仲國(지나)과 일본의 비열한 역사왜곡은 우리의 잘못도 있습니다.
서론-빛나는 우리역사 바로알기
위대한 우리 조상님들과 그 피와 혈통을 이은 이로써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주변국과 강대국에 힘에 우리나라의 흥기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면 갈길을 잃은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적으며 여러 자료를 참고하느라 다소 정리되지 않은 부분은 있으나 최대한 바르게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Nature 지에 요하문명과 홍산문명은 "우리 대한민국의 고대 역사다"라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역사학자는 아니라고 하다가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사대주의 끝판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석열과 같은자를 몰아내야 합니다. 중국에,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사대하는 자들이 있나 봅니다. 관련하여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 바랍니다. 확인 후 수정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환웅천황의 동방 문명개창: 이유립선생왈-신시개천경
震域留記神市紀云桓雄天皇見人居已完萬物各得其所乃使高矢禮專掌養之務 是爲主穀而時稼穡之道不備又無火種爲憂 一日偶入深山只看喬木荒落但遺骨骸老幹枯枝交織亂叉立住多時沈吟無語忽然大風吹林萬竅怒號老幹相逼擦起火光閃閃삭삭乍起旋消乃猛然惺悟曰是哉是哉是乃取火之法也歸取老槐枝擦而爲火功猶不完 明日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虎 咆哮躍來 高矢氏 大叱一聲 飛石猛打誤中岩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亦漸進矣
<해설>
《진역유기(震域留記)》(규원사화-태시기)의 신시기(神市紀)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가짐을 보시더니 곧 고시례(高矢禮-야외에서 음식 먹기 전, 일부음식을 자연에 주는 행위)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 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桓雄天皇又復命神誌赫德作書契蓋神誌氏世掌主命之職專掌出納獻替之務而只憑喉舌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出衆狩獵忽見驚起一隻牝鹿彎弓欲射旋失其踪乃四處搜探遍過山野至平沙處始見足印亂鎖向方自明乃俯首沈吟旋復猛惺曰記存之法惟如斯而已夫惟如斯而已夫
是日罷獵而歸反復審思廣察萬象不多日悟得創成文字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而太古文字沒泯不存抑亦其組成也猶有不便而然歟
亦嘗聞南海島郎河里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夫烏蘇里以外岩石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非神誌氏之所作古字歟
於是而更恨吾國之未振吾族之不强也
<해설>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록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出納獻替)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흐트러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였다.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녹도문)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듣기로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理)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而人民猶在洞窟土穴之中下濕外風之氣逼人成疾且禽獸蟲魚之屬一經窘逐漸自退避藏匿不便於屠殺供饋
於是使雨師王錦營造人居主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利用使雲師陸若飛定男女婚娶之法焉而治尤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
<해설>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입법관-풍속을 다룸)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 짐승 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雨師 : 행정관) 왕금영(王錦營)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소․말․개․독수리․돼지․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雲師 : 사법관)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치우천황이 아님)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自此治尤高矢神誌之苗裔繁衍最盛及至治尤天王登極造九冶以採銅鐵鍊鐵以作 刀戟大弩而狩獵征戰賴以爲神遠外諸族甚畏大弓之威聞風膽寒者久矣
故彼謂我族爲夷說文所謂夷從大從弓爲東方人者是也乃至孔丘氏春秋之作而夷之名遂與戎狄竝爲腥之稱惜哉
<해설>
이들 중 치우(治尤), 고시, 신지의 후손들<苗裔>이 가장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九冶)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刀戟)․대궁(大弓)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의 여러 족속들은 대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夷)는 큰 것(大)으로부터, 활(弓)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춘추(春秋)》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戎狄)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
*공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 동이족 출신인데,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자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고, 공자의 어머니는 당시 16세였는데 야합(들판에서 정사)을 통하여 공자를 임신하게 되었음)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되었으나 공자는 동이족으로 자신의 민족을 오랑캐로 취급하는 배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공자의 모든 사상은 신시배달국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三聖密記曰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爲邦乃以三神設敎以聚衆作誓密有剪除之志
《삼성 밀기》에서 말한다.
「환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 환웅께서는 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밀하게 전제(剪除)의 뜻을 가졌다.
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然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
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氓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
<해설>
그때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츰 달라져서 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를 숭배하는 족속이라 하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을 숭배하는 족속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족은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았고 곰족은 어리석어(우둔함)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거부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 번도 뜻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녀의 여왕(熊女之君)은 한웅에게 신덕(神德)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집터를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삼신)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환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환족과 곰(웅)족의 결합-고맙습니다, 꼬마, 유래) 호랑이족은 종내 깨우칠 수 없는지라 이들을 사해(나라의 영토) 밖으로 쫓아 버렸다. 환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朝代記曰時人多産乏憂其生道之無方也庶子之部有大人桓雄者探聽輿情期欲天降開一光明世界于地上
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白而太白可以弘益人間乃命雄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 君勿惜勞苦率衆人躬自降往下界開天施敎主祭天神以立父權扶携平和歸一以立師道在世理化爲子孫萬世之洪範也乃授天符印三個遣往理之
雄率徒三千初降于太白山神壇樹下謂之神市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弘益人間是謂桓雄天王也
<해설>
《조대기》(발해-대진국시대 저술)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産業)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왕자부)에 환웅이라는 대인(大人)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 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지위리 환인)이 두루 금악(金岳-금악산, 알타이산)․삼위(三危)․태백(太白-백두산)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業)은 이미 이루어진 듯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 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 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군사부 君-임금師-스승父하늘)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 사도(師道)를 세워서 세상을 이치대로 교화(在世理化)하여 자손 만세의 큰 귀감(洪範)이 되도록 할지어다”
하시며 마침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가구 또는 많은 수)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삼정승제도 모태)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 事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在世理化>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常祈于神壇樹而又請於桓雄
願化爲天戒之氓雄乃以神呪換骨移神又以神遺得驗靈活乃其艾一炷蒜二十枚也 仍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自由成眞平等濟物便得化人踐形之大人也
熊與虎兩家皆得而食之忌三七日務自修鍊而熊耐飢寒痛苦遵天戒守雄約而得健者之女容虎則誣慢不能忌違天戒而終不得與之贊天業是二姓之不相若也
熊氏諸女自執愚强而無與之爲歸故每於壇樹下群聚以呪願有孕有帳雄乃假化爲桓得管境而使與之婚孕生子女自是群女群男漸得就倫
<해설>
때에 한 곰족과 호랑이족이 있었는데 이웃하여 같이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기도하며 또 한웅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변화하여 천계의 백성<天戒之氓> 환골이신(換骨移神-몸과 마음을 바꾸는) 하도록 하면서 신이 내리신 물건으로써 신령스러운 삶을 얻게 하였으니, 바로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라.
이에 경계할 바를 말하니,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自由成眞-자아유지(자유)란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비롯된다라는 뜻임) 평등을 이루어 만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완성된 성인-신선의 도) 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곰과 호랑이의 양가는 모두 이를 얻어 이를 먹고 조심하기 3․7일(삼신, 칠성, 21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추위․아픔․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遵天戒)하고 한웅의 약속(守雄約)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무만誣慢-속이고, 거만한)하고 조심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違天戒-천계를 어기다)으니, 끝내 천업(天業)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주변의 웅씨 남자들이)고집세고 어리석음이 강하여 저들(웅씨 남자들)과 더불어 혼인하는 자가 없었고, 항상 신단수 밑에 여럿이 모여 아기를 가져 낳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한웅은 임시로 화하여 환이 되어<假化爲桓> 관경(管景)을 얻고 그와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其後有號曰檀君王儉立都阿斯達今松花江也始稱國爲朝鮮三韓高離尸羅高禮 南北沃沮東北夫餘濊與貊皆其管境也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며, 조선이라 칭하였고,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그 영역이었다.
神市之世有七回祭神之曆一回日祭天神二回日祭月神三回日祭水神四回日火神五回日祭木神六回日祭金神七回日祭土神蓋造曆始於此
然舊用癸亥而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六癸自神市氏命神誌所製而以癸爲首癸啓也亥核也日出之根
<해설>
신시(神市)의 세(世)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 회의 날엔 천신(天神)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月神)에 제사 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水神)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火神)에 제 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 제 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 제 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듦은 이에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六癸)는 신시씨(환웅천황)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癸)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씨앗)이니, 일출의 뿌리이다.
故癸爲蘇羅甲爲淸且伊乙爲赤剛丙爲仲林丁爲海弋戊爲中黃己爲烈好遂庚爲林樹辛爲强振壬爲流不地
亥爲支于離子爲曉陽丑爲加多寅爲萬良卯爲新特白辰爲密多巳爲飛頓午爲隆飛未爲順方申爲鳴條酉爲雲頭戌爲皆福
<해설>
그러므로 계(癸)를 소라(蘇羅)라 하고, 갑(甲)을 청차이(淸且伊)라 하고, 을(乙)을 적강(赤剛)이라 하고, 병(丙)을 중림(仲林)이라 하고, 정(丁)을 해익(海弋)이라 하고, 무(戊)를 중황(中黃)이라 하고, 기(己)를 열호수(烈好遂)라 하고, 경(庚)을 임수(林樹)라 하고, 신(辛)을 강진(强振)이라 하고, 임(壬)을 유부지(流不地)라 했다.
해(亥)를 지우리(支于離), 자(子)를 효양(曉陽), 축(丑)을 가다(加多), 인(寅)을 만량(萬良), 묘(卯)를 신특백(新特白), 진(辰)을 밀다(密多), 사(巳)를 비돈(飛頓), 오(午)를 융비(隆飛), 미(未)를 순방(順方), 신(申)을 명조(明條), 유(酉)를 운두(雲頭), 술(戌)을 개복(皆福)이라 한다.(이두식 표현으로 추측)
神市肇降之世山無蹊逕澤無舟梁禽獸成群草木遂長處與禽獸群族擧萬物竝禽獸之隊可依羈而遊烏鵲之巢可擧援而규飢食渴飮時用其血肉織衣耕食隨便自在是謂至德之世
民居不知所爲行不知所之其行鎭鎭其視顚顚含哺而熙鼓腹而遊日出而起日入而息蓋天澤洽化而不知窘乏者也
降及後世民物益繁素樸漸離蹩躄踶跂勞勞孜孜始以生計爲慮
於是耕者爭畝漁者爭區非爭而得之則將不免窘乏矣
<해설>
신시(神市)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산에는 길도 없고 못에는 배도 다리도 없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나무들과 풀들이 자란 곳에는 짐승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은 서로 어울렸고 새의 둥지에서까지 놀면서 서로 의지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셨으니 그 피와 고기를 항상 쓸 수 있었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에 편리한 대로 다 되었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백성은 살아도 일 같은 것을 모르고, 걸어 다닌다 해도 특별한 목적지도 필요 없었으니, 길을 가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담담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뒤이어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멀리(없어짐)하게 되고, 절름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힘쓰고 부지런히 일하게(勞勞孜孜) 되고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 가는 자는 이랑을 다투게 되고(쟁기(밭 가는 장비)가 필요하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고기잡이 도구가 필요해 짐) 다투어 빼앗지 않으면 장래에 궁핍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如是以後弓弩作而鳥獸遁網고設而魚鰕藏乃至刀戟甲兵爾我相攻磨牙流血肝腦塗地此亦天意固然 於是乎 知戰爭之不可免也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갑옷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 일패도지 一敗塗地)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 참으로 이러했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生 -> 長 -> 性, 상생의 도가 필요해 짐)
今夫究其源則蓋一源之祖也然地旣分東西各據一方土境逈殊人煙不通民知有我而不識有他故狩獵採伐之外曾無險陂降至數千載之後而世局已變
仲國者西土之寶庫也沃野千里風氣恢暢我桓族之分遷該域者垂涎而轉進土着之民亦湊集而萃會於是焉黨同讐異而干戈胥動此實萬古戰爭之始也
<해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 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날이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지나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고 말았다.
중국은 서쪽의 보물창고이니 천리 기름진 평야가 넓고 화창하여 기후가 좋다. 우리 환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탐내어(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 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같으면 서로 돕고, 다르면 다투고 싸우게 되어, 창칼을 들게 되니 이것이 만고의 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自桓雄天皇五傳而有太虞儀桓雄敎人必使黙念淸心調息保精是乃長生久視之衍(術)也
<해설>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 번째 태우의(太虞儀) 한웅(桓雄)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黙念)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조식보정(調息保精)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술(術-방법)이다.
有子十二人長曰多儀發桓雄季曰太皥復號伏羲
日夢三神降靈于身萬理洞徹仍往三神山祭天得掛圖於天河其劃三絶三連換位推理妙含三極變化無窮
密記曰伏羲出自神市世襲雨師之職後經靑邱樂浪遂徙于陳竝與燧人有巢立號於西土也
後裔分居于風山亦姓風後遂分爲佩觀任己庖理姒彭八氏也
今山西濟水羲族舊居尙在任宿須句須臾等國皆環焉
大辯經曰伏羲出於神市而作雨師觀神龍之變而造掛圖改神市癸亥而爲首甲子
女蝸承伏羲制度朱襄仍舊文字而始傳六書伏羲陵 今在山東魚臺縣鳧山之南
<해설>
아들 열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多儀發) 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太皥)라 하니 또는 복희씨(伏羲氏)라고 한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 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祭天)하고 괘도(卦圖)를 천하(天河)에서 얻으시니, 그 획(劃)은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妙)가 있고 삼극(三極)을 포함하여 변화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佩)․관(觀)․임(任)․기(己)․포(庖)․이(理)․사(姒)․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 姓과氏; 姓은 모계, 氏는 부계 기준의 출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고로 氏에는 직업 관직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가 있다. 임(任)․숙(宿)․수(須)․구(句)․수유(須臾)의 여러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복희(伏羲)는 신시(神市)로부터 나와 우사(雨師)가 되었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卦圖)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癸亥)를 바꾸어 갑자(甲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女媧)는 복희(伏羲)의 제도를 이어받았다. 주양(周襄)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전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神農起於列山列山列水所出也神農少典之子少典與少皥皆高矢氏之傍支也
蓋當世之民定着爲業漸至成阜穀麻藥石之術亦已稍備日中爲市交易以退也
<해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신농씨는 강씨의 선조이다) 소전은 소호(少皥-삼황오제)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穀麻藥石)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及至楡罔 爲政束急 諸邑携二 民多離散 世道多難
我蚩尤天王承神市之餘烈與民更張能得開天知生開土理生開人崇生衆物原理盡自檢察德無不至慧無不宜力無不備
乃與民分治虎据河朔內養兵勇外觀時變
<해설>
유망(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 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河朔)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及楡罔衰政乃興兵出征選兄弟宗黨中可將者八十一人部領諸軍發葛盧山之金 大制劍鎧矛戟大弓楛矢一竝齊整拔涿鹿而登九渾連戰而捷勢若疾風습伏萬軍威振天下
一歲之中凡拔九諸侯之地更就雍狐之山以九冶發水金石金而制芮戈雍狐之戟更整師躬率而出陣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
<해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釛鎧)․모극(矛戟)․대궁(大弓)․호시(楛矢)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涿鹿)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웅거 하여 구야(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예과(芮戈)와 옹호(雍狐)의 창을 만들어 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是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時楡罔使少昊拒戰天王揮芮戈雍狐之戟與少昊大戰又作大霧使敵將兵昏迷自亂 少昊大敗落荒而走入空桑偕楡罔出奔
蚩尤天王乃卽祭天而誓告天下泰平更復進兵圍迫涿鹿一擧而滅之管子所謂天下之君頓戰一怒伏尸滿野者是也
<해설>
이해에 12 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 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관자(管子)》가 말하는 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時有公孫軒轅者土着之魁始聞蚩尤天王入城空桑大布新政而敢有自代爲天子之志乃大興兵馬來與欲戰天王先遣降將少昊圍迫涿鹿而滅之
軒轅猶不自屈敢出百戰天王動令九軍分出四道自將步騎三千直與軒轅連戰于涿鹿有熊之野縱兵四蹙斬殺無算又作大霧咫尺難辯而督戰 賊軍 乃心慌手亂 奔竄逃命 百里 兵馬不相見
於是冀연淮岱之地盡爲所據乃城於涿鹿宅於淮岱軒轅之屬皆稱臣入貢
蓋當時西土之人徒憑矢石之力不解鎧甲之用又値蚩尤天王之法力高强心驚膽寒每戰輒敗
<해설>
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兗)의 회대(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함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던 것이다.
雲笈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兜무時人不知以爲銅頭鐵額者亦可想見其狼견之甚矣
蚩尤天王益整軍容四面進擊十年之間與軒轅戰七十三回將無疲色軍不退
後軒轅旣屢戰敗尤益大興士馬效我神市而廣造兵甲又制指南之車敢出百戰
天王赫然震怒使兄弟宗黨務要大戰而立威使軒轅之軍不敢生意於追襲與之大戰 混殺一陣然後方熄
<해설>
《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에 <치우(蚩尤)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쓴 기록은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神市)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指南)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宗黨)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그들과 대전을 벌여 한 무리의 군사들을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
是役也我將蚩尤飛者不幸有急功陣沒史記所謂擒殺蚩尤者蓋謂此也
天王赫怒動師新造飛石迫擊之機成陣聯進賊陣終不能抗也於是分遣精銳西守芮涿之地東取淮岱爲城邑而當軒轅東侵之路
及之崩逝數千載而猶有萬丈光烈能起感於後人者也
<해설>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蚩尤飛)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대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岱)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 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光烈)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 공자는 은나라 왕손 숙량흘(叔梁紇)은 공자의 어머니 시씨(施氏)와 야합野合으로 태어났으며, 원래는 은나라 왕손성씨는 子 씨였으며, 후대에 孔 씨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씨가 아버지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고 컸다고 합니다. 공자는 결국 자신의 모국인 우리나라를 험담 즉 자기 조상을 깎아내린 이율배반이며 그의 사상도 환민족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今據漢書地理志其陵在山東東平郡壽張縣闕鄕城中高七丈秦漢之際住民猶常 以十月祭之必有赤氣出如疋絳謂之蚩尤旗其英魂雄魄自與凡人逈異歷數千歲而猶不泯者歟
軒轅以是索然楡罔亦從以永墜矣蚩尤天王之餘烈世襲能振盡有幽靑聲威不墜
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營衛者蓋其戰兢之意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有古訓惟蚩尤作亂彼之畏威奪氣而世傳其訓以爲後人戒者 亦甚矣其後三百年無事 只與전頊一戰破之
蓋自神市開天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而始有檀君王儉以熊氏裨王遂代神市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檀君朝鮮也
<해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감향성(關오타?闞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뻗치기를 마치 진홍색 비단 띠와 같아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이 범인과는 너무나 달라 수 천년의 세월을 흘렀건만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중국의 동부인 요동 오른쪽 유주와 산둥반도 청주(有幽靑)에서 명성과 위엄이 떨어지지 않았다.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 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나니>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상서(尙書)》여형(呂刑)에서는「고훈(古訓)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라고 하였다. (유망과 헌원은 모두 치우에게 정벌당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訓)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顓頊)과 한번 싸움이 있었고, 그(전욱)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王儉은 감군(監羣)이 나타나 신시의 대를 이었다. 그는 구역(九域)을 모두 통일하였다. 그리고 그 관경을 삼한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가리켜 단군조선이라 한다. (치우기 > 둑기 > 둑심기 > 뚝섬)
大辯經曰神市氏 以佺修戒 敎人祭天 所謂佺 從人之所自全 能通性以 成眞也 靑邱氏 以仙設法 敎人管境 所謂 仙 從人之所 自山(山産也) 能知命以 廣善也 朝鮮氏 以倧建王 敎人責禍 所謂 倧 從人之所 自宗 能保精以 濟美也
<해설>
<대변경>에 이르기를
신시씨(BC 3898, 제 1 대 거발한환웅천황)는 전(佺, 신선)이 되어 계율을 닦아 백성들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소위 전(佺)이란 사람이 따라야 할 바로 스스로 완전한 인간(自全)이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性)을 깨달아 참된 진리(眞, 하늘의 창조 정신)에 도달함을 말한다. (조화신> 천일신> 하늘> 성> 진)
청구씨(BC 2707, 제 14 대 자오지(치우)환웅)는 선(仙, 신선)이 되어 설법(設法)을 통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땅을 다스렸다. 소위 선(仙)이란 사람들이 따라야 할 바로 스스로 산(山)을 이루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산(山)은 생산(産)을 말한다). 즉 사명(命-영원한 생명)을 깨달아 선(善, 땅의 조화 정신,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을 널리 베푸는 것이다. (교화신> 지일신> 땅> 명> 선), (중국에 도교를 전해 주었음)
조선씨(BC 2333, 웅씨비왕, 단군왕검)는 종(倧, 지도자, 왕)이 되어 왕도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치고, 재앙을 다스렸다. 소위 종(倧)이란 사람들이 따라야 할 바로 스스로 우두머리(宗,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즉 정(精)기를 보호함으로써 미(美, 인간의 교화 정신, 삶의 아름다움)를 실현하는 것이다. (치화신> 태일신> 사람> 정> 미)
故 佺者 虛焉 而本乎天 善者 明焉 而本乎地 倧者 乾焉 而本乎人也
<해설>
고로 전(佺)은 텅 빈 곳(虛)에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창조정신으로) 하늘이 근본이며, 선(善)은 만물의 삶의 이치를 밝히(明)는 (조화정신으로) 땅이 근본이며, 종(倧)은 하늘(乾)의 도(道)에 따라 (백성을 다스린다는 교화정신으로) 인간이 근본이다. (인류 문화의 원형 삼도이다. 전>불교, 선>도교, 기독교, 종>유교)
<참고>
전(佺)은 하늘의 도(道)를 깨달아 개천(開天)한 자(者)를 일컫는 말이고, 선(仙)은 땅의 도(道)를 깨달아 개지(開地)한 자(者)를 자를 일컫는 말이며, 종(倧)은 인간의 도(道)를 깨달아 개인(開人)한 자(者)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佺)은 나라를 세운 자(者)로 하늘의 도(天道)를 실현한 자(者)를 말하고, 선(仙)은 일정 지역(管境)을 다스리며 땅을 일구어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 자(者)로 땅의 도(地道)를 실현한 자(者)를 말하며, 종(倧)은 인도(人道, 人倫)를 세워 백성들을 교화시킨 행복한 삶을 실현한 자(者)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을 모두 신선(神仙)이라 일컫는다.
이러한 사상이 고대 우리 민족의 민속신앙인 신교(神敎) 사상이다. 신교 사상의 근간이 되는 삼(三)은 천(天), 지(地), 인(人)이다. 하늘의 도(道, 이치), 땅의 도(道, 이치), 인간의 도(道, 이치)를 밝힌 것이 삼사상(三思想)이며, 이를 실현한 사람을 각각 전(佺), 선(仙), 종(倧)이라 한다. 이 전(佺), 선(仙), 종(倧)이 바로 삼신(三神)이다. 대표적인 삼신(三神)으로는 초대 환웅인 거발환환웅, 천하를 다스린 치우환웅, 우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킨 단군왕검이다. 신교(神敎) 사상은 후에 유(儒), 불(佛), 선(仙) 사상으로 분화되며 발전하였다. (인류의 모든 종교가 여기에서 분파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注 曰 桓仁 亦曰 天神 天卽大也一也 桓雄 亦曰 天王 王卽皇也帝也 檀君 亦曰 天君 主祭之長也 王儉亦卽監群 管境之長也
<해설>
<대변경> 주석에 의하면 환인(桓仁)은 일명 천신(天神)이라고도 하는데, 천(天)은 곧 크다(大), 유일하다(一)는 뜻이다. 환웅(桓雄)은 일명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는데, 왕(王)은 곧 황(皇)이요, 제(帝)라는 뜻이다. 단군(檀君)은 일명 천군(天君)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천자)를 말하며, 왕검(王儉)은 곧 감군(監群)으로 관경管境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故 自天光明謂之桓也 自地光明謂之檀也 所謂 桓卽九皇之爲也 韓亦卽大也
三韓 曰 風伯 雨師 雲師 加卽家也 五加 曰 牛加 主穀 馬加 主命 狗加 主刑 猪加 主病 羊加 主善惡也 民有 六十四 徒有三千
<해설>
고로 스스로 하늘의 이치를 밝히는 것(自天光明)을 환(桓)이라 하고, 스스로 땅의 이치를 밝히는 것(自地光明)을 단(檀)이라 한다.
소위 환(桓)은 구황(九皇, 9개의 나라 임금-세상의 모든 임금)을 일컫는 말이며, 한(韓, 삼한) 역시 크다(大-太)는 뜻이며, 사람의 광명(自人光明)을 뜻한다.
삼한은 풍백, 우사, 운사를 일컫는 말이고, 가(加)는 곧 가(家)를 뜻한다. 오가(五加) 중 우가는 농사를 주관(主穀)하였고, 마가는 왕명 출납을 주관(主命)하였으며, 구가는 형벌을 주관(主刑)하였고, 저가는 질병을 주관(主病)하였으며, 양가는 선악을 주관(主善惡)하였다.
백성은 64 종족이 있었고, 무리(마을)는 3000여 개가 있었다.
<참고>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은 제사장이며, 삼한 관경을 모두 다스리는 우두머리였다.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를 삼한이라 한다. 삼한을 다스린 자는 풍백, 우사, 운사였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오가(五加)라는 직속 행정기관을 두고 있었다.
삼한의 구성을 보면 모두 64개의 종족이 있었으며, 총 3000여 개의 마을이 있었다.
遣往理世之謂開天 開天 故 能創造庶物 是虛之同體也 貪求人世之謂開人 開人 故 能循環人事 是魂之俱衍也 治山通路之謂開地 開地 故 能開化時務 是智之雙修也
<해설>
세상을 다스리도록 지도자를 파견하는 것을 개천(開天)이라 한다. 고로 개천이란 만물(庶物)을 창조(創造)하는 능력으로 허(虛-虛粗)를 하나의 단체(조직)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 의욕적인 교화)한다는 것을 개인(開人)이라 한다. 고로 개인이란 인간의 일(人事-역사)을 순환(循環)시키는 능력으로 혼(魂)을 구연(俱衍)시키는 것이다.
산을 다스려 길을 내는 것(治山通路)을 개지(開地)라 한다. 고로 개지란 일을 해야 할 시기(時)와 해야 할 일(務)을 일깨우는(開化) 능력으로 이러한 지혜는 함께 병행(雙修)되어야 한다.
<참고>
위의 개지(開地)의 개념은 오늘날 산을 뚫고 길을 내는 도로 공사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앞에서 산(山)은 산(産)이라 하였으므로 여기에서 개지(開地)의 의미는 생산(生産)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내고, 길을 내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생산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시(時)는 씨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무(務)는 농토를 마련하고 농사짓는 일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개지란 땅을 이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三韓秘記 曰 盖白頭巨岳 盤居大荒之中 橫亘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嶝峻 蜿蜒磅礴 爲倍達天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以區區妙香山
只係狼林西走之脉 而能得叅於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山 爲太白則其見
只局 於東鴨綠水以南一隅之地
便唱山之祖宗崑崙 欣欣然以小中華自甘 宜其貢使北行 歷累百年 而不爲
之耻 是乃廢書而長嘆者也 然 今東方諸山 以太白爲名者 頗多 世俗 率以寧邊妙香山 當之 實由於一然氏 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 如豆如太 安足以與論哉 白頭山 上有大澤 周可 八十里 鴨綠 松花豆滿諸江 皆發源於此 曰天池 卽桓雄氏 乘雲天降處也 妙香山曾無一小洿 且不爲桓雄天皇肇降之太白山 不足論也 魏書勿吉傳 曰 國南 有徒太山 魏言太皇 有虎豹熊狼 不害人 人不得上山溲溺 行逕者 皆以物盛去 盖桓雄天皇之肇降 旣在此山 而又此山 爲神州興王之靈地 則蘇塗祭天之古俗 必始於此山 而自古桓族之崇敬亦此山始 不啻尋常也 且其禽獸悉沾神化 安棲於此山 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溲溺而瀆神 恒爲萬世敬護之表矣
<해석>
<삼한비기>에 이르기를 '백두거악(백두산)은 대황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로가 1,000리요, 높이가 200리인 산으로 그 모습은 웅장하고 험준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낙석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많은 돌들이 쌓여 있다. 그곳은 배달천국이 자리 잡은 진산이며, 신인(환웅)의 오르내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구차스럽게 묘향산을 운운하는가? 단지 묘향산은 낭림산맥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일 뿐인데, 묘향산이 이와 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속에 묘향산을 일컬어 태백이라고도 하는데, 태백을 보자면 태백은 단지 동압록수의 남쪽에 치우친 한 봉우리의 땅일 뿐이다.
한편 소중화(小中華)는 입버릇처럼(便唱) 모든 산의 근원은 곤륜(崑崙)이라고 헤헤! 거리며(欣欣), 만족스러워하는데(自甘), 그들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북쪽을 오간 지가(北行) 어언 100년이거늘, 그 치욕을 모르고 (곤륜산을 자랑하며 헤헤! 거리고 있으니) 쓰던 글을 멈추고, 긴 탄식만 짓게 한다.
또 지금 동방(東方)에 있는 많은 산들(諸山) 중에 태백(太白)이라고 이름이 붙여진(名者) 산들이 허다(頗多)하다. 세속인들이 말하는 영변의 '묘향산'이 한 예이다. 이것은 일연 씨가 쓴 삼국유사설에서 기인(實由)된 것이다. 이는 일연씨(一然氏) 무리들의 눈구멍(眼孔)이 콩(豆) 만하거나 팥(太) 만하기 때문이며, 직접 가서 확인(安足) 하지도 않고 주장하는 것이니,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백두산 위에는 둘레가(周可 ) 80리 정도 되는 큰 연못이 있고, 압록강, 송화강, 두만강 등 모든 강의 발원지가 이곳이다. 이름하여 천지인데, 천지는 환웅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던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 없으니, 환웅천황이 내려온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묘향산을) 태백산이라고 논하기에는 부족하다(不足論也).
<위서물길 전>에 전하기를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이 있다. 위(魏) 나라에서는 도태산을 태황산이라 한다. 이 산에는 호랑이, 표범, 곰, 여우 등이 살고 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 오줌(溲溺)을 누지 않았고, 이 산을 오르내리며 수도하는 사람들(行逕者)은 모두 물건을 가득 넣어 다닌다.
盖我桓族 皆出於神市 所率三千徒團之帳 後世以降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桓檀一源之裔孫也
神市肇降之功悳 當必傳誦而不忘 則先王先民 指其三神古祭之聖地 曰三神山者 亦必矣 盖神市以降 神理聖化之漸 逐歲而尤復益深 立國經世之大本 自與人國 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天下 天下萬邦之人 有慕於神理聖化者必推崇三神 至有東北 神明舍之稱焉
<해석>
무릇 우리 환족(桓族)은 모두가 신시(神市, 환국)의 삼천 무리(三千徒團)에서 시작되었다. 후세에 번창(降)하여 여러 성씨로 분화되고, 구별되었으나 실제로는 환단의 한 줄기(桓檀一源, 환웅과 단군)를 벗어나지 못하며, 모두가 그 후손들이다. 따라서 신시조강공덕(神市肇降之功悳)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전승되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則) 선왕선민(先王先民)을 가리켜 삼신(三神)이라 하였던 것이나, 그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제(祭)를 올렸던 일이나, 그 성지를 삼신산(三神山)이라고 일컬은 것은 그 또한 당연한 것이다. 무릇 신시는 신리성화(神理聖化)로 다스림(降)으로써 점점 세를 거듭(漸逐歲) 하면서 더욱더 (삶의 질을) 회복하고, 향상시켰으며, 더욱 심화되어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이 되었다. 환국의 다스림은 다른 종족(人國)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풍속(神風聖俗)은 널리 천하에 전파되었고, 천하만방의 사람 중에 신리성화(神理聖化)를 부러워하는 자들은 삼신을 따르고, 숭상하였다. 급기야는 동북지역을 일컬어 신이 세상을 밝게 하는 곳(神明舍)이라고까지 칭하였다. 이런 다스림이 바로 신리성화(神理聖化)이다.
及其末流之弊 則漸陷於荒誕不經 愈出愈奇 怪誕無稽之說 迭出於所謂燕齊海上 怪異之方士 盖其地 與九桓神市 相接 民物之交 特盛 自能風聞驚奇 又復推演附會 曰三神山 是蓬萊方丈瀛洲 在渤海中云云 以惑世主也 然 當時之人 東至海上 一望無所 際涯 而渤海之中 更不知有他海故輒曰三神山 亦在渤海中 云云 實則非三神山 各在三島山也 蓬萊蓬勃萊徑之處 卽天王所降 方丈 四方一丈之閣 卽蘇塗所在 瀛洲 瀛環洲島之貌 卽天池所出 摠言爲三神山 而三神卽一上帝也 然 尤其荒怪者 不知三神之源委 而乃 金剛曰蓬萊 智異曰方丈 漢拏曰瀛洲 是也 史記封禪書 曰「其傳 在渤海中 盖嘗有至者 諸仙人 及不死之藥 皆在焉
其物禽獸 盡白 而黃金白銀 爲宮闕云云」 又仙家書 曰 「三神山 有還魂不老等草 一名眞丹」 今白頭山 自古 有白鹿白雉 或白鷹之屬 括地志所云 有鳥獸草木皆白 是也 又白頭山一帶 多産山蔘 世人 擬之不老草 山氓 欲採取則必先沐浴潔齋 而祭山然後 敢發 其還魂不老之名 亦想源於此也. 世紀 云「檀君烏斯丘元年 北巡而得靈草云 則此又驗也.
<해설>
급기야 (삼신을 맹종하던 시기의) 말기에는 폐단으로 흘렀다. 점차 허황되고 거짓된 이론(荒誕不經)으로 빠져들더니, 더욱 기이한 주장이 나왔고(愈出愈奇), 황당무계한 설이 난무하였다. 소위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渤海)에는 괴이한 방사가 산다(怪異之方士)는 이야기도 나왔다.
생각하건대(盖), 그 땅이 구환과 신시와 서로 접하고 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신시의 신리성화(神理聖化)를) 풍문으로 듣고 놀라 자기네들 스스로 만들어낸 말들이라 생각되며, 또 (혹자들은) 상상하여 늘리고 부연하여 삼신산(三神山)은 봉래, 방장, 영주인데, 이 산들은 발해(渤海)의 한가운데 있다고 운운하며 세상을 현혹시키기도 하였다. 이러니 중국 사람들은 삼신의 의미를 전혀 모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동쪽 바다로 가 보았지만, 일렁이는 파도 이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발해 한복판을 아무리 보아도 또 다른 바다를 볼 수 없었다. <고첩>에 이르기를 "산신산은 발해에 있다고 운운하기에 실제로 가 보니 삼신산이 아니라 각각의 세 개의 섬이 모인 산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봉래(蓬萊)라는 말은 쑥(蓬)과 명아주(萊)가 무성하게 자라는 곳이라는 뜻으로 (거발환환웅) 천왕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고, 방장(方丈)이란 사방으로 각 1장(어른 키 정도의 길이) 정도 되는 제단을 쌓은 누각(閣)이라는 뜻으로 소도가 있는 곳을 말하며, 영주(瀛洲)란 병풍(瀛, 비단)처럼 섬들이 둘러싼 모양이라는 뜻으로 천지가 용출하는 곳을 말한다. 이 셋을 모두 합(摠言)하여 삼신산이라고 하며, 삼신은 곧 일상제(하늘님, 최고지도자, 환웅)인 것이다. 그런데(然) 더 황당무계한 것은 삼신산의 본래의 뜻도 모르면서 금강산이 봉래이고, 지리산이 방장이며, 한라산이 영주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찍이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仙人) 및 죽지 않는 약은 그곳에 있다 하며, 그곳의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선가서(仙家書)》엔 가로대「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 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括地志)》가 말하는 바「새․짐승․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는 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되돌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十月祭天은 遂爲天下萬世之遺俗이니 此乃神州特有之盛典이오 而非外邦之可比也니太白山이 獨壓崐崙之名이라도 亦有餘矣라. 古之三神山者는 卽太白山也니 亦今白頭山也라 盖上世神市之人文敎化가 至于近世하야 雖不得健行이나而天經神誥가 猶有傳於後世하고 擧國男女가 亦皆崇信於潛嘿之中하니 卽人間生死를 必曰三神所主오 小兒十歲以內의 身命安危와 智愚俊庸을 悉托於三神하니
夫三神者는 卽創宇宙造萬物之天一神也시니라.
<해설>
10월에 천제를 지내는 풍속은 마침내 천하 만세에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풍속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주에만 있는 독특하고도 성대한 의식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이 홀로 곤륜산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다.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고, 지금의 백두산이다. 그 옛날 배달 때의 인문 교화가 근세와 와서 비록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나,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세까지 전해져 온 나라의 남녀가 모두가 은연중에 믿고 받들며,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께서 주관하신다”하고, 열 살 안 된 어린아이의 신명의 안위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뛰어남과 용렬함을 모두 삼신께 맡겼다. 대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
昔 司馬相如 謂漢主劉徹 曰陛下謙讓而弗發也 苛三神之驩韋昭注 三神上帝 三神之說 早已傳播於彼境也 明矣
<해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 「삼신은 상제다. 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震域留記 曰 齊俗 有八神之祭 八神者 天主 地主 兵主 陽主 陰主 月主 日主 四時主也 天好陰 故祭之必於高山之下 小山之上 乃祭天太白山之麓之遺法也 地貴陽 故祭之必於澤中方丘 亦卽祭天塹城之壇之餘俗也 天主 祠三神 兵主 祠蚩尤 三神 爲天地萬物之祖也 蚩尤 爲萬古武神勇强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世道術之宗 喚風雨 招萬神 是以 大始之世 恒爲天下戎事之主 海岱之地 旣爲奄藍陽介裴萊徐淮八族之所宅 則八神之說 萌於八族 而盛行於當時也
<해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이르기를,
「제(齊) 나라(강태공)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었으니, 팔신(八神)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한다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인 작은 산 위에서 지냈다. (산이 없는 지역에서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이 전해온 천제(天祭)의 예법인 것이다. 땅(地)은 양(陽)을 귀하게 여긴다 하여, 땅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지냈다. 이것 역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하던 풍속의 영향이다. 천주란 삼신께 제사 지내는 것이고, 병주(兵主)란 치우(蚩尤天王)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삼신(三神)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요, 치우(蚩尤)는 오랜 옛적부터 무신(武神)으로 존경받는 용맹스럽고 강한 무인(武人)의 조상으로, 큰 안개를 만들어 일으키며,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또 만대(萬代) 도술(道術)의 조종(祖宗)으로 만 가지 신(神)을 부르고, 비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서 오랜 옛날 세상에서부터 항상 천하의 전쟁무기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주장이 되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奄), 람(藍), 양(陽), 개(介), 우(隅), 래(萊), 서(徐) 회(淮)의 팔족(八族)이 자리 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팔신(八神)의 설(說)은 팔족(八族)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劉邦 雖非夷系 而起兵於豊沛 則豊沛之俗 祠蚩尤也 故邦亦因俗以祠蚩尤 而 釁鼓旗 遂以十月至昏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則因以十月爲歲首 此雖襲秦正朔 而亦因崇敬東皇太一 敬祠蚩尤也 後四歲 秦域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 如此
<해설>
유방(劉邦)은 비록 동이(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지만, 풍패(豊沛)에서 병사를 일으켰는데, 풍패의 풍습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냈으므로, 유방(劉邦) 또한 그 풍속으로 인하여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희생의 피를 북에 바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날렸다. 마침내 10월에 이르러 파강(江)의 상류에서 제후(諸候)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10월로서 한 해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이것은 비록 진(秦) 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던 것을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역시 동쪽 태초의 황제인 한웅(桓雄)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에서 기인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 후 4년이 지나 진(秦) 나라 전역이 평정되자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蚩尤)의 사당(祠堂)을 장안(長安)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蚩尤)를 공경하는 마음이 이와 같이 독실하였다.」고 하였다.
晉天文志 蚩尤旗 類慧而後曲象旗 所見之方 下有兵云 則乃蚩尤天王 上爲列宿也 通志氏族略 蚩氏蚩尤之後 或曰蒼頡 與高辛 亦皆蚩尤氏之苗裔 生大棘城 而轉徙於山東淮北者也 盖蚩尤天王之英風雄烈 播傳遠域之深 推此可知也 燕齊之士 沈惑於神異誣壹之說 亦尙矣 自齊威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秦漢之際 宋無忌 正伯僑 克尙 羨門子高 最後之徒 則燕人也 文成 俉利 公孫卿 申公之屬 皆齊人也
<해설>
진(晋) 나라의 천문지(天文志)는,
「치우의 기(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쪽은 그 모양이 꼬부라졌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아래에는 병사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된 때문이라고 한다. 또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이다」고 하였으며, 혹 말하기를,「 창힐(蒼頡)과 더불어 고신(高辛)도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後裔)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이사하여 살았다」고 한다. 대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뛰어난 풍채와 힘차고 당당한 위엄이 먼 나라 깊숙한 곳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연(燕) 나라와 제(齊) 나라의 선비들은, 불가사의 한 꾸며 낸 속임수의 이야기에 깊이 빠졌으며, 또한 이를 높이 여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제(齊) 나라의 위(威) 왕과 연(燕) 나라의 소(昭) 왕 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三神山)을 찾았으니, 진한(秦漢) 때의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이문자고( 門子高)는 최후의 사신들로서 연(燕) 나라 사람들이었다. 문성오리공(文成伍利公)과 손경(孫卿), 신공(申公)의 무리들은 모두 제(齊) 나라 사람들이다.
昔呂尙 亦蚩尤氏之後 故亦姓姜 盖蚩尤 居姜水而有子者 皆爲姜氏也 姜太公治齊 先修道術 祭天於天齊池 而亦受封於齊 八神之俗 尤盛於此地 後世 其地多好道術者出 與神仙黃老 混會敷演 尤爲之潤飾 則此又姜太公爲之助俗也
옛날 여상(呂尙-강태공)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역시 성은 강(姜- 豐山)에서 갈라진 최초의 성씨 중 하나)씨이다. 대저 치우(蚩尤)는 강수(姜水)에 살면서(실제 산사람은 염제신농임) 아들을 두어 다 강(姜)씨가 되었다. 강태공은 제(齊) 나라 다스리기에 앞서 도술(道術)을 수련하였고, 천제지(天齊池)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역시 제(齊) 나라에서 책봉을 받았으니, 이 땅에 팔신(八神)의 풍속은 더욱 성하였다. 후세에 그 땅에서 도술(道術)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황노사상(黃老思想)이 혼합되어 널리 퍼져 통하도록 번지르하게 장식되니, 이 또한 강태공(姜太公)이 그 풍속을 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嘗作陰符經注 祖述紫府三皇之義 則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浮誕之說哉 且其五行治水之法 黃帝中經之書 又出於太子扶婁 而又傳之於虞司空 後復爲箕子之陳洪範於紂王者 亦卽黃帝中經 五行治水之說 則蓋其學 本神市邱井均田之遺法也
<해설>
일찍이 음부경(陰符經)에 주(注)를 만들고, 자부(紫府) 선생이 지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의 뜻을 선인(先人)의 말을 본받아 그 뜻을 펴서 서술(書術)하였다. 그런 즉 연(燕) 나라와 제(齊) 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상하고 신비(거짓된)한 말들을 싫어할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은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扶婁)에게서 나와서 우(虞)의 사공(司空=禹임금)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은나라말기)가 말한 것이 주왕(紂王-은나라 마지막 왕)의 홍범(洪範-홍범구주-정전법 등)을 전했는데 이것은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의 도리(道理)인 것이니, 대저 학문의 근본은 신시(神市)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으로부터 전해진 법이다.
密記云 古者 徙死無出鄕 合葬一處 表爲支石 後變爲壇 稱支石壇 亦祭夕壇 在山頂而塹山爲城壇者 曰天壇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 曰神壇 今僧徒 混以帝釋稱壇 則非古也 護守三神 以理人命者 爲三侍郞 本三神侍從之郞 三郞 本倍達臣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 高麗八觀雜記 亦曰三郞 倍達臣也 主稼種財利者爲業 主敎化威福者爲郞 主聚衆願功者爲伯 卽古發神道也 皆能降靈豫言 多神理屢中也 今穴口有三郞城 城者卽三郞宿衛之所也 郞者卽三神護守之官也 佛像始入也 建寺稱大雄 此僧徒之襲古仍稱 而本非僧家言也 又云 僧徒儒生 皆隷於郞家 以此可知也
<해설>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옛날엔 사람들이 죽으면 향리(鄕里)를 벗어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支石-고인돌)을 만들어 표시하였다. 뒤에 변하여 단(壇)을 만들고 지석단(支石壇)이라 칭하였다. 또 제석단(祭夕壇)이라고도 하였다. 산(山) 정상에 자리를 정하여 구덩이를 파고, 단(壇)을 쌓은 것을 천단(天壇)이라고 하였으며, 산골짜기에 자리를 정하여 나무를 심고,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고 하였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동하여 무당이 섬기는 신(神), 즉 제석신(帝釋神)을 모신 것을 단(壇)이라 부르는 것은, 옛부터 전해온 것이 아니다. 삼신(三神)을 수호(守護)하고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삼신(三神)을 모시고 따르는 젊은 아이라 했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나라의 신하(臣下)였다. 역시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고 했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 또한 이르기를, 「 삼랑(三郞)은 배달나라의 신하(臣下)였다. 씨 뿌려 농사하고 재물과 이윤을 주관하는 것을 업(業)이라 하고, 교화와 제사에 사용하는 고기와 술, 즉 제물을 주관하는 것을 랑(郞)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덕(功德)을 원하여 비는 일을 주관하는 것을 백(伯)이라 하였으니, 곧 옛날에 시작한 신도(神道)이다. 모두 능숙하게 영(靈)을 내려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았는데, 신(神)의 섭리를 종종 적중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혈구(穴口=강화)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자고 지키며,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郞)은 삼신(三神)을 수호(守護)하는 관직(官職)이다. 불상(佛像)이 처음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대웅(大雄)이라 칭하였다. 대웅(大雄)이라고 말하는 것은 승도(僧徒)들이 옛날의 풍습을 이어받아 거듭 사용한 말로써, 본래 승가(僧家)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은 모두 랑가(郞家)에 예속되어 있었으니, 이로서 가히 알 것이라 하였다. (전, 선 종)
或云 古者人民 散處溪谷 葬無定地 上自國王 皆遷置於隧穴 幷配天神以祭 後或有平地而葬之 環植檀柳松柏以識之 是以 神市之世 無陵墓之制 然 後至中古 國富族强 養生得贍 送死亦侈 祭之有禮治墓頗隆 或圓或方 克厥侈飾 高大廣狹 方正有規 內壁外墳 均整兼巧 至于高句麗 陵墓規制 冠於天下
<해설>
혹 말하기를 옛날에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땅을 미리 정해 놓지 않았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 다 동굴에 옮겨 놓고, 조상님과 나란히 모시고, 같이 제사를 지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혹간 평지에 장사를 지내고 박달나무나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둘레에 심어, 이것으로 무덤을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신시(神市)의 세상에서는 능(陵)이나 묘(墓)를 쓰는 제도가 없었다. 그런 후 중고시대(中古時代)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이 강성해지니, 건강의 유지와 증진에 힘쓰고, 담력을 얻고 보니 죽은 자를 보내는 것도 사치스러워지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禮義)가 있었으며, 묘(墓)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 크기, 넓이, 폭, 모나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있었다. 내벽(內壁)과 외분(外墳)을 고르게 정리하였으며, 겸하여 교묘하였다. 고구려 때에 이르러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네이버블로그 감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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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1강 한민족 최초의 국가 신시배달ㅣ안병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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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원전강독/태백일사 신시본기 (4회차) | 안병우
https://www.youtube.com/watch?v=AivtcgsVv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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