神大恩德, 倍達國我等, 皆百百千千勿忘.

어아어아 아등대조신대은덕 배달국아등 개백백천천년물망 

於阿於阿, 善心大弓, 成惡心矢的, 成我等百百千千人, 皆大弓絃, 同善心, 直矢一心同.

어아어아 선심대궁 성악심시적 성아등백백천천인 개대궁현 동선심 직시일심동 

於阿於阿, 我等百百千千人, 皆大弓一衆, 多矢的貫, 破沸湯, 同善心中, 一塊雪惡心.

어아어아 아등백백천천인 개대궁일중 다시적관 파비탕 동선심중 일괴설악심 

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倍達國光榮百百千千年,大恩德,我等大祖神,我等大祖神!

어아어아 아등백백천천인 개대궁 견경동심 배달국광영백백천천년 대은덕 아등대조신 아등대조신 

<해설> 

어아 어아, 우리 하느님, 거룩한 은혜와 크나큰 덕, 배달나라, 우리 모두 천년만년 잊지마세 

어아 어아, 선한 마음 큰 활이오 악한 마음 화살 과녁이로다. 우리 겨레 모두 모두 커다란 활시위로 선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마음 한뜻이로다 

 어아 어아, 우리 겨레 모두 모두 큰 활로 하나되어 화살 과녁 많이 많이 뚫어보세 뚫어보세 끓는 물 선한 마음 한마음으로 눈 한덩이 악한 마음 녹여보세 

어아 어아, 우리 겨레 모두 모두 큰 활같은 굳센 마음 배달나라 불꽃으로 천년 만년 이어가세 

거룩한 은혜와 크나큰 덕 우리 조상님 우리 하느님!

❖大祖神: 한배검, 최고 조상 신

❖후에 광개토대왕께서는 전쟁에 나아가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함.

❖규원사화 단군기 

初夫婁踐位之際虞舜以藍國隣接之地爲營州凡數十年夫婁使諸加征其地盡逐其衆 

초부루천위지제우순이람국인접지지위영주범수십년부루사제가정기지진축기중 

是時天下諸侯來朝者數十於是作於阿之樂以諧人神於阿者喜悅之詞也 

시시천하제후래조자수십어시작어아지락이해인신어아자희열지사야 

<해설>  처음에 부루께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순(虞舜, BC2233 ~BC2183)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땅을 영주(營州)로 삼은 지가 무릇 수십 년이기에, 부루께서 뭇 가(加)로 하여금 그 땅을 정벌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쫒게 하였다. 이 때 천하의 제후 가운데 들어와 알현하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니, 이에 '어아의 악(於阿之樂)'을 지어 이로서 사람과 신이 어울려 화합하였다. '어아'라 함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규원사화 단군기 

時有神獸出於靑丘白毛九尾銜書作瑞乃賞高矢氏令國中奏樂而致歡又作朝天之舞 

시유신수출어청구백모구미함서작서내상고시씨령국중주악이치환우작조천지무 

<해설> 이 때 신령스러운 짐승이 청구(靑丘)에 나타났는데, 털은 밝고 희고 꼬리가 아홉 개가 달린 짐승(구미호, 九尾狐)이 서책을 입에 물고 상서(祥瑞)러움을 드러내는지라, 이에 고시씨에게 상을 내리고는 나라 안에 명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매우 즐기며, 또한 '조천무(朝天舞)'를 지었다. 

주) 九尾狐 : 서왕모 설화에 등장하는 사신도의 원형중 하나로 나중에 청룡으로 변화한다. 

❖서왕모(삼신, 마고), 사신도 원형, ‘구미호 → 청용’ 변화도

❖또다른 가사

어아어아 우리 대황조 놉흔 은덕. 배달국의 우리들이. 백천만년 있지마세. 

어아어아 신심은 활이되고 악심은 관사이라. 우리백천만인 활줄가티 바른선심. 활줄가티 일심이라. 

어아어아 우리백천만인. 한 활장에 무수관사 천파하니. 열탕가튼 선심중에 일점설이 악심이리. 

어아어아 우리백천만인. 활가티 굿센마음. 배달국의 광체로다. 백천만년 놉흔 은혜. 우리황조 우리대황조


3. 소련대련少連大連과 三年喪 風俗의 由來

壬寅二年帝召少連大連問治道先是少連大連善居喪三日不怠三月不懈朞年悲哀三年憂 

임인이년제소소련대련문치도선시소련대련선거상삼일부태삼월부해기년비애삼년우 

<해설> 

임인 2년(BC 2239) 임금께서는 소련(少連) 대련(大連)을 불러 치도(治道)에 관하여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렀으니,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을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소련, 대련: * ‘예기’의 ‘잡기’ 하편 

  少連大連善居喪 

  소련대련선거상 

  <해설>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었다 

❖‘예기’의 ‘잡기’ 주해 

  三日不怠 三月不懈 朞年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삼일부태 삼월부해 기년비애 삼년우 동이지자야 

<해설> 삼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을 느슨하지 않았고 한해가 지날 때 슬퍼하고 애통해 했으며, 

  삼년을 슬픔에 젖어 있었는데 동이(東夷)의 아들이다. 

❖참전계경 총론 

 (중략) “신성지역인 태백산 밑에 옛날에 넷 선인(신선)이 있었는데, 

 이는 발귀리(배달국 태호복희와 동문 수학한 사람), 자부선인(황제 헌원에게 도를 가르친 사람), 

 대련(묘전랑), 을보륵(단군조선 제 3대 가륵단군 때 선인)이다‘라고 적고 있다. 


自是擧俗停喪五月以久爲榮此非天下之大聖其能德化之流行如是傳郵之速者乎二連以孝聞亦見稱於孔子夫孝者愛人益世之本放諸四海而準焉 

자시거속정상오월이구위영차비천하지대성기능덕화지류행여시전우지속자호이연이효문역견칭어공자부효자애인익세지본방제사해이준언 

<해설> 

이 때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喪)을 당함에 다만 다섯 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3년 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를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덕으로 능히 교화하여 퍼져 나감이 이와 같은데,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효(孝)라 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근본이니, 바야흐로 온 세상에서 표준의 법도로 삼게 되는 것이다. 


4. 도량형度量衡 통일과 전정법 시행施行

癸卯三年九月下詔使民編髮盖首服靑衣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계묘삼년구월하조사민편발개수복청의두형제기실준어관포저시가무처유이민부자기원근편지 

<해설> 

묘(BC 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編髮) 머리를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斗)와 저울(衡) 등 모든 기구를 모두 관(官)에서 표준을 정해 사용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편발(編髮) :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은 머리.(당기머리, 댕기머리) 

❖두(斗).형(衡) : 쌀되와 저울, 도량 형기를 말한다.


庚戌十年四月劃邱井爲田結使民自無私利壬子十二年神誌貴己製獻七回曆邱井圖 

경술십년사월획구정위전결사민자무사리임자십이년신지귀기제헌칠회력구정도   

<해설> 

경술10년(BC 2231) 4월, 밭을 나누고(구정, 邱井)12)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한였다. 임자12년(BC 2229),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구정(邱井) :  옛날의 전리(田里)의 구획. 구(區)는 16정(井). 정은 900무(畝). 6척사방(六尺四方)을 보(步)라 하고 보백(步百)을 무라 하더니 진나라 이후 240보를 1무라 한다. 


5. 부루단지扶婁壇地 풍속의 유래와 전계佺戒의 뜻

戊戌五十八年帝崩是日日蝕山獸作隊亂叫山上萬姓慟之甚 

무술오십팔년제붕시일일식산수작대란규산상만성통지심 

<해설> 

무술58년(BC 2183) 임금께서 붕어하셨는데 이 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에 있는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산 위에서 어지럽게 울부짖었으며 백성들도 서럽게 울며 통곡을 하였다. 

❖천문학으로 일식이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위치는 하얼빈 에서 관찰 가능했다고 함.


後國人設祭家內擇地設壇而土器盛禾穀置壇上稱爲扶婁壇地是爲業神又稱佺戒以全人受戒爲業主嘉利人與業俱全之義也太子嘉勒立 

후국인설제가내택지설단이토기성화곡치단상칭위부루단지시위업신우칭전계이전인수계위업주가리인여업구전지의야태자가륵입 

<해설> 

훗날 백성들은 제(祭)를 지낼 때에 집안의 땅을 골라 단(壇)을 설치하고 토기(土器)에 벼와 곡식을 채우고 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扶婁壇地)라고 부르고 업신(業身)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전계(佺戒) : 전인수계(全人受戒) 

❖부루단지(扶婁壇地), 업주가리(業主嘉利)의 의미 - 출처 : 한암당 이유립 해설 

업(業)은 벼와 곡식이 풍성하게 익기를 기원(祈願)하고 축원(祝願)하는 대상이다. 또한 생산(生産)과 작업(作業)의 신이다.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도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군(檀君)부루(扶婁) 무술(戊戌) 58년(BC 2183)에 임금께서 돌아가시니 나라 사람들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 후에 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모실 때 집안에 정한 땅을 가리어 단(壇)을 쌓고 흙으로 된 그릇에 화곡(禾穀)을 담아 단 위에 두었는데 이를 부루단지(扶婁壇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업신(業神)이 되었으며 또한 전계(佺戒)라 하였다. 전인수계(全人受戒)로 업주가리(業主嘉利)를 삼으니 사람이 업과 더불어 모두 갖춘다는 뜻이다. 또한 항간의 민가에서는 흰 항아리에 쌀을 채워 넣고 거처하는 방안에 안치를 하고 이를 삼신단지라고 하였으며 혹은 삼신항아리라고 불리던 것이 있었다. 매년 가을에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면 햅쌀로 다시 채워 넣고 그 보관하였던 묵은 쌀로 백설병(白屑餠)을 쪄서 만들고 또한 평소에 먹던 밥으로 현주(玄酒)를 빚어 삼신께 공양을 하였다. 음식은 오직 집안사람들만이 먹고 외부의 사람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은 대개 삼신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년 3월16일을 태백(太白)이라 부르고 5월 5일은 수릿날(戌衣. 或首里=卽上日)이라 하고, 

10월3일은 한맹<(寒盟, 영고(迎鼓). 무천(舞天) 즉 동맹(東盟)>이라 하여, 각 집안에서 신을 부르고 사람을 모셔 삼신을 안좌(安坐)시키고, 타령(打令, 妥靈), 주원(呪願. 포념布念. 가조歌調)을 하였는데, 이와 같은 풍속은 신시(神市) 이래로 전해진 것이다. 삼신(三神)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한 신(神)이며 생산(生産)과 작업(作業)의 신(神)을 말한다. 

❖홍범구주(洪範九疇): 국가 통치 헌법 전문인 홍범구주의 첫 번째는 오행(五行), 두 번째는 오사(五事), 세 번째는 팔정(八政), 네 번째는 오기(五紀), 다섯 번째는 황극(皇極), 여섯 번째는 삼덕(三德), 일곱 번째는 계의(稽疑), 여덟 번째는 서징(庶徵), 아홉 번째는 오복(五福) 육극(六極)입니다.

❖오훈(五訓): 1.誠信不僞: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2.敬勤不怠: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3.孝順不違: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4.兼義不淫:청렴함과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5.謙和不鬪: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태백일사 환국본기

❖오사(五事)란 우가(牛加)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혹은 계가(鷄加)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 -태백일사 환국본기

❖다섯 가르침<五敎>: 모든 가르침을 뜻한다. 다산정약용 선생에 따르면 오교는 "부․모․형․제․자"에 대한 가르침이자 관계의 기본이다. 즉 “아버지[父]는 의(義)롭고 어머니[母]는 자애[慈]로우며, 형(兄)은 우애[友]하고 동생[弟]은 공손[恭]하며 자식은 효도[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효(孝)라고 했다. 



三世檀君嘉勒 在位四十五年(삼세 단군가륵 재위45년)


1.신과 왕과 종과 전의 도에 대한 도언

  己亥元年五月帝召三郞乙普勒問神王倧佺之道普勒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而進言曰

  神者能引出萬物各全其性神之所妙民皆依恃也

  王者能德義理世各安其命王之所宣民皆承服也

  倧者國之所選也佺者民之所擧也皆七日爲回就三神執盟三忽爲佺九桓爲倧

  盖其道也欲爲父者斯父矣欲爲君者斯君矣欲爲師者斯師矣爲子爲臣爲徒者亦斯子斯臣斯徒矣 

<해설>

기해 원년(B.C.2182) 5월, 단제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神王倧佺之道)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神)은 능히 만물을 이끌어 내어 각기 그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이는 신의 오묘한 바이라 백성들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왕(王)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서 세상을 다스리며 각기 그 삶을 편안하게 하니, 이는 왕이 베푸는 바이라 백성들 모두가 받들고 따르는 것입니다. 종(倧)이란 나라가 가려 선택하는 것이요, 전(佺)이란 백성들이 받들어 행하는 바로, 모두가 7일을 일회로 하여 삼신(三神)에 나아가 맹세하고 세 고을을 전(佺)으로 구한(九桓)을 종(倧)으로 삼습니다. 그 도(道)란 것은 아비 되는 자 아비다워야 하고, 임금 되는 자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 되는 자 스승다워야 함이니, 아들과 신하와 제자 또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 함을 말합니다."

❖삼랑三郞은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으로 일본의 사무라이(侍)도 여기서 유래함.

❖삼육대례: 삼육구배라고도 한다. 삼신상제님게 천제를 올리때와 천자를 알현할때 올리던 우리 고유의 절법



2.신교의 뜻

故神市開天之道亦以神施敎知我求獨空我存物能爲福於人世而已

代天神而王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代萬王而主人間去病解怨無一物害命使國中之人知改妄卽眞而

三七計日會全人執戒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宇宙精氣粹鍾日域三光五精凝結腦海玄妙自得光明共濟是爲居發桓也施之九桓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

<해설>

고로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도(道)란 또한 신의 가르침으로 나를 알아 홀로섬을 구하고 나를 비워 세상이 있게 함이니 능히 인간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천신(天神)을 대신하여 천하의 왕이 됨은 도를 넓혀 무리를 유익하게 하고<弘道益衆>, 한사람도 그 성품을 잃지 않게 함이며, 뭇 왕(萬王)을 대신하여 사람을 주관함은 병을 없애고 원통함을 해소하여 어느 것 하나도 그 목숨을 다치지 않게 하려함이니,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으로 나아감<改妄卽眞>을 알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삼칠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戒)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朝廷)엔 종훈(倧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佺戒)가 있었다.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라. 이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며 구한(九桓)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같이 되었다.



3.한글의 시원과 고조선 원형 문자

庚子二年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曰 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해설>

경자 2년(BCE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 안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정도 규모의 나라안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BCE2180),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4.흉노匈奴族의 시조와 우수국牛首國의 기원

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丙午八年康居叛帝討之於支伯特夏四月帝登不咸之山望民家炊煙少起命減租稅有差

戊申十年豆只州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今轉音爲牛首國也其後孫有陜野奴者逃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

癸未四十五年九月帝崩太子烏斯丘立

<해설>

갑진 6년(BCE2177),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그를 용서하시고 그 땅을 다스리도록 봉하니 그가 흉노(匈奴)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BCE2175),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BCE2173),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素尸毛犁-소머리)라고 했는데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그 후손 가운데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일본(큐슈, 시코쿠, 혼슈))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BCE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했다.

❖육살薩索이 고조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노匈奴族은 원래 훈족으로 훈 발음이 환에서 온 것으로 짐작: 선비, 돌궐, 몽골의 뿌리 

❖36세단군 때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삼도(三島-일본(큐슈, 시코쿠, 혼슈))를 평정하였다. 일본서기에 신무왕이 사노노미코토이다.-마한세가 하

이로서 알수 있는 사실, 1)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닌 진짜 우리 역사서다.  2)일본은 고조선때부터 우리가 다스리던 땅이다. 3)일본서기보다 더 정확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수국(牛首國): 춘천이 아닐까 추정, 중도유적이가 이곳일 가능성 있음



四世 檀君 烏斯丘 在位三十八年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몽고왕 임명과 인삼의 유래

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冬十月北巡而回到太白山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自後神仙不死之說 與採蔘保精密有關聯間有採得家所傳神異顯靈頗多奇驗云

<해설>

갑신 원년(BCE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理汗)으로 봉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이를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후 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화폐貨幣 주조鑄造와 하夏 정벌

戊子五年鑄圓孔貝錢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十月朝野別記書于石以公于民

庚寅七年設造船于薩水之上

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天下聞之乃服

辛酉三十八年六月帝崩羊加丘乙立

<해설>

무자 5년(BCE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圓孔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BCE2131),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BCE2119), 하(夏)나라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진(眞)․변(弁)의 3부(部)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BCE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壬戌元年命築壇于太白山遣使致祭

癸亥二年五月蝗虫大作遍滿田野帝親巡田野呑蝗而告三神使滅之數日盡滅

乙丑四年始用甲子作曆

己巳八年身毒人流漂到東海濱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七月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得疾尋崩葬于大博山牛加達門被選於衆入承大統

<해설>

임술 원년(BCE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壇)을 쌓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계해 2년(BCE2098) 5월, 황충(蝗虫) 단제께선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BCE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기사 8년(BCE2092), 인도 사람<身毒人>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정축 16년(BCE2084),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셔서 삼신(三神)의 단(壇)을 축(封築)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山-평양근처-단군릉)에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六世 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1.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 서효사(誓效詞)

戊寅元年

壬子三十五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使神誌發理作誓效訶其訶曰

朝光先受地 三神赫世臨 桓因出象先 樹德宏且深 諸神議遣雄 承詔始開天

蚩尤起靑邱 萬古振武聲 淮岱皆歸王 天下莫能侵 王儉受大命 懽聲動九桓

魚水民其蘇 草風德化新 怨者先解怨 病者先去病 一心存仁孝 四海盡光明

眞韓鎭國中 治道咸維新 慕韓保其左 番韓控其南 巉岩圍四壁

聖主幸新京 如秤錘極器 極器白牙岡 秤榦蘇密郞 錘者安德鄕 首尾均平位

賴德護神精 興邦保太平 朝降七十國 永保三韓義 王業有興隆 興廢莫爲說 誠在事天神

<해설>

무인 원년(BCE2083)

임자 35년(BCE2049),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九月山)에 제사케 하고 신지(神誌)인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사(詞)에 가로되, 


아침햇빛 먼저 받는 이땅에 삼신께서 밝게 세상에 임하셨고 

환인천제 먼저 법을 내셔서 덕을 심음에 크고도 깊사옵니다. 

모든 신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셔서 환인천제 조칙받들어 처음으로 나라여셨사옵니다.


치우천황 청구(靑邱)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누구도 침범할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왕검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쁨의 소리 구환에 울려 퍼졌사옵니다.


물고기 물 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풀잎에 부는 바람처럼 덕화가 새로워졌사옵니다. 

원한 맺힌 자 원한 먼저 풀어주고 병든 자 먼저 낫게 하셨사옵니다. 

일심으로 인과 효를 행하시니 사해에 광명이 넘치옵니다.


진한이 나라 안을 진정시키니 정치의 도는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모한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은 남쪽을 제압하옵니다. 

깎아지른 바위가 사방 벽으로 둘러쌌는데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 서울에 행차하셨사옵니다.


삼한형세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 같으니 저울판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니 그 덕에 힘입어 삼신정기 보호하옵니다.


나라를 흥성케하여 태평세월 보전하니 일흔 나라 조공하며 복종하였습니다. 

길이 삼한관경제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옵니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천신(삼신상제)님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겠사옵니다.


고 하였다.  

❖서효사誓效詞는 맹세로서 본받을 글이란 뜻인데, 6세 단군 달문達門 때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낼때 지어 올린글로 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중국의 도학자들이나 공부 좀 한 사람들이 가져다가 여러 가지 비결로 만들어 유포했습니다. 서효사는 삼왕조三王朝로 전개된 단군조선을 찬양한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입니다.(동방 문명의 개창 정신을 찬양함)


2.동방의 모든 왕을 소집하여 환국 오훈과 신시 오사를 전수하심

乃與諸汗立約束曰凡我同約之人以桓國五訓神市五事爲永久遵守之案祭天之儀以人爲本爲邦之道以食爲先農者萬事之本祭者五敎之源宜與國人共治爲産先講重族次宥俘囚竝除死刑責禍保境和白爲公專以一施共和之心謙卑自養以爲仁政之始也

 時執盟貢幣者大國二小國二十墟落三千六百二十四

癸丑三十六年帝崩羊加翰栗立

<해설>

마침내 뭇 한(汗)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와 함께 이를 약속한 사람들은 환국의 오훈(五訓)과 신시의 오사(五事)를 영원히 준수하기로 한다.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림에는 식생활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요 제사는 모든 가르침<五敎>의 근원이라. 마땅히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다스려 다스림을 자산으로 하고 겨레가 소중함을 우선으로 가르친다. 포로와 죄수를 풀어주고 아울러 사형제도를 없애고 책화(責禍)로 경계를 지키고 화백(和白)을 으뜸으로 한다. 오로지 이처럼 하나같이 베풀고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갖고서 겸허하게 낮추며 스스로 수양한다면 어진 정치가 비롯되리라.」라고 하셨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 곳이었다.  

계축 36년(BCE2048),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인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다섯 가르침<五敎>: 모든 가르침을 뜻한다. 다산정약용 선생에 따르면 오교는 "부․모․형․제․자"에 대한 가르침이자 관계의 기본이다. 즉 “아버지[父]는 의(義)롭고 어머니[母]는 자애[慈]로우며, 형(兄)은 우애[友]하고 동생[弟]은 공손[恭]하며 자식은 효도[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효(孝)라고 했다. 


七世 檀君 翰栗  在位五十四年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甲寅元年

丁未五十四年帝崩于西翰立

<해설>

갑인 원년(BCE2047)

정미 54년(BCE1994),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서한(于西翰)이 즉위했다.


八世 檀君 于西翰(或曰烏斯含)  在位八年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戊申元年定二十稅一之法廣通有無以補不足

 己酉二年是歲豊登有一莖八穗

辛亥四年帝以微服潛出國境視察夏情而還大改官制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

<해설>

무신 원년(BCE1993), 이십 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기유 2년(BCE1992),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BCE1990), 단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갑인 7년(BCE1987),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47)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九世 檀君 阿述 在位三十五年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丙辰元年帝有仁德民有犯禁者必曰糞地雖汚降雨露有時置而不論犯禁者乃化其德淳厖之化大行是日兩日竝出觀者如堵

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命遣于支于栗等討誅之後三年還都

庚寅三十五年帝崩牛加魯乙立

<해설>

병진 원년(BCE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지은 자를 그냥 놔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지었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BCE1984), 청해(靑海)의 욕살 우착(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서는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에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 버리도록 하시고는 삼 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BCE195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牛加)인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十世 檀君 魯乙 在位五十九年(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辛卯元年始作大囿養畜外之獸

任辰二年親臨墟落存問駕停野外賢者多歸之

乙未五年宮門外設伸寃木以聽民情中外大悅

丙午十六年東門外十里陸地生蓮不咸臥石自起天河神龜負圖而現圖如柶板渤海沿岸金塊露出數量十有三石

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己丑五十九年帝崩太子道奚立

<해설>

신묘 원년(BCE1950),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BCE1949),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BCE1946), 궁문 밖에 신원목(伸冤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기뻐했다. 병오 16년(BCE1935), 동문 밖 십 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神龜)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BCE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기축 59년(BCE18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十一世 檀君 道奚 在位五十七年(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1.국선소도國仙蘇塗 설치와 웅상의 유래

庚寅元年帝命五加擇十二名山之最勝處設國仙蘇塗多環稙檀樹擇最大樹封爲桓雄像而祭之名雄常

國子師傳有爲子獻策曰惟我神市實自桓雄開天納衆以佺設戒而化之天經神誥詔述於上衣冠帶劒樂效於下民無犯而同治野無盜而自安擧世之人無疾而自壽無歉而自裕登山而歌迎月而舞無遠不至無處不興德敎加於萬民頌聲溢於四海有是請

<해설>

경인 원년(BCE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였고, 그 둘레에 단수檀樹(박달나무)를 심었다. 그중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 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했다. 

배달의 교화 정신 - 전佺의 도道

이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開天)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佺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설명하실 때는 의관대검(衣冠帶劒)을 잘 갖추어 듣는 이에게 본받기를 좋게 할것이며,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고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이르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청請하옵니다.」라고 하였다.


2.대시전大始殿의 위용威容

冬十月命建大始殿極壯麗奉天帝桓雄遺象而安之頭上光彩閃閃如大日有圓光照耀宇宙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如一眞神有圓心持天符印標揭大圓一之圖於樓殿立號居發桓三日而戒七日而講風動四海

<해설>

겨울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한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컬어 거발한(居發桓)이라한다. 3일동안 계(목욕제계-깨끝이)하시고 이레(7일)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위세)이 사해를 움직이듯 했다. 


3.천지인의 창조정신과 목적(念標之文=염표문念標文=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

其念標之文曰

天以玄黙爲大其道也普圓其事也眞一

地以蓄藏爲大其道也效圓其事也勤一

人以知能爲大其道也擇圓其事也協一

故一神降衷性通光明在世理化弘益人間

仍刻之于石

丁巳二十八年設所而聚方物以閱珍奇天下之民爭獻陳設如山

丁卯三十八年徵民丁皆爲兵送選士二十人于夏都始傳國訓以示威聲

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于世三月祭三神于山南 供酒備膳致詞而醮之是夜特賜宣醞與國人環飮觀百戱罷仍登樓殿論經演誥顧謂五加曰自今以後禁殺放生釋獄飯丐竝除死刑內外聞之大悅

丙戊五十七年帝崩萬姓慟之如考妣喪三年憂四海停聲樂牛加阿漢立

<해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普-넓을보)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眞一)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效-본받을 효)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勤一 )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擇-가릴택)이니 

  모든 일은 다만 협력(協一)(다른해석 조화를 이룸)으로 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내려와<一神降衷>,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性通光明>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在世理化>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弘益人間)」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정사 28년(BCE1864),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BCE1854),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夏)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BCE1846),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해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論經演誥> 오가(五加)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여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BCE1835),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 년 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 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牛加) 아한(阿漢)이 즉위했다.


十二世 檀君 阿漢 在位五十二年(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

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乙卯二十九年命菁莪褥薩丕信西沃沮褥薩高士琛貊城褥薩突盖封爲列汗

戊寅五十二年帝崩牛加屹達立

<해설>

정해 원년(BCE1834),

무자 2년(BCE1833),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E1806), 청아(靑莪)의 욕살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BCE1738),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북부여기상에 여홍성(張良-장량-한나라에 공을 세우지만 설립 후 장가게로 도망감))관련 내용이 나옴.


十三世 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


己卯元年

甲午十六年定州縣立分職之制官無兼權政無越則民無離鄕自安所事  絃歌溢域

<해설>

기묘 원년(BCE1782).

갑오 16년(BCE1767),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하夏 멸망과 은殷 건국 비사

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子郞 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戊辰五十年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己卯六十一年帝崩萬姓絶食而哭不絶仍命釋囚俘禁殺放生過歲而葬之牛加古弗立

<해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제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기(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관제(官制)>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BCE1763),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년(BCE1733), 오성이 모여들고<五星聚婁>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BCE1722),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백성들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 후 우가인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하나라 이후 상나라가 은허로 옯기고 은나라라고 함

❖천지화랑(天指花郞)에서 花郞이란 말이 시작됨.

오성취루 五星聚婁는 현대 천문학으로 날짜가 일치하는것으로 밝혀짐 -김윤명 교수님 연구논문


十四世 檀君 古弗  在位六十年(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庚辰元年

乙酉六年是歲大旱帝親禱天祈雨誓告于天曰天雖大無民何施雨雖膏無穀何貴民所天者穀天所心者人也天人一體天何棄民乃雨滋穀濟化以時言訖大雨立降數千里

辛酉四十二年九月枯木生芽五色大鷄生於城東子村家見者誤指爲鳳

乙亥五十六年遣官四方査計戶口總一億八千萬口

己卯六十年帝崩代音立

<해설>

경진 원년(BCE1721).

을유 6년(BCE1716),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크다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비가 수 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BCE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BCE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8천만구였다. 기묘 60년(BCE1662),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十五世 檀君 代音54(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51년)


庚辰元年殷主小甲遣使求和是歲改八十稅一之制

辛巳二年洪水大漲民家多被害帝甚憐恤移其栗於蒼海蛇水之地均給于民冬十月養雲須密爾二國人來獻方物

己丑十年帝西幸弱水命臣智禹栗採金鐵及膏油秋七月虞婁人二十家 來投命定着于鹽水近地

丁未二十八年帝登太白山立碑刻列聖群汗之功

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

庚午五十一年帝崩牛加尉那立

<해설>

경진 원년(BCE1661),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BCE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BCE1652),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弱水)로 가시더니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하여 금철(金鐵) 및 고유(膏油-기름)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虞婁國)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BCE1634),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BCE1622), 단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봉했다.  

경오 51년(BCE1611),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우가(牛加)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창해사수(蒼海蛇水): 발해연안을 말한다.

❖흉노족 제천금인: 붐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제사지냄


十六世 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16세 단군 위나 재위58년)


辛未元年

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亨之五日大宴興衆明燈守夜唱經踏庭一邊列炬一邊瓊舞濟唱愛桓歌愛桓卽古神歌之類也先人指桓花而不名直曰花愛桓之歌

有云山有花山有花去年種萬樹今年種萬樹春來不咸花萬紅有事天神樂太平

戊辰五十八年帝崩太子余乙立

<해설>

신미 원년(BCE1610)

  무술 28년(BCE1583), 구환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三神)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환(愛桓)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환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환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진 58년(BCE155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十七世 檀君 余乙 在位六十八年(17세 단군 여을 재위68년)


  己巳元年

庚申五十二年帝與五加歷巡國中至蓋斯城之境有靑袍老人獻賀曰長生仙人之國樂爲仙人之氓帝德無愆王道無偏民兮隣兮不見愁苦責禍以信管境以恩城兮國兮不見戰伐

帝曰嘉納嘉納朕之修德日淺恐無以報民之與望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冬奄立

<해설>

기사 원년(BCE1552)

갑신 52년(BCE1501),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蓋斯城)의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이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고통․책화(責禍)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램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BCE148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十八世 檀君 冬奄 在位四十九年(18세 단군 동엄 재위49년)


丁丑元年

丙申二十年支伯特人來獻方物

乙丑四十九年帝崩太子緱牟蘇立

<해설>

정축 원년(BCE1484)

병신 20년(BCE1465),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BCE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緱牟蘇)가 즉위하였다.


十九世 檀君 緱牟蘇 在位五十五年(19세 단군 구모소 재위55년)


丙寅元年

己丑二十四年南裳人入朝

己未五十四年支離叔作周天曆八卦相重論

庚申五十五年帝崩牛加固忽立

<해설>

병인 원년(BCE1435)

기축 24년(BCE1412), 남상인(南裳人)56)

기미 54년(BCE1382),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경신 55년(BCE138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주천력(周天曆): 달력을 만들었다.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 8괘는 태호복희씨가 만들었는데, 63괘는 지리숙(支離叔)이 만들어 64*6=364효를 만듬.

팔괘
대성괘, 화천대우괘, 천화동인괘

二十世 檀君 固忽 在位四十三年(20세 단군 고홀 재위43년)


辛酉元年

辛未十一年秋白日貫虹

丙申三十六年修築寧古塔作離宮

庚子四十年共工工忽製獻九桓地圖

癸卯四十三年四海未寧而帝崩太子蘇台立

<해설>

신유 원년(BCE1380)

신미 11년(BCE1370) 가을, 하얀 태양이 붉은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BCE1345),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BCE1341), 공공(共工)인 공홀(工忽)이 구환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BCE1338),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영고탑(寧古塔)은 현재의 흑룡강성 영안시


二十一世 檀君 蘇台 在位五十二年(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甲辰元年殷主小乙遣使入貢

庚寅四十七年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支等國爲我大敗請和入貢

壬辰四十九年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於是高登手握重兵經略西北地勢甚强盛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해설>

갑진 원년(BCE1337), 은나라 왕 소을(小乙)(21대 왕, BCE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BCE1291),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크게 패하여 화친을 청하며 공물을 보내왔다.

임진 49년(BCE1289),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았으나 거듭하여 이를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豆幕婁)라 불렀다.



고등의 손자 색불루의 혁명

乙未五十二年右賢王高登薨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

<해설>

을미 52년(BCE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하늘에 제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五加)를 불러 제위를 물려주는데 대해 의논하셨는데 이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徐于餘)백 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攝主)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右賢王)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은주교체기,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

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帝綜不聽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

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已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

帝隱於阿斯達以終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해설>

이에 우현왕(右賢王)은 주변 좌우 신하와 사냥족<獵戶>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할 수 없이 옥책(玉冊),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거하시다가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이(伯夷-형)와 숙제(叔齊-아우)도 역시 고죽군(孤竹君-고죽국의 왕)이 왕자 숙제에게 왕위를 준다고 하고 죽었는데, 자,  죽제가 왕위는 백이형님이 하셔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백이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한다. 하며 서로 양보하여 도망을 가서 동해 바다가에 살다가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 결국 다른 왕자가 왕위를 이었다. 

❖서우여(徐于餘) :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의 칭호이다. 기자(箕子)와 마찬가지로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서우여(徐于餘)의 원래 글자는 "선우여(單于黎)"로서 "선우(單于)"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餘)"는 부여를 뜻하므로, 선우여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는 후에 선우여(單于餘) 발음이 변한 것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우현왕(右賢王) : 색불루를 말한다. 

❖고죽군(孤竹君) : 은나라의 제후국. 고죽국은 지금의 영평부에 있었다.

부여신궁(夫餘新宮): 백악산 아사달 녹산

❖주나라 건국 해는 BCE1122년



출처 및 참고


환단고기 원전강독ㅣ단군세기 강독ㅣ안병우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eFYFFn0ruwI

한류아카데미

https://m.cafe.daum.net/chunbooi/eOCI/221?listURI=%2Fchunbooi%2FeOCI

작가의 이전글 단군세기檀君世紀 국조 단군왕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