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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Jul 18. 2022

[인간 증발] 보이지 않는 인간을 찾아서

다큐멘터리는 진실로 진실한가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으며, 현실을 진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끝없이 이어져 온 논쟁이다. 카메라는 현실을 그대로 복제해 내지만, 결국 복제판일 뿐이며 감독의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는 현실의 사본일 뿐이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영화 그 자체가 재현이 아닌 사적인 사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의 또 다른 일부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영화사에서 영화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은 여러 작품을 통해 고찰되어 왔고,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간 증발>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간 증발> 은 다큐멘터리적 형식을 띄고 있는 극영화다. 공간 뒤에 몰래 카메라처럼 숨어 있는 카메라는 전형적인 관음증적인 시선과 구도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관음증적 시선은 인물이 내뱉는 대사들이 마치 은밀한 내적 비밀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초로의 노인인 오시마의 할머니를 잡아 줄 때 카메라는 정면에서 존재하면서 그녀의 숨김없고 1차원적인 감정을 드러내지만, 오시에와 언니를 잡아 줄 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오시에의 존재와 눈을 가리면서 그녀의 읽을 수 없는 심리를 드러낸다. 


 답답한 구도와 얼굴이 가려진 화면, 입이 맞지 않는 소리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에 대한 순간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진실에 가장 가까우며 어떤 개인적인 감정의 손길도 닿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과 구도에 극영화적 연출이나 편집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영상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항상 '다큐멘터리가 정말로 진실한가?'라는 물음이 따라오게 된다. 인간의 눈을 초월한 , 완벽한 눈이라는 키노아이로 바라본 세계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심이 싹트는 순간, 화면 속 인물들은 오시마와 관련되지 않은 사적인 기억과 감정들을 진술하기 시작한다.      


 오시에와 언니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자매 사이가 나쁘다.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언니는 항상 학대당하듯 움츠린다. 동생에게 빼앗기며 살기만 하던 그녀는 동생의 남자를 빼앗았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영화는 한순간에 뒤집어지면서 추적에서 진실 공방으로까지 이어진다. 마치 오시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오시마에 대한 진술은 잊혀지고, 두 자매의 관계성과 진실에 카메라가 기울어진다. 





카메라가 프레임을 옮기자, 영화는 오시마의 실종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에서 치정 드라마가 된다. 그것은 카메라가 가진 권력이자 힘이다. 무엇을 보여 줄지를 재단해 프레임 속에 넣고 비추어 주면서,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권력을 가진 카메라가 비추어 주는 것을 ”현실적“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지를 의문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현실에 가닿고 싶어 하는 카메라는 인간이 가진 기록과 재현의 욕망이지만, 카메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으며 감독의 손에 의해 특정한 것을 비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권력적이며 현실적이지 못하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현대인에게 관계가 불능하듯, 카메라를 통해 현실을 투명하게 담아내는 일 또한 불능할 뿐임을 고백한다. 인간이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애써도 가까워 질 수 없듯, 카메라 또한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애쓸수록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라고.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이 등장해 말한다. 이 모든 것은 허구일 뿐이며 극 영화라고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며 애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늘고 푸른 선>은 1976년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랜달 데일 애덤스Randall Dale Adams라는 남자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심지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10년 넘게 복역을 하던 그를 에롤 모리스가 의문을 품고 접근하여 진범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다.


 애롤 모리스는 <가늘고 푸른 선>에서 참여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기본 틀로 취했는데, 다양한 설명들을 단일한 스토리 안에 묶어 내기 위해 인터뷰를 이용했으며, 그 인터뷰와 몇 개의 자료들을 통해 자신의 시선을 다큐멘터리 안에 고스란히 녹여 내고, 영화 안에서 적극적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마치 진실처럼 주장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본다”는 것은 객관적인 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황색 옷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라는 인터뷰이의 대사를 들은 순간 관객은 “목격자, 증인들이 주장하는 진실한 증언은 상황에 따라, 이익에 따라, 가로등 밑의 작은 조명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도 있는 허구의 것이다.” 라는 사실을 강하게 인지하게 되며 관객은 모든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늘고 푸른 선> 마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다큐멘터리 같지만 사실 모두 개개인이 다분히 개인적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주장을 펼치고 있을 따름이다. 


하물며 사건을 전부 뒤집고 해리슨을 무죄로 만들어진 애롤 모리스 또한 그 자신의 주관, “해리슨은 무죄일 것이다.”라는 의견에 의지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것이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않은가를 떠나, <가늘고 푸른 선>은 한 개인의 주관적 주장을 타인이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여정일 따름이다. 영화 <라쇼몽>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전부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만, 스스로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증언한다. 완벽하게 꾸며낸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온전한 진실도 아니며,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왜곡된 진실을 거침없이 보여 준다. 인간이란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자신의 눈을 통해 지극히 사적이고 왜곡된 진실만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영화의 차이는 오직 다큐멘터리적인 형식을 취했는가, 극영화의 형식을 취했는가 뿐이다.

   

 이 영화들은 <인간 증발>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부합한다.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말이 실제와 가까운가? 

진실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현실은 경험되는 순간 사적인 기억이 되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와 언어로 구현될 따름이다. 누구도 진실의 행방을 알 수 없고, 바로 그 순간이 지나면 과거의 경험적 기억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진실을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진실이 존재 하는가 조차도 신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의 부동성에서 해방 시킨다.” 라는 키노-아이는 어떨까. 정말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초월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간 증발>을 극영화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사실 모든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고, 카메라는 프레임이라는 선으로 시선의 권력을 쥐고 있으며, 감독은 끝없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마무라 쇼헤이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는 엄청난 차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연출하고, 담아 내고, 편집의 과정이 들어간 이상 누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구분할 수 있는가. 이마무라 쇼헤이가 등장해 모든 것은 극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모습은 마치 고다르가 <사랑과 경멸>에서 극영화의 디제시스를 깨고 촬영기와 조명기를 보여 준 순간과 같다. 고다르는 영화의 본질이 결국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이마무라 쇼헤이는 현실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고 믿어지는 다큐멘터리와 현실의 간극을 보여 주었다.     

 








<인간 증발>은 다큐멘터리와 현실, 영화의 진실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내내 현대인의 관계적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도 하다. 카메라와 현실의 관계가 불능하듯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내내 불능할 뿐이다. 약혼녀인 오시에는 오시마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이고,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급작스럽게 스게를 사랑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오시마보다 더 조건이 좋은 남자를 두고 저울질을 하기도 한다. 오시마는 어른들에게는 성실한 청년이었지만 동료들에겐 소심하고 일머리 없는 남자였을 뿐이고, 금전감각이 부족했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못했다. 초로의 노모는 오시마가 철없이 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사라져버린 오시마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영화의 어떤 인물도 오시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그다지 낯설거나 두렵지 않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 자체가 그런 까닭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거나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인물들 사이에서 오시마는 이름 하나로도 타인의 평가 안에서 산산히 조각나고 재조립된다. 영화에는 오시마의 형체조차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시마를 구성하는 인간의 언어들이 오시마를 수없이 재창조한다. 오시마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말은 마치 모두 다른 사람을 이야기한 것만 같고 오시마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기보다, 타인의 눈으로 찢어 이어 붙인 콜라주나 퍼즐 같아 보인다. 


그리고 결국, 오시마의 조각난 존재성은 우리 자신의 존재성이기도 하다. 사회 안에서 인간은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 된 채로 떠다닐 뿐이며, 존재 자체가 증발된 채로 누군가의 언어 안에서만 유령처럼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오시마의 증발은 물리적 존재의 증발일 뿐만 아니라 오래전 증발한 인간의 정체성이다. ”나” 라는 자아가 사라지면서 온전한 한 조각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이렇게 증발할 수밖에 없다. 오시마는 물리적 존재가 증발하기 전부터 이미 사회 안에서 증발해 버린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영화 <셰임>에서 브랜든이 정서적 관계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처럼,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헐리우드 영화의 심령체 같은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살과 뼈가 있고, 섬유질과 체액으로 이루어진 실체를 지닌 인간이다.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 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자신을 상실하고 살아간 지 오래 되었다. 오시마와 다르지 않게,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선 속에서 파편화 된 채로 투명하게 사라져 간다.


이러한 존재적 상실은 육체적 관계에 대한 집착하는 오시마가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녔던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더 이상 정신적인 감정의 교감을 나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순간의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만 타인과 접촉할 수 있게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이토록 외롭고 방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시에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시마를 만나면서도 조건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나기도 했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스게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하지를 확신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 질 따름이다. 사랑이 아닌 조건으로 남자를 고르는 오시에도, 오시마도 본질로써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토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말은 공허하고 침묵은 어두워서 의미 없는 몸짓과 말로 소통을 시도해 보아도 제자리에서 허둥대고 있을 뿐이고, 진실된 관계는 무겁고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가볍기를 원하고, 아무 것도 아니기를 원하면서 외로움에 몸부림 칠 수밖에 없다. 무너지는 내부를 견디지 못해 물리적 증발을 택한 오시마, 사랑조차도 상황을 위한 핑계로 여길 뿐인 오시에는 소통을 포기한 인물들이며 현대인의 자회상이다. 절망에 빠져 어디론가 도피하고 있으며,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만 대화를 해 본 적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내게도 존재하는 일부분이다.


 그래서 오시마는 어떠한 인물이 아니라 현대인의 거울과 다름없는 존재다. 그 틀 안에 누구를 넣어도 낯설지 않을, 틀리지 않을 것만 같은 파편의 집합체다. 감독은 끝까지 오시마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한 인간의 실종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적 영화라면 몽타주나 사진 따위가 반복되어 나오기 마련인데, <인간 증발>은 오시마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증언할 뿐, 오시마를 누구라고 특정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시마는 얼굴이 없는 인간이고, 그래서 누구나가 될 수 있다. 


 나는 오시마가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실종되어 버린 특별하게 불가해한 누군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물리적 존재가 사라지면 나의 존재가 곧 오시마가 될 것이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나는 오시마의 직장동료가 될 것이고, 내 연인이 사라진다면 오시에가, 혹은 오시마가 만나고 다녔던 여자들이 될 것이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오시마는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나가 된다. 영화의 제목이 <오시마를 찾아서>가 아니라 <인간 증발> 인 이유는, 오시마로 상징되는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인간 사이의 관계가 매 순간 증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 증발>은 영화라는 매체의 진실성, 카메라의 시선이 정말 인간의 눈을 초월한 것인지, 프레임 너머의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혹은 영화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함께 현대인이 느끼는 관계의 공허함, 존재와 자아의 상실, 나아가 물리적으로까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을 통해 현대 사회가 가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처절한 단절을 마모시켜 뭉툭하게 내리누른다.



확실히 달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공기가 내게는 너무 진하다.
이곳의 중력이 내게는 너무 무겁다.

/댄스댄스댄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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