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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20. 2021

[악마를 보았다] 거울 속에서 발견한 악마

소원했던 복수의 끝은 어디일까




 김지운 감독은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가장 애정하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이병헌의 고전문학 같은 얼굴을 필두로  그의 미학에 깊게 몰두하고는 했다. <악마를 보았다>또한 김지운의 수작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데, 개봉 당시 나는 미성년자였기에 한국 영화에 없을 잔혹한 영화였다는 평가만 어렴풋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엔 <악마를 보았다>보다 잔인한 영화가 넘치고 넘치게 됐고, 영화를 보며 눈도 못 뜨게 잔인하다는 감상은 받지 못했으나 사실 이 영화의 잔혹성은 행위보다는 감정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스토리야 크게 어려울 것 없다. 연쇄 살인마 장경철에 의해 약혼녀를 잃은 김수현이 핏빛 복수를 저지르고 끝내 살인마를 살인하는 악마로 마무리되는 내용이다. 김수현이 장경철을 추적하여 복수하는 과정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잔인한데, 두 시간 내내 유혈 낭자하거나 성적인 자극이 들어있지 않은 시퀀스가 없을 지경이다. 수현의 행동은 갈수록 자제력을 잃고 반복할수록 수위가 올라가며 나중 가선 그 자극에 무던해질 만큼 지독해진다. 장경철보다 더한 방식으로 장경철을 고문하는 수현을 보다보면 나마저도 이성을 잃는 것만 같다. 제목의 이중성은 이곳에 있다. 악마를 보았다. 그 악마는 여성을 납치해 성범죄를 저지르고 살해한 장경철인가, 장경철의 팔을 부러뜨리고 다리를 망가뜨리고 나중엔 그의 자식과 부모가 보는 앞에서 참수당하게 한 수현인가.




 수현의 행위에는 정당성은 있으나, 목적과 결과가 없다. 복수라는 단어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걸까? 죽은 약혼녀가 당한 고통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 아니면 그보다 더한 육체적 고통이나 공포를 주는 것? 그 주관적인 감정과 고통을 그대로 돌려줄 수는 있는건지, 그렇다 해도 그게 정당한지, 그렇게 장경철을 죽인다고 죽은 연인이 살아 돌아오기나 하는지 의문하게 된다. 수현은 자신의 커리어와 인생을 전부 희생해 저 나름대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 정상인인 수현의 생각으론 가장 잔인한 방식인 가족을 이용해서 살해하긴 했으나 장경철에게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긴 할지가 의문이다. 애초에 자식도 엄마도 버리고 살인이나 저지르고 다니는 살인마가 가족 앞에서 죽는다고 더 비참함을 느낄까? 문 열지 말라고 소리지른 장경철은 죽기 싫어서 비명을 지른 것일 뿐, 모친과 자식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기 싫어서는 아닌 듯하다.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장경철에게 수현의 행동이 의미를 가지기는 할까 싶어진다. 수현은 제 인생의 모든걸 걸었는데 장경철은 그냥 수현의 손에 사형 판결을 당한게 끝이다. 허무하고, 공허하다.





그래서 수현은 복수를 마치고 나오는 새벽, 서럽게 우는 듯 웃는 듯하다. 우는지 웃는지는 몰라도 해가 뜨기 전 가장 춥고 새파란 시간에 그의 인생이 영원히 멈춰버린 건 명확한 듯하다. 이제 수현의 인생에 해가 떠오를 날은 없고, 다시 따뜻해질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장경철을 죽인다는 일념은 이루어 냈으나 수현에겐 텅 빈 마음과 손만 남았을 뿐이다. 약혼자의 복수를 했다는 쾌감도 없고, 장경철이 과연 약혼자만큼 공포와 고통에 질려 죽은지는 평생 알 수 없으며, 인간성마저 잃어버렸다. 장경철의 마지막 말대로 김수현이 졌다. 그는 괴물을 잡으려다가 심연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다가 저 스스로도 괴물이 되고 말았다. 장경철이 죽어버렸으니 수현의 가슴 안에 남아있는 분노도 갈 길을 잃어버렸고 이제 원망할 것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 김수현의 인생은 여생에 불과하다.




 왜 우리는 범죄자를 향한 개인적인 복수를 지양할까? 거기엔 사회적 약속, 준법 주의, 인권 등의 여러 이유가 복잡하게 섞여있겠지만 일차원적인 인간의 감정으로 본다면 너무도 부당하다. 왜 세상에서 가장 존엄하고 우주에 단 하나뿐인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놈의 인권을 지켜줘야 하고, 때려서도 안되고 고통을 줘서도 안된다는 건가. 거기에 부당함을 느끼고 직접 해결한 수현을 보고 있자면 한 때는 죽어도 싼 범죄자가 당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지만 마지막엔 수현과 같이 허망할 뿐이란 걸 깨닫는다. 엄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영화를 보고 통쾌함을 느끼기는 힘들듯 하다.



 직접적으로 저지르는 복수는 누군가 한 번쯤 상상해보는 일이지만, 과연 그게 나의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해보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복수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런 개새끼가 세상에 있고 내 가족에게 손을 댔다면 나라도 쫓아가서 죽여버리거나 처벌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래서 처음 영화의 엔딩을 봤을 때 수현이 울면서 “웃는” 이유는 어쨌든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슬프고 허망한 동시에 복수의 기쁨도 일부 존재할 거란 감상이었다. 그러나 다시 영화를 보자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 찾아왔다. 더 이상 수현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얼굴에 가득한 것은 슬픔, 비참함, 절망, 고통이었다. 어디에서도 복수했다는 안도감이나 웃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복수를 완성해서 웃는다기 보단 모든 게 다 끝나고 말았다는 허탈함에 터지는 자조같기만 했다. 수현이 한없이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그가 약혼자를 잃어서 불쌍한 게 아니라 복수를 완성함으로써 악마가 되어버려서, 그래서 다시는 인간의 삶을 살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게 너무도 가여웠다. 나는 거기에서 진짜 악마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악마를.




 


나 또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수현의 행동을 쉽게 합리화했고 그가 옳은 행동을 한다고 느꼈다. 장경철에게 과도한 고통을 주는 것을 보면서 좀 과한가? 싶다가도 장경철의 악마같은 행동을 보며 더한 고통을 받아도 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같은 처벌에 분노하는 사회에서 수현의 행동은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를 보았다>는 상당히 불쾌하고 찝찝한 영화다. 복수라는 소재로 마치 영화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줄 것처럼 굴다가 결말에는 현실적인 절망을 느끼게 만들며,  2시간 내내 통쾌한 복수를 원하고 수현의 잔혹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경철의 고통을 합리화 한 관객에게 되묻는다. 과연 이게 옳은가. 정말 합리적인 행동인가. 이런 복수를 통해 당신이 원하는 결말을 얻었는가.



 그래서 영화를  후에 거울을 보면 그런 잔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고. 거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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