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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Jun 29. 2023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제8

나라가 어려울수록 더 정진하고 합심하여 위기 극복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론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를 통하여 고려의 역사에서 만주를 회복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회복하지 못하여 안타까웠으며, 역사를 밝히고 민족정신을 부흥하였다면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울러 긴박했던 고려말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으며, 이 글을 통하여 다음의 사항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만주땅을 버리고 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성계 아들 태종 이방원과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 이유 세조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 서를 파기하고, 중국에 사대하여 나라의 근본을 어지럽힌 폭군이며, 만주땅을 회복하지 못한 역사의 죄인들입니다.

이맥선생님께서 태백일사를 쓰시기 시작한 것이 연산군의 첩 장녹수를 비난하다가 괴산으로 유배된 때입니다. 지금도 연산군과 같은 윤석열과 김건희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 똑같습니다. 

태백일사를 통하여 우리 역사와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정신을 잘 수련하여 실천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올바른 역사를 알고 우리민족의 정신을 승계하는것입니다. 


❖한문 원문은 뒤에 번호를 맞추어 첨부하였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 주시면 확인 후 수정 하겠습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1.高麗 太祖의 訓要十條

태조 신성대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철원 -> 개성)의 남쪽으로 정했다. 26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방을 달리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니 그들의 의관제도를 아에 본받지 마라'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 여기서 옛부터라는 것은 신라에서 당나라 풍습을 본받은 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태백일사-고려국본기에는 훈효십조중 네번째 내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기록은 에서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26년 계묘(943)'의 내용입니다.)


[고려 태조가 후손에게 귀감으로 삼게 한 10가지 유훈. 불법을 승상하라는 것과 서경(평양)을 중시할 것, 연등과 팔관회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이 있다.

첫째로,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중략

둘째로, 모든 사원들은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중략

세째로, 적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비록 떳떳한 법이라고 하지만은 옛날 단주(丹朱)가 착하지 못하여 요가 순에게 나라를 위양하는 것은 실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울어나온 것이다. 후세에 만일 국왕의 맡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왕위를 지차 아들에게 줄 것이며 지차 아들이 또 착하지 못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들어게 신망이 있는 자로써 정통을 잇게 할 것이다.

네째로,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 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약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각각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제도를 아에 본받지 마라.

다섯째로, 내가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되어 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다. 중략

여섯째로,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5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중략

일곱째로, 임금은 인민의 신망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 신망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간하는 말을 쫓고 참소하는 자를 멀리하여야 하는 바 간하는 말을 쫓으면 현명하다. 중략

여덟째로, 차현(車峴)이남 공주(公州)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를 참여하거나 왕후, 국척들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반란을 일으킬 것이요. 중략

아홉째로, 배관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일정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현재의 것을 증감하지마라. 중략

열째로, 나라를 가진 자나 집을 가진 자는 항상 만일을 경격하며 경전과 역사 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지금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중략

이 열가지 훈계 끝에 일일 "마음속에 간직하라(中心藏之)"라는 네 글자를 붙여서 후대의 왕들이 전해 오면서 보배로 여기게 되었다.]


여덟째로, 차현(車峴)이남 공주(公州) 중략 ~ -> 이 부분은 이상합니다. 후백제는 견훤(甄萱-진훤-이훤)은 王建에게 투항하여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王建은그에게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그를 상부(尙父)라 하여 우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주는 王建이 세력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 했고, 중요한 지지 기반이었으며, 더군다나 王建의 제2번째 부인인 장화황후(莊和皇后) 吳氏는 羅州 사람으로 王建의 나주 공략에 큰 공헌을 합니다. 장화황후(莊和皇后)에게서 난 太子 무(武)는 후에 2대 황제 혜종(惠宗)이 되기 까지 합니다. 물론 그 이후로 나주의 세력이 밀려 나지만,  당시 왕건에게서 만들어진 내용이라고 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2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1)혜종 이후에 나주 배척 세력들이 일부 내용이 변경됨(이것이 유력합니다.) 2)일본에 의해 내용이 조작 되었다.(실제로 혜종과 장화황후(莊和皇后) 吳氏에 대한 험담내용이 무수합니다.)


2.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임성 사암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후고구려왕으로 삼고 원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게 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아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3.궁예의 출생과 양길과의 만남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닿은 듯 보였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 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자 방일하여 원래부터 계율에 따르지 않으며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고구려의 엣땅을 회복하고자 한 궁예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를 펴본즉 왕이라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고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이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안성)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원주)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 병력 100기를 나누어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라(강릉, 명주)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4.왕륭의 귀순과 이훤萱(견훤)의 후백제 건국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왕 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이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중마한-익산)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5.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이야.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라고 했다.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영주부석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6.왕건의 즉위와 궁예의 최후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 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 여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 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7.서희 장군과 소손녕의 담판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몰아붙였다. 성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인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 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쏜가. “

  하니 말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8.윤관의 여진 정벌

고려의 북방 영토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 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 했다. “윤관과 오연농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 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등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 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 했다. 제 가로되 “무슨 말썽인가” 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징을 고함에, ‘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그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일 것이니 거란을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쪽을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을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라고 했다. 간의 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 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 것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은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하므로 짐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 여러 차례 탄핵을 논하는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여진에게 땅을 돌려주다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 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태사의 지위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성 지재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 이상을 만나 다시 9성을 돌려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 '띰다'고 했다. 옛 사서에서 말한다.


고려의 국경, 만주 선춘령(목단강 부근)

  '두 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으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9.고려의 북방영토

윤언이의 자해표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금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 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 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건원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 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 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 둘 곳조차 없어질 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서 전하는 조위총의 난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은 대정 15년(1175)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있다.


예종의 영토회복의지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1115)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은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 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고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 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10.이존비의 역사의식과 낭가의 자주독립 정신

후암 이존비(-1287)는 고려 경효왕(충렬왕) 때의 인물이다. 한 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상주하였다. '우리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서 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이 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을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가? 바야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하다가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엇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 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듣는 자 이를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셋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하는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찍이 회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고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가 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련가. 돌아보며 웃는 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충렬왕과 북경 연녀이야기

상께서 일찍이 연경(북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을 한 개 쥐어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다. 며칠 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지라, 상은 여인의 죽음을 염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나라 여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잘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 님과 같아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 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의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이존비의 죽음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 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 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에 말하였다. '이존비의 정직은 방가의 사직이다. 어찌하여 요절함이 이 같을까?'라고.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써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11.이암의 역사의식과 고려 권신의 사대주의

행촌 이시중 암(1297~1364)은 일찍이 권신은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말려 청하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 아랫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서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 말라. 하물며 우리나라는 한단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 지금 일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나 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횡포를 일삼았으니, 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밤낮으로 떨치고 나서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계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며 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그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닌 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이암의 삼대 저서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 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경제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되,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자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고 하였다.


이암의 벗 이명과 범장

  행촌선생이 일찍이 천보산에 노닐 때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처럼 신서(神書)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桓檀)의 진결(眞訣)이라. 


삼신의 원리로 전한 진리의 도언

그 통달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칭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대저 성(性)을 엉기게 하여 지혜(智慧)를 만들고, 명(命)을 엉기어 덕(德)을 이루고, 정(精)을 엉기어 힘(力)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三神)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三眞)이 멸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渾然)히 그 체(體)를 같이하고 생화(生化)하여 무궁한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가로되 '도(道)는 하늘에 있을 땐 삼신(三神)이요, 도(道)는 사람에 있을 때 삼진(三眞)이라고 한다. 그 본(本)을 말한다면 곧 일(一)이 된다. 유일을 도(道)로 하고 불이를 법(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庶物)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天元)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은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렵고, 나이 들어 어느덧 백발이 발치에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이 흥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흥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어 집에 간직하셨다.


이암의 신교관

  현효왕의 뒤 5년 행촌 이암(李嵒)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덕(德)을 믿고 신(神)을 수호함은 첫째로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원이다. 곧 신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그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과 같은 것을”이라 했다.


12.인물 정지상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찍이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암지에 가서는 세도가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멋대로 하였으니, 존무사나 안림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업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크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기씨를 주살(誅殺)하고 다시는 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을 제어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서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 하느냐?” 했다.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 원철 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 만에 죽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 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불화를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굿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를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은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이 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13.고려 왕조 때 천제를 찬양한 노래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 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12년(1351)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 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션인냥 화사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빛에 비취빛 산 색깔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 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세상 여러 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순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 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대제학 권근의 제천문

  강능왕 우의 5년(1391) 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대제학 권근(1352~1409)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치니 그 글에 가로대, '초헌에, 바다 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은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 지며, 조촐한 공물을 지열하니 명신은 있느나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니.

  그윽이 생각하니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부터 백성들을 위해 극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셨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이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자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 같은 도둑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으로 하시겠는가? 먼 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계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 보냐? 그럴 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로 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에 주저앉지 않는다면 신이 마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 곳이 없을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을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하며 보감은 명명이라. 하늘이시여, 명을 밝히시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다.


14.고려사, 왕조의 분열과 옛 영토 회복

  천수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1357)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예, 기철, 권겸, 노이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였다. 최영 등은 이때 고우로부터 돌아왔다. 


최영 장군의 요동공략

상께서는 처음 최영 등과 의논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요하)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 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홍건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략해 왔다. 11월 적은 안주(평안북도 북쪽)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행촌 이암 선생의 3째 아들)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2개의 압록수


정세운 장군과 행촌이암의 애국원정

12월 상께서는 복주(안동)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이래 밤낮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홍건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양성(분노하여 소리높여)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한다.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조카)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 1362년 1월에 개경수복-대승하였으나 김용이 안우, 이방식, 김득배를 꼬여서 정세운을 죽임 -> 김용은 또 이들에게 정세운죽인 죄를 죄를 뒤집어 씌워 모두 죽임 -> 공민왕을 죽이려 함(비슷한 인도치가 대신죽음) -> 김용 발각되었으나 죽음을 면함, 귀향 -> 사실이 밝혀져 사지가 잘림.

❖ 흥왕사의 변: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金鏞)이 왕을 살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1359년에 뒤이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침입하였다. 이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 : 총사령관)이 되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김용·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한우·이방실·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민왕은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변을 면하였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변은 최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행궁에 이르러 토벌함으로써 끝나게 되었지만, 김용은 오히려 1등 공신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곧 그 사실이 발각되자 김용은 그동안의 공로가 있다 하여 죽음은 면하였으나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귀양가게 되었다. 다시 계림부(鷄林府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긴 뒤 사지가 잘려 전국에 돌려지고 개성에 보내져 효수(梟首)되었다.


잃어버린 북방 영토를 회복한 기회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이지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 왔다. 1371년 윤3월 기미 북원(원나라)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명나라에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해성, 요양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들의 무기력함이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마침내 옛 강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구나. 뜻있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우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에 요동도사(요동의 도 지휘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되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심양)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안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운운(철령위)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1383년)로 삼았다.


❖명나라가 촉을 평정하고 그때 촉의 후손을 우리나라 보냈는데 이들이 명씨 선조임.

❖명사 지리지: 홍무21년 심양남쪽 철령성 자리가 철영위 설치했던 자리 (지금의 철령시).

❖이성계는 만주땅을 버리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성계아들 태종 이방원과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 이유 세조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를 파기하고, 중국에 사대하여 나라의 근본을 어지럽힌 폭군이며, 만주땅을 회복하지 못한 역사의 죄인들이다.


태백일사 발跋

歲甲子 余謫槐山 處宜謹愼 頗爲無聊

乃取閱家藏陳篋 其有可據於史傳者 

與夫平日聞諸古老者 幷擧採錄而未成書

後一十六年庚辰 余以撰修官 

頗得內閣秘書而讀之 乃按前稿而編次之 名曰太白逸史 然

敢不聞於世 秘藏之 爲不出戶外者

一十堂主人 書

<해설>

1506년(연산군 10,단기3837,갑자)에

 내(이맥)가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마땅히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다.

이에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고 점고해 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과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었는데

책으로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16년이 지난 1520년(중종15년,단기 3853,경진)에 나가 찬수관 신분이라

내각비서를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하여

태백일사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물어 밝히지 못하고 비밀히 간직하여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십당 주인이 쓰노라.


이맥선생님(고성이씨)의 괴산 귀향: 연산군의 첩 장녹수를 비난하여 귀행을 가심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한자 원문(숫자는 위 해설과 맞추어 적음) 


1

太祖神聖大王天授二年 定都于松岳之陽 二十六年 御製訓要 其略 曰

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苟必不同

2

泰封國王弓裔 其先平壤人 本報德王安勝之遠裔也

其父剛 從術家言 從母姓爲弓氏 先是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奉安勝爲後高句麗王 請援於新羅 新羅王 處之國西金馬渚 後改爲報德王

神文王立 徵報德王爲蘇判 其族子大文 留金馬渚 謀叛稱王

被誅 餘衆殺官吏 據報德城又叛 爲新羅所平 徙其人於國南州郡


3

大震國明宗景皇帝天福九年五月五日 弓裔 生於外家 其屋上有素光

若長虹上屬天 新羅日官 望之 以爲將不利於國家以聞 王嫌之 使人抵其家 殺之

其母 賂珍寶 請抱而逃竄 領勞養育 年十餘歲 祝髮爲僧 號善宗 及壯 放逸如故 

不拘檢僧律 軒紵有膽氣 嘗持鉢赴齋 有烏啣牙籤落鉢中 

視之有王字 秘不言 頗自負 先自安勝 有勞王事 而新羅不報 

反收其土地人民而盡奪 只以王妹妻之而已 高句麗遺民 以故累世積怨 怏怏起變而屢敗

至弓裔 見國家衰亂 乘欲聚衆 復祖宗之舊土 洗積世之仇

乃投竹州賊箕萱 萱侮慢不禮 弓裔 鬱黍不自安 潛結萱麾下元會申淘等爲友

投北原賊梁吉 吉善遇之 委之以事 分兵百騎 使東略州郡 皆降之

又攻阿瑟那 衆至六百 自稱將軍 與士卒同甘苦 予奪不以私 衆心皆畏之

4

天福二十七年 太守王隆 以松岳郡歸弓裔 說之 

曰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占松岳 以吾長子建爲其主 從之

時 李萱 起兵武珍州 乃聲言於衆 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赫居世後興 弁韓從之 

百濟開國 傳世六百 新羅與唐 合攻滅之 

今予雖不德 欲雪義慈之憤 遂都完山稱王 國號曰後百濟

5

弓裔 亦以明年稱王 謂曰 新羅請兵於唐 滅高句麗 是可恥也 

吾必爲高句麗報讐 立國號曰後高句麗 建元曰武泰 嘗南行 至興州寺

見壁掛新羅前王妓像 拔劒擊之 弓裔 意欲幷呑新羅 呼爲滅都 自新羅歸附者 幷皆殺之

自是弓裔 自稱彌勒佛 頭戴金憎 又自述經二十卷 或正坐講說

僧釋聰 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弓裔怒 以鐵椎打殺之

6

天授元年戊寅夏六月 王建 爲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等 

諸將軍之所推戴 黎明 坐於積穀之上 行君臣之禮 令人馳且呼 曰王公已擧義旗矣

奔走來赴者衆 先至宮門 鼓油以待者 亦萬餘人 遂卽位於布政殿 建元天授

於是 泰封王弓裔聞變 以微服出門亡去 尋爲斧壤民所害

7

契丹聖宗 遣將蕭遜寧 侵破蓬山 獲我先鋒

成宗文懿大王 會群臣議 或言乞降 或言割地與之

中軍徐熙獨 曰 今見其勢大盛 遽割西京以北與之 非計也

且三角山以北 亦高句麗舊址也 彼以谿壑之慾 責之無厭 可盡與乎

況今割地 則誠萬古之恥也 願駕還都城 使臣等一與之戰然後 議之未晩也

熙奉國書 赴契丹營 問相見之禮 

遜寧 曰我大朝貴人 宜拜於庭 熙 曰兩國大臣 何得如是 遜寧謂熙 

曰汝國 興新羅地 高句麗之地 我所有也 而汝侵蝕之 又與我連壤 

而越海事宋 故有今日之師 若割地以獻而修朝聘 可無事矣

熙曰 非也 我國 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則貴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若逐女眞 還我舊地

則敢不修聘 辭氣慷慨 遜寧 知不可强 遂決罷兵 宴慰以送 

8

都元帥尹瓘 攻罷女眞 立碑于先春嶺以爲界 遣子彦灑 奉表賀 

平章事崔弘嗣金景庸 參知政事任懿 樞密院事李瑋等

入對宣政殿 極論尹瓘吳延寵林彦等 妄興無名之兵 敗軍害國 罪不可赦

諫官金緣李載等 亦相繼劾之 曰人主之取土地

本欲育民也 今爭城而殺人 莫如還其地而息民 今不與 必與契丹生鄧

上 曰何也 緣 曰國家初築九城 


使告契丹 表稱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亦我編氓 

近來 寇邊不已 故收復而築其城 表辭如是 而弓漢里酋長 

多受契丹官職者 契丹以我爲妄言 以加責讓 我若東備女眞 

北備契丹 臣恐九城 非三韓之福也 諫議大夫金仁存 亦請還舊地

上宣諭 曰 兩元帥之伐女眞 受先帝之遺志 體朕躬之述事

身冒鋒鏑 深入賊壘 斬馘俘虜 不可勝計 而闢千里之地 築九州之城 

以雪國家之恥 則其功可謂多矣 然 女眞 人面獸心 反復無常 厥有餘醜

無所依處 故酋長 納降請和 群臣皆以爲便 朕亦不忍

有司守法 頗有論劾 遽奪其職 朕終不以此爲咎 庶幾有孟明之復濟也

睿宗文孝大王四年秋 撤九城 還女眞舊地

先是 女眞使沸弗史顯等 入朝奏 曰 昔 我太師盈歌 

嘗言我祖宗 出自大邦 至于子孫 義當歸附可也 今太師烏雅束 

亦以大邦 爲父母之國 至甲午年間 弓漢村人 自作不靖 本非太師之指揮

國朝 鳴罪討之 復許修故 我信之 不絶朝貢 去年大擧 殺我 佃倪 築置九城

使孑遺之民 靡所止歸 太師遣我來 請還地云云 又會宰樞 臺省 知製誥

侍臣 都兵馬判官及文武三品以上 更議還九城可否 皆曰可

舊史 云 兩將軍 立碑於先春嶺 曰至此爲高麗之境 

先春嶺 在豆滿江七百里外松花江近地云


9

廣州牧使尹彦灑 自解表 云

及睹中軍所奏 曰彦灑與鄭知常 結爲死黨 大小之事 實同商議 

在壬子年西幸時 請立元稱號 又諷誘國學生 奏前件事

蓋欲激大金 生事乘間 恣意處置 朋黨外人 謀爲不軌 非人臣意 臣讀過再三然後

心乃安肋 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祖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 以得爲之

大國 未嘗加兵 小國 無敢議其失 奈何聖世 反爲僭行

臣嘗議之 罪則然矣 若夫結爲死黨 激怒大金 語言雖甚大焉 本末不相坐

何則 假使强敵 來侵我疆 夫惟禦之未遑 安得乘間而用事 其指朋黨者 誰氏 

其欲處置者 何人 衆若不和 戰之則敗 且容身之無地 何恣意以爲謀 有賴聖知 

重念臣以至弱之質 從西征之役 忘身以衛其國 乃義分之當然

成事 皆因於人 何勤勞之足道

金史 曰世宗大定十五年九月 高麗西京留守趙位寵 

遣徐彦等進表 欲以慈悲嶺以西 鴨綠江以東內附 不許

高麗史 曰 睿宗十一年三月乙未朔 上聞遼來遠抱州二城 

爲女眞所攻 城中食盡 遣都兵馬錄事邵億 送米一千石 來遠統軍 辭不受

八月庚辰 金將撤喝 攻遼來遠抱州二城幾陷 其統軍耶律寧 欲帥衆而逃

上遣樞密院知奏事韓瀝如招諭 寧以無王旨辭

瀝如馳奏 上欲令樞密院 具箚子送之 宰臣諫官 奏曰彼求王旨 其意難測 請止之

上乃遣使如金 請曰抱州 本吾舊地 願以見遼 金主謂使者 曰爾其自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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厚庵李尊庇 高麗景孝王時人也 嘗在書筵 論自主富强之策 仍奏 曰 

本國 自桓檀朝鮮 北夫餘 高句麗以來 皆富强自主 且建元稱帝之事

至我太祖初 亦嘗行之 而今則事大之論 定爲國是 君臣上下 甘受屈辱 

不圖所以自新 其畏天保國則誠美矣 奈天下後世之笑 何 且與倭綠怨 

萬一元室有變 將焉所恃而爲國 稱帝之事 爲時忌諱 則固難卒復 而自强之策 不可不講也

奏雖寢 聞者 莫不庇之 後又陳備倭五事

一曰詳備戶口 悉民爲兵 二曰兵農一作 水陸共守 三曰積置兵糧 

修造戰艦 四曰擴張水軍 兼習陸操 五曰詳悉地理 確保人和

嘗有寄晦堂上人詩 曰

物無美惡終歸用 苦李誰嫌着子多 長息久朝天子所 次兒新付法王家

移忠固是爲臣分 割愛其如出世何 還笑老翁猶滯念 有時魂夢杳天涯

上在燕京 惑於蓮女 臨別 手贈蓮花一朶 曰上歸路 視此花若凋 此命將盡

數日後視花 花欲憔悴 上恐蓮女死 復欲如燕 尊庇 請往探而回

蓮女 泣而獻詩 曰

相贈蓮花香 初來綽約紅 移叢問幾日 憔悴與君同

尊庇 恐上見詩增懷 代蓮女而製進 曰 這癡漢這癡漢 勿留輦勿留輦

此身便如蓮葉珠 彼邊轉處此邊圓 上見詩大怒 遂還國 後 上恨蓮女不已 

尊庇乃奏 曰臣於伊時 急於奉還 不得已權辭 請伏欺罔之誅 上怒削官 謫文義 

太子及朝臣 反復啓解之 上亦悔悟 復官召還 使者未至 尊庇卒

訃聞 上震悼輟朝 太子臨喪 曰李尊庇正直 邦家司直 何夭如是乎

仍命葬用王禮 遂以荊江之上 環其山四里封之 至今洞曰王墓 里曰山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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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村李侍中嵒 嘗疏沮權臣輩 

欲廢國號而請立行省之議 其疏略 曰

天下之人 各以其國爲國 各以其俗爲俗

國界不可破也 民俗亦不可混也

況我國 自桓檀以來 皆稱天帝之子

行祭天之事 自與分封諸侯 元不相同

今雖一時爲人轅下 旣有魂精血肉 而得一源之祖

是乃神市開天 三韓管境之爲大名邦於天下萬世者也

我天授太祖 以創業之資 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平定宇內 國聲大振也

間有强隣 乘以作暴 幽營以東 尙未歸我 則此君臣 日夜奮振 

謀所以自主富强之策 敢有潛淸輩之大姦慝 逞能陰謀 

我國雖小 國號不可廢也 主勢雖弱 位號何其降也

今此之擧 皆奸小之輩之出於逋逃 

而非國人之公言也 宜請都堂 嚴治其罪

杏村侍中 有著書三種 其著檀君世紀 以明原始國家之體統 

又著太白眞訓 紹述桓檀相傳之道學心法 農桑輯要 乃經世實務之學也

文靖公李牧隱穡 序之 曰凡衣食之所由足 諡財之所由豊 

種蒔突息之所由周備者 莫不分門類聚 縷析燭照 實理生之良書也

杏村先生 嘗遊於天寶山 夜宿太素庵 有一居士曰素佺 

多藏奇古之書 乃與李茗范樟 同得神書 皆古桓檀傳授之眞訣也

其通脫博古之學 卓然有所可稱 而其參佺修戒之法

蓋凝性作慧 凝命作德 凝精作力 其在宇宙而三神長存 

其在人物而三眞不滅者 當與天下萬世之大精神 混然同其體 而生化無窮也

先生 曰道在天也 是爲三神 道在人也 是爲三眞

言其本則爲一而已 惟一之爲道 不二之爲法也

大哉桓雄 首出庶物 得道天源 立敎太白

神市開天之義 始大明於世矣 今吾輩 因文求道

參佺受戒 尊吾敎而未發 又聞百途而難會 老將及矣 可恨哉

先生 以侍中致仕 退居江都之紅杏村 

自號爲紅杏村璟 遂著杏村三書 藏于家

敬孝王後五年三月 杏村李欄 以命祭天于塹城壇 謂白文寶 曰

賴德護神 一存信念 養英衛國 功在發願 乃神依人 

人亦依神 而民而國 永得安康 祭天之誠 

竟歸報本 其求人世 敢可忽諸

12

鄭之祥 河東人也 因其妹 往來于元 値敬孝王入侍

隨從有勞 及王卽位 驟選至監察持平 不言昔事理

嘗爲全羅道按廉使入境 遇勢家所使 輒姪掠徇示諸郡 一道寒心


壇思不花 本國人也 在元有寵於順帝 其兄徐臣桂爲六宰 弟應呂爲上護軍 依勢作威福 國人畏之

不花 降香至本國 所至縱暴 存撫按廉 多被辱罵 莫不違臨 至全州

之祥 迎候恭謹 不花 待遇甚倨 伴接使洪元哲 有求於之祥

之祥不聽 元哲 激怒不花 曰之祥慢天使 不花縶縛之 之祥 忿恚大叫 夾州吏 曰

國家 已誅諸奇 不復事元 命宰相金敬直爲元帥 守鴨綠江 此使易制耳

若等 何畏而不我救 將見爾州 降爲小縣也

邑吏 呼油而入 解縛扶出 之祥 遂率衆 執不花元哲等 囚之

奪不花所佩之金牌 馳還京 過公州 執應呂以鐵椎垈之 數日而死

之祥 來白于王 王驚愕 下巡軍 命行省員外鄭暉 捕全州牧使崔英起及邑吏等 

又遣車蒲溫 齎內覓慰不花 還其牌 元遣斷事官買住 來鞠之祥

王誅諸奇 釋之祥 爲巡軍提控 再轉戶部侍郞 御史中丞 

官至判事卒 性嚴 凡戮死罪 必遣之 之祥妻 寡居潭陽 爲倭所害 子從隨朴糞 擊對馬島


13

文大 高宗安孝大王十八年 以郞將在瑞昌縣 爲蒙古兵所虜 

蒙古兵 至鐵山城下 令文大 呼喩州人 曰眞蒙古兵來矣

可速出降 文大 乃呼 曰假蒙古兵也 且勿降 蒙古人 欲斬之

使更呼 復如前 遂斬之 蒙古 攻城甚急 城中糧盡 不克守 

將陷 判官李希績 聚城中婦女小兒 納倉中火之 率丁壯 自刎而死

敬孝王十二年癸卯三月 密直使李岡 以命祭塹城壇 仍刻板題詩 其詩 曰

春風景物富年華 承命來遊道路賖 鞭馹朝辭丹鳳闕 棹舟暮癲白鷗波

半空蒼翠山浮色 滿壑蕩孟草自花 借問蓬萊何處是 人言此地卽仙家

心靜身閒骨欲仙 遙思人事正茫然 薦汗秘席中興後 累石靈壇太古前

已得眼看千里地 況疑身在九重天 此行無凡如相托 須値還都第一年

江陵王禑五年三月辛未 命遣使致祭于塹城壇 大提學權近 製誓告文以進 其文曰

初獻 海上山高 逈隔人豈之煩擾 壇中天近 可邀仙馭之降臨 薄奠斯陳 明神如在

二獻 神聽不惑 庇撚斯人 天覆無私 照臨下土 事之以禮 感而遂通 竊念 摩利

檀君攸祀 自聖祖 爲民立極 彭纘舊而垂休 芳後王 避狄遷都 亦賴玆而保本

故 我家守之不墜 而朕小子 承之益虔 天何外寇之狗偸 而以致我民之魚爛

雖遠疆之受侮 尙許表聞 況厥邑之被侵 胡然忍視

其明威之不驗 寔否德之無良 實難求他 惟在自責 然 人若不安其業

則神將無所於歸 玆因舊典之遵 敢告當時之患 卑泡款款 寶鑑明明

致令海不揚波 丕享梯航之幅湊 天其申命 光膺社稷之安磐

14

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 敬孝王五年 是歲夏四月丁酉

奇轍權謙盧9等 謀叛伏誅 釋鄭之祥 爲巡軍提控 罷征東行省理問所

時 元室 極爲衰弊 吳王張士誠 起於江蘇 事多騷亂矣 崔瑩等 

及自高郵歸 上始從瑩等議 遂定西北恢收之計 先罷征東行省

繼遣印琁崔瑩等諸將 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 

又遣柳仁雨貢天甫金元鳳等 收復雙城等地


十年冬十月 紅頭賊潘誠沙劉朱元璋等 十萬餘衆 渡鴨綠江寇朔州

十一年 賊襲安州 上將軍李蔭趙天柱死之

十二月 上至福州 以鄭世雲爲總兵官 世雲 性忠淸 自播遷以來 

日夜憂憤 以掃俔紅賊 恢復京城爲己任 上亦倚信

世雲屢請 吻下哀痛之詔 以慰民心 遣使諸道 以督徵兵

上遂下詔 守門下侍中李欄 傳曰天下安 注意相 天下亂 注意將

余文臣 懦不能軍 子其勉之 世雲 詣都堂 憤言揚聲

謂柳淑以簽軍後期爲責 將行 欄謂世雲 曰

今强寇猝至 皇城失守 乘輿播遷 爲天下之笑 三韓之恥

而公 首唱大義 仗鉞行師 社稷之再安 王業之中興 在此一擧 

吾君臣 日夜望公之凱旋也 獎諭遣之 每日督勵諸將倡義

出謀授計 安祐李珣改名希泌 李欄從侄韓方信等諸將 皆從之有功


二十年辛亥二月甲戌 女眞千戶李豆蘭帖木兒

遣百戶甫介 以一百戶來投

閏三月己未 北元遼陽省平章事劉益 王右丞等 

以遼陽本高麗地 欲歸附我國 遣人來請 時廷議不一 國事多難

然 上遣鄭夢周如明 賀平蜀 金義 殺明使蔡斌 朝野騷然 其欲言事者 幾希

以故 未卽回報 劉益等 遂以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等地 歸附于明

嗚呼 當時淸論 徒因循是務 自失好機 竟不恢收舊疆 志士之恨 於斯爲深矣

江陵王 以先帝命卽位 時 遼東都司 遣承差李思敬等 到鴨綠江 張榜 曰

鐵嶺悚北悚東悚西 元屬開元 所管軍人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云云

朝議紛紛不一 竟以督戰決定 大發中外兵馬 以崔瑩爲八道都統使


太白逸史跋

歲甲子 余謫槐山 處宜謹愼 頗爲無聊

乃取閱家藏陳敎 其有可據於史傳者 與夫平日聞諸古老者 幷擧採錄而未成書

後一十六年庚辰 余以撰修官 頗得內閣秘書而讀之 乃按前稿而編次之 名曰太白逸史 然

敢不聞於世 秘藏之 爲不出戶外者

一十堂主人 書


桓檀古記終


자료출처


환단고기 원전강독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윤창열교수님

https://www.youtube.com/watch?v=S0yEU3qzMb4

https://www.youtube.com/watch?v=tIxbOMaDrYw

https://www.youtube.com/watch?v=RbQdWHlM2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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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2buhTWSNJ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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