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밖에 모르는 당신에게

친정 엄마

by 식탁 아래

고백하건대 평생 엄마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미워하고 원망하는 쪽에 가까웠다.

유년시절을 지나 청소년기,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는 늘 내 마음의 짐이었으니까

사랑보다 원망이 더 익숙했고, 기대보다 거리두기가 편했다.


여자는 몇 번의 인생을 살며, 그때마다 엄마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엄마를 가장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은 사회에 나가 일을 할 때도, 결혼할 때도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겪으면서였다.


아빠의 외도, 상처입은 엄마.

그리고 그 상처를 나에게 쏟아냈던 엄마.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애써 모른 척했고, 그 무게를 나 혼자 삼켰다.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부모님과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가 스스로 나에게 트라우마였고, 약점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다.


대학교 동기모임 때의 일이다. 취업할 때 선물로 자동차를 받았다는 동기의 이야기에, 나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을 했다.

다른 친구는 천만원에 달하는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았다며 들고왔다.

대학교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엄마는 일해서 돈 벌어서 다 할머니 가져다 줬어”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 한 켠에 기대하고 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착 가라앉았다.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고 매달 돈을 부쳤고, 엄마의 전화는 잘 받지 않았다.


명절마다 친척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운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무도 묻지 않은 우리 집의 가짜 평화를 지어내곤 했다. 대기업 팀장이라는 타이틀은 내 부실한 가정사를 가려주는 가장 크고 화려한 방패였다.


건강하지 못한 성장과정임에도 나는 꽤나 잘 컸고 어른이 됐다.

상처가 많은 어린시절의 나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건 꽤나 힘들었지만 밑바닥부터 단단하게 쌓아올린 내 자존감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꽤 멋진 어른이 됐고 몇 번의 연애를 했다.

나의 트라우마를 채워줄 남편을 찾아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았다. 늘 꿈꾸던 능력있는, 무던한 남자였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육아는 나를 단번에 다시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무너지고, 흔들리고, 버거운 그 시절의 감정이 다시 밀려왔다.

나의 엄마, 나보다 한참 어릴 때 나를 낳아 키운 엄마.


육아는 내 맘처럼 되지가 않았다.

회사를 다닐 때, 일이 안풀리면 야근을 하면 됐고, 실수하면 이실직고하고 시말서를 쓰면 됐다. 그리고 더 노력하면 만회할 수 있었다.

육아는 좀처럼 내 노력대로 되지가 않았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나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20년 전 나를 향해 상처를 쏟아내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도 나처럼 엄마가 처음이라, 이 벅찬 감정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몰라 가장 가까운 나를 붙잡고 울었던 것이라는 걸.


엄마에게 드는 감정들이 여러가지가 있다.

아주 어릴 때는 사랑과 존경이었을테고, 청소년기에는 원망과 미움이 주를 이루었을테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만큼 커버린 지금은 여자로서 연민이 생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무게를 버텨야 했던 여자,

예쁘고 이루고 싶던 꿈이 많았을 그 사람.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엄마도 나처럼 외롭고, 서툴고, 두려웠다는 걸


요즘은 가끔, 그 시절의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반찬 몇 가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대전까지 내려온 엄마는,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더 좋은 거 못해줘서 미안해, 자주 못해줘서 미안해’ 라고 말했다. 본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미안해였다.


예전 같으면 '뭐가 미안해, 짜증나게'라고 쏘아붙였을 텐데, 그날은 엄마의 해진 가방 끝자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매번 ‘미안해’라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사는 엄마가 짜증스러우면서도 그 말을 무슨 마음으로 할지, 그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다.


사랑을 전할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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