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야기

너와 함께라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아.

by 핑크뚱

갑자기 조용하고 깜깜했던 창고가 밝은 형광등 불빛에 환해져 단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웁니다. 주말이란 주인이 말려도 늦잠을 자야 하는 게 국룰인데. 세탁실 옆에 있는 창고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니 빨래 때문에라도 새벽이고 저녁이고 왔다 갔다 해 어두웠다 밝았다 아주 정신이 없지만, 이래 봬도 생긴 것과 다르게 예민하고 빛에 약합니다. 그런데 수시로 들락거리는 창고에다 나를 떡하니 방치해 둔 개념 없는 주인을 탓하며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날 새벽도 당연히 빨래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부족한 잠을 위해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주인이 무얼 하는지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시끄러워 당최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 살짝 한쪽 눈만 떠서 보니 내 발아래에 있는 생수의 비닐을 뜯고 꺼낸다고 난리 부르스입니다. 내 옆방에 사는 촘촘한 망 안에서 자고 있던 양파도 부스스 일어나 뭔 일이냐고 묻습니다. 낸들 알턱이 있나요. 이미 시끄러운 소리에 짜증이 올라올 대로 올라와 모른다며 빽 소리쳤습니다. 소리치고야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 맞은 양파에게 미안해서요. 모름지기 후회는 미련하게 항상 뒤를 따라오나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생수를 꺼내 든 아주머니는 이번엔 나와 양파를 다른 손으로 집어 올려 춥고 퀴퀴한 창고에서 우리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런, 내가 여태 살았던 창고의 공기와 사뭇 다릅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가 온몸으로 감겨와 기분 좋아지려는 순간 사정없이 바닥에 던졌습니다.

"아이쿠야!"

주방싱크대의 개수대 안입니다. 아주머니는 나랑 양파를 무식하게 던져 놓고는 생수 뚜껑을 열어 아들에게는 언제 그랬냐며 다정하게 물 한잔을 건네며 이야기합니다.

아들, 아침은 카레 어때?
음... 나쁘지 않네요. 카레 맛있겠다.


둘의 대화를 듣자 하니 나와 양파가 할 일은 따끈하고 향긋한 카레로 다시 태어나는 건가 봅니다. 벌써 우리보다 먼저 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당근과 사과였습니다. 이미 옷을 벗고 깨끗하게 샤워까지 마친 후 도마 위에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라는 듯 아주머니는 내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 옷을 벗겨 시원한 수돗물 샤워를 시켜줬습니다. 그리고 도마 위에 있는 당근과 사과 옆에 앉혔습니다. 조금 뒤 양파도 깨끗하게 샤워 후 우리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도마 위에 나란히 줄 맞춰 앉아 있는 나와 양파, 당근, 사과는 아침 메뉴 카레 이야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본연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차례차례 작고 네모난 조각으로 해체되어 대단한 존재감을 뽐내는 노란 카레 가루에 묻힐 겁니다. 그러면 누가 누군지 구별이 쉽지 않겠죠. 그래서 나는 우리 모습을 잃기 전 친구들 이야기가 듣고 싶었습니다. 양파야 어둡고 퀴퀴한 창고에서 오랜 시간 동거동락한 사이라 웬만큼 알지만 당근과 사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깐요.


먼저 당근이 이야기했습니다. 넓은 큰 바다를 건너서 제주 구좌에서 왔다는군요. 바람이 많은 섬이라 해풍을 맞고 자라 미네랄이 많고 남쪽에 있는 섬이라 따뜻한 햇살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네요. 물도 잘 빠지는 건강한 땅에서 자라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 묻은 흙을 옷에 쓱쓱 닦고 한 입 베어 먹어도 달짝지근한 단맛이 일품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다 순식간에 슬픈 얼굴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당근을 무지 싫어하다면서요. 왜일까요? 속살까지 붉어 매워 보여 그럴까요?


그다음은 사과입니다. 밀양 얼음골에서 자란 부사라고 해요. 얼음골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깊은 골짜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하네요. 신기해요. 어떻게 더운 여름에도 얼음이 얼 수 있죠. 그래서 일교차가 상당히 커 사과 속에 꿀이 콱콱 박혀 새콤달콤함이 끝내준다며 침을 튀겨가며 자랑질합니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뜬금없이 노래까지 부르며 사과를 먹으면 예뻐진다나요.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내가 보기엔 울퉁불퉁해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거든요. 하지만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어요.


저랑 함께 있던 양파는 창녕에서 자랐다고 해요. 양파는 수분이 많아 장기 저장이 어려운데 창녕은 땅 자체가 유기물 함량이 높고 유효인산이 풍부해 저장도 잘 되고 산미도 있다네요. 특히 익혀 먹으면 단맛이 더 강해져 특유의 알싸한 매운맛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단맛이 더 강해진다며 이번 카레에 자신의 달큼한 단맛이 배가 될 거라면 어깨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당근을 보며 아이들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며 위로합니다. 양파도 생으로 먹으면 맵고 익히면 물컹해져 아이들이 싫어하다면서요.

참, 인생이 쉬운 건 없다는 말이 맞나 봐요.


마지막으로 나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물 좋고 산 깊은 거창에서 온 수미감자예요. 수미감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익히 알 듯 훌륭한 맛을 가졌습니다. 알이 크고 단단하며 녹말 함량과 섬유질이 많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과보다 비타민 C가 서너 배는 더 많아요. 당근이나 양파처럼 아이들이 싫어하지도 않고요. 밥반찬이나 간식으로 인기가 최고라고나 할까요.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멋지네요.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고 걱정을 나눌 수 있어 좋네요. 이야기하는 사이에 아주머니는 우리를 작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변신시켰습니다. 이 집 아들이 많이 씹히는 것은 싫어해 아주 작게 작게 다진 듯 만들어 놓았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붉은 당근은 어디 가나 알아볼 수 있겠고, 껍질이 여러 겹인 양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사과가 문제입니다. 우리 둘은 서로 자신의 속살이 더 하얗다며 뜬금없는 색깔 논쟁에 빠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코끝으로 고소하고 알싸한 향이 훅 들어왔습니다.


벌써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서 다진 마늘이 노릇노릇하게 볶아지고 있었습니다. 알싸한 마늘향이 가득한 프라이팬으로 작디작은 조각이 된 우리들이 성큼 들어갔습니다. 제법 고소하고 알싸한 마늘향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겨 안았습니다. 점점 뜨겁게 달아오른 우리들 몸이 힘겨워질 때쯤 시원한 물줄기가 프라이팬 안으로 쓰나미처럼 덮쳐왔습니다. 그 순간 뜨겁던 열기는 조금 식어 따뜻한 온탕이 되어 평온한 시간을 제법 보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우리들 몸이 들썩 뜰썩이며 보글보글 끓어올랐고 노랗고 강황 특유의 향이 가득한 카레 가루와 드디어 만났습니다. 우리는 점점 단단함을 벗고 제법 물컹해지며 자신들의 존재를 버리고 노란 카레의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시간이 은근 포근하고 기분 좋았습니다.


우리와 카레 가루는 하나가 되어 카레로 태어났고, 옆 가스불에는 고소한 누룽지 향을 풍기며 밥솥이 들썩이며 카레의 탄생을 환영했습니다. 곧 모두가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잠시 후 가스불이 동시에 꺼집니다. 미리 준비된 큰 접시에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뽀얀 밥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 곁으로 따끈하고 노란 카레가 감싸 안듯 맛있는 향기로 덮습니다. 이렇게 밥과 카레는 만나 한 끼의 완벽한 식사로 태어납니다. 식탁 위에 미리 차려진 빨간 배추김치도 카레덮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란 카레 우주복을 입은 밥을 숟가락 우주선 위에 태웠습니다. 숟가락 우주선에 새빨간 배추김치 한 조각 깃발도 잊지 않고 꽂아 크고 깊으며 어두운 입 속 동굴로 탐험을 떠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이라 외롭거나 무섭지 않게 즐길 수 있을 듯합니다.


주말은 숟가락 우주선에 카레 우주복을 입은 밥을 태워 입 속 동굴로 탐험을 떠나봐요. 혹시 심심할 수 있으니 잊지 않고 배추김치나 무김치를 친구 삼아 함께 떠나도 좋을 듯해요. 우리 함께 떠나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