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어떤 슬픔은 배워야만 한다.

by 유유월



세상엔 슬픔이 너무 많다.

지나치게 많아서, 나는 이미 이토록 슬픈데, 현존하는 모든 슬픔을 다 알 수가 없다.


나는 빌어먹을 회사를 다니는 고통은 알아도

지독한 가난의 곪음은 모르고,


혈육을 잃은 슬픔은 알아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 녹는 괴로움은 모르고,


이별의 허무함은 알아도

애인을 떠나보낸 상실은 모르고


몸이 아픈 서러움은 알아도

영구한 손상을 입은 이의 결핍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이보다 세세하게, 채 명명될 수도 없는 슬픔이 무수히 많아,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그러니까 이 지구를 구성하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런 슬픔에 대한 얘기다.



이 책에서 가장 가슴에 남은 이야기는 폭력의 감수성에 대한 파트였다.


작가는 모 가수가 낸 “제제”라는 노래 가사에 대해 처음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짧게 말하자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온 주인공 ‘제제’를 이중적인 감정을 가진 아이로 묘사하며 ‘교활해, 어딘가 더러워‘라고 표현한 곡이다. 문제는, 이 주인공 제제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아동학대의 피해자이며,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아동학대를 겪어 본 적 없고, 그 상처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작가로서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아동학대 피해자를 멘토링한 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 학생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해 알았다면 그런 노래는 쓰지 않았을 거예요.’


작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 아이들이 상처받았기 때문에 꼭 다정하고 따뜻한 노래만 만들어야 할까? 그게 또다른 상처는 아닐까? 그 애들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낼 수 있잖아, 제제라는 노래가 이중성을 노래했듯이.’


그러자 학생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이중성이 아동학대 피해자들의 특징이에요.‘


그 말을 들은 작가는 더는 논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고, 이 학생은 안다는 것.



내가 놀랐던 것은 그처럼 섬세한 감수성을 작가가 아동학대 피해자를 가볍게 다룬 노래의 문제점을 몰랐단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태도였다. 그는 배울 만큼 배운 성인 남성이고, 이미 문단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임에도, 자신이 무언가를 “학생보다 모른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삶에서 겪을 일 없는 고통임에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애쓰며, 담담히 말한다. 이런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는 얼마든 예민해져도 좋다고.

자신이 당할 일 없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도, 이렇게 배워 나가길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야말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했다.


우리는 내가 모르는 슬픔에 대해 종종 너무나 순진하고 쉽게 생각한다. 혹은 분명 거기에 있는데 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가 겪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무지는 결코 핑계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잘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상처 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 모난 마음의 끝으로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슬픔을 공부하며 삶의 모서리를 깎아 나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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