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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20. 2021

[D.P] 너희 방관자들에게 나는 묻는다

넷플릭스 D.P, 부조리를 바라보는 시선



 군대는 한국 사회에서 참 뗄 래야 뗄 수가 없는 단어다. 20대 초반을 넘어가면 어디를 가도 군대 얘기가 빠지지를 않는다. 선배의 군대 신화를 필두로 동기의 군대 얘기, 애인의 군대 썰, 후배의 군대 애환 따위를 참 선명하게 느껴서 나조차도 군대에 10번 즈음 다녀온 기분이 들 지경이다. 내가 속했던 학교도 군대문화에 찌든 곳이었기에 현실감은 배가 된다. 얼굴도 모르는 놈들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히고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소리 높여 인사하지 않으면 재수없고 싸가지 없다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하는 거지같은 군대 문화가 가득한 곳에서 4년를 깁스하고 뻐겼다. 말도 안되는 부조리 앞에 무릎 꿇기 싫었던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군대의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 <폭력의 씨앗> 이나 군대 다큐멘터리 박경근의 <군대> 따위를 감상하며 느낀 감정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였다. 폭력을 당하는 것도, 그 폭력을 물려받아 그대로 후대에 전하는 것도 모두 군대 안의 악습이다. 그걸 사회에 나와서까지도 버리지 못해서 학교를 군대 문화로 물들이는걸 보고 거 참 한심한 족속들이라 생각했다. 피해자였기에 다시 가해자가 된다는건 현대 사회에서 금지하는 행위다. 군대는 뭐 별나라인가? 어떻게 자신도 피해자였단 사실을 면죄부 삼으려 드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에 도무지 공감되지 않았다.




 그러나<D.P>는 조금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결국 가해자도 피해를 당했었기에 가해자가 된거야! 모든건 군대 내부의 부조리 때문이고! 나는 죄가 없어! 나도 처음엔 착했는데 군대 내에서 물든거란 말이야!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방관자들에게 카메라의 시선을 돌린다.


 주인공인 안준호와 한호열은 그냥 평범하게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같다. 불쌍한 사연을 가진 탈영병을 풀어주기도 하고, 후임을 직접적으로 때리지 않고, 안준호가 갈굼을 당할 때 한호열이 나타나 안준호를 구해주기도 한다. 대충 창고 안에서 때리는 척 연기를 하면서 후임을 갈구고 싶어하는 상병들의 기분을 맞춰준 것이다. 두 사람의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소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들의 유희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한 편, 그 추운 날에 밖에서 주먹으로 배를 얻어맞은 채로 멍하니 서있는 일병의 모습 또한 길게 담아 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D.P> 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함축한 장면이었다. 그런대로 "착해" 보였던 너희도 결국 전부 방관자에 불과하다고 콕 찝어 명확하게 이야기해준다. 한호열이 거기서 했어야 하는 일은 저와 친한 안준호만 쏙 빼내 보호해주는게 아니라, "후임들 괴롭히지 말라" 는 말을 하는거였다. 더는 이런 부조리함과 악습을 계속하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그 춥디 추운 겨울날 자는 애들을 끌고 나와 괴롭히고 때리지 말라고, 손을 밟고 폭력을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한호열은 편한 방식을 택한다. 구해줬으니 방관자는 아니었다고 위로할 수 있고, 누군가의 비위를 거스르지도 않는 방식을. 이런 방관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군대를 완성했다.


 그 때 한호열이 말했다면 뭐가 달라졌겠느냐, 안준호와 한호열도 갈굼당했을거다 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드라마를 잘못 본게 분명하다. 그런 비겁한 외면이 있었기에 1953년부터 지금까지 수통 하나 바뀌지 못했다. 모두가 말을 했어야 한다. 입을 열어서 하지말라, 라고 소리쳤어야 했다. 그 말을 해야 하는건 약자인 피해자가 아니라, 한호열같은 사람들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서 석봉 씨는 한호열에게 말한다. 그럼 "내가 당할 때 왜 보고만 있었냐?" 고. 자살한 군인의 누나도 안준호에게 묻는다. "그런데 왜 보고만 있었어요?" 라고. 드라마는 명확하게 다수의 방관자들을 향해 몇 번이고 되물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군대가 힘들고, 거지같고, 부조리하다고 화를 내면서 왜 다들 군대에 있을 땐 입닥치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었느냐고.


 1년 반 동안 강제 복무하게 만드는 군대가 잘못된게 아니다. 1953년부터 아무 것도 바꾸려 들지 않은 비겁자들이 문제인거다. 혹자는 윗선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욕한다. 당연한거 아닌가. 본인도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지려 하지 않았고, 폭력과 권력 앞에 무릎 꿇고 묵인했으면서 어딘가에서 배트맨과 슈퍼맨이 나타나 모두를 해방해 줄 것이라 믿는 건가. 본인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D.P>의 엔딩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상관의 말을 거부하고 반대로 걸어가는 안준호의 뒷모습에서, 카메라를 명확히 응시하는 얼굴로 끝을 맺는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카메라(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배우가 카메라를 바라보면 극의 몰입과 제 4의 벽이 깨지며 발견되었다는 당혹감을 낳는다. 카메라의 바깥에서, 즉 온전히 안전한 공간에서 폭력을 바라보던 관객이 안전한 공간을 침범당하며 그들의 폭력을 방관하며 즐긴 것에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이는 퍼니게임에서도 사용된 방식이다.)


 <D.P>는 이런 방식을 온전히 차용하여 극의 마지막에 관객을 명확하게 바라본다. 안전한 공간에서 이 부조리와 폭력을 잘 즐겼느냐 물으며, 이 작품을 본 나마저도 이 드라마에서 내내 욕해온 방관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아주 적확하고 명확하게.




 황장수같은 나쁜 놈은 참 사회 어딜가나 있다. 알량한 권력이라도 쥐면 뭐든 해도 된다 여기는 안하무인의 인간들. 내가 학교에 다녔을 때도 그런 놈들이 많았다. 하다못해 선배한테 인사를 잘 안한다며 갑자기 아침부터 집합 따위가 걸리기도 했다. 그런 곳이었다. 썩고 썩어 도저히 달라지지가 않을거라고 생각해 모두가 체념하고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곳. 이듬 해, 방관자가 아닌 사람이 대표가 됐다. 그리고 그 해의 신입생들은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하고 90도로 앉아 버스에서 강제로 장기자랑을 하고 공포에 떠는 대신 잠을 자며 OT에 갈 수 있었고, 편한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술을 덜 마실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달리 무척이나 정의로운 세상의 영웅이 아니라. 다만 누군가가 입을 열기 시작했기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회는 참 부당한 일이 많다. 부조리하고 화나는 일도, 먹고 살기 위해 참아야 하는 일도 넘쳐난다. 그런데 나 하나 편히 살자고 참고 넘기면 제 2, 제 3의 석봉 씨가 계속해서 사라져 갈 것이다. 누군가의 꿈을 이루어 주고, 좋은 작품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석봉 씨가 죽어간다. 나로 인해. 입을 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래서 <D.P> 단순히 부조리를 고발하는게 아니라 그 부조리를 만들어내고 세습하는 사람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건 가해자가 아니라 우리다. 가해를 하지도, 피해를 하지도 않고 난 착한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절대 다수. 그러나 귀찮음에, 두려움에 입을 열지 않은 평범한 비겁자들. 1953년부터 이어져 온 겁쟁이들에게 묻는다. "왜 보고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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