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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Nov 09. 2023

[메이드 인 제인]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류최초 AI 살인 사건, 메이드 인 제인 연극 후기

"살인"이라는 범죄는 꽤나 흥미로운 주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아무런 이득도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단점만이 존재하는 살생을 저지른다. 내가 굶지 않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범죄, 살인. 나와 같은 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본능이라 보아도 무방한데, 왜 사람은 같은 종을 살해할까.

수많은 범죄의 케이스가 있지만, 대다수의 살인은 면식범에 의해 일어난다. 1994년부터 2021년까지 살인범 중 면식범이 아닌 비율은 고작 평균 19.7%. 여남은 살인은 가족, 친구, 연인 등에 의해서 벌어졌다. 원인은 대다수가 분노에 의해서다. 상대가 나에게 욕설과 모욕을 해서, 바람을 피워서, 혹은 나를 위협해서. 게다가 사이코패스들이 살인을 저지를 거라는 편견과 다르게, 살인범이 신체, 정신 장애가 없는 정상인이 경우는 전체의 84.7%를 차치한다. 대다수의 살인범이 어떤 정신적 질환도 없이 멀쩡한 상태로 상대를 살해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살인은 그 어떤 범죄보다도 감정적인 범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행했던 그 감정의 범죄를 AI 역시 저지르고 만다.


연극, [메이드 인 제인]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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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고자 애썼다. 사람처럼 생기고, 사고하고, 감정을 가진 무언가를 구현화하고 싶어 했고, 신처럼 피조물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지금까지도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늘 그들을 두려워했다. AI가 사고를 하고,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면 그들이 창조자를 살해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 그 감정을 바탕으로 수많은 창작물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바벨탑에 오르고 싶어 했던 인간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수많은 신화들, 그리고 작고 귀엽게는 스폰지밥의 "마술연필'에피소드에서까지 엿볼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런 근원적인 공포에도 불구하고 창조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내 끊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제인은 그런 욕망을 구체화한 인물이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AI를 만들고, 실패하면 폐기하고, 또다시 만든다. 그리고 실패과 폐기가 거듭되던 어느 날, 그녀는 '요한'을 만들어 낸다. 오로지 제인만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 그리고 마치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듯, '요한' 역시도 창조자인 제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행복했었다. 오랜 시간 그럴 것만 같았다.


다만, 제인이 간과한 것은 자신이 만든 요한이 너무도 인간 같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제인으로 하여금 요한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AI 제1원칙, 로봇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라는 공식을 깨뜨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요한이었다. 제1원칙이 성립하기 위해선 로봇에게 감정이 없어야만 하는데, 요한에겐 그 감정이 존재하였던 까닭에. 너무도 잘 만들어지고 만 피조물은 창조자에 대한, 그리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인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자신의 창조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인간만이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감정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제인은 자신이 만든 요한에 손에 살해당한다.


가장 인간다운 AI를 만들어 내고 싶어 했던 제인.

죽어 가던 제인은 그때 요한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어 했던 우리는,

누구보다 인간다운 범죄를 저지른 AI를 실패작이라고 부를 것인가, 성공작이라고 부를 것인가.


[메이드 인 제인]은 그 답을 묻는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무료한 생활 가운데, 작년에 놓친 연극을 올해는 꼭 봐야지 하면서도 회사 일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다가 극이 내리기 전 마지막 기차를 잡아 탔다. 대학로는 거의 3년 만이던가. 같은 극단에서 올렸던 [겟팅아웃] 이후로 처음이니 꽤 오래도 되었다. 벌써 길거리와 카페에 캐롤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11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극인지라 시작 전부터 연말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포근한 예수의 탄생일을 배경으로, 인류 최초 AI 살인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메이드 인 제인]은 극 속에서 많은 질문과 고민거리를 던진다.


로봇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만약 감정을 느낀다면, 그걸 인간이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기억인가, 아니면 존재 그 자체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창조자라고 생각하는 신을 애정하고 증오하듯, 인간이 창조자가 된다면 피조물 역시 인간을 애증할 것인가.


근미래, AI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사랑을 다룬 작품은 일면 'her'이나 스필버그의 'AI'가 떠오르기도 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운 감정 톤과 말투, 과장되지 않은 몸짓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훌륭해서 극에 완전히 몰입하게 됐다. '요한' 역을 맡은 정수현 배우는 극의 절반을 정말로 울면서 연기하는데, 그 진정성이 와닿아서 나까지 '요한'의 감정에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사랑했고, 사랑해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과 상실감이 가슴 깊이 녹아들었다. 사실 배우에 대한 정보는 한 명밖에 모르고 갔는데, 가서 만난 배우 모두가 너무 대단하고 훌륭해서 집에 가는 길에 한 명 한 명 이름을 찾아볼 정도였다. 그 연기력 덕에 1시간 40분 가량 되는 긴 호흡의 극이었지만 숨도 못 쉬고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연극에 대해 잘 알거나 많이 본 편은 아니지만, 무대에서 만나게 된 [메이드 인 제인]은 내가 본 연극 중에선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스토리와 연기는 물론이고 무대의 조명이나 영상, 효과도 무척 신경을 기울인 티가 났고, 음악 역시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어 몰입을 더했다. 더불어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중간중간 형사와 이삭의 티키타카, 그리고 재치 있는 대사와 연기로 웃음을 더해 한 번씩 숨을 돌릴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게다가 작품의 캐릭터들 하나하나에 사랑스러움이 입혀져 있어서 감독이 캐릭터를 만들 때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가 느껴졌다.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만나게 돼서 그런지, 집에 가는 긴 길이 행복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시간이 있다면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의 좋은 공연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이제 또 일하러 가야지...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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