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사한 지인의 집으로 초대받아 간 날. 이날도 보슬보슬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처음 방문한 아파트는 입구 찾기부터 어려워 허둥댔고 겨우 찾아 주차장에서 로비까지 가는 길은 몇 차례의 검문검색을 통과하는 기분 같았다고 할까요. 마치 입주민을 위해 만든 요새로 진격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아파트는 재건축을 기다리는 오래되고 낡은 저층의 좁은 평수였습니다. 이곳을 드나들 입구는 두 곳으로 어떤 검문검색도 없고 놀이터는 주변 동네 모든 아이들의 놀이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린 곳이었죠. 이런 걸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암튼, 요즘 아파트는 최신식 시스템으로 제가 살았던 곳과 사뭇 달라 새로움과 놀라움을 선물하지만 점점 나와 사는 세계가 다르다며 선긋기 하는 듯해 씁쓸한 것도 사실입니다.
절대 제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란 걸 몇 곳을 통과하며 확인받고 허가받아 드디어 들어간 지인의 아파트. 역시 두 눈이 휘둥그레하게 좋습니다. 고층이라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바람이 넓은 공간을 꽉꽉 채워 오히려 추위에 떨게 했습니다. 저는 저층에만 살아 비 오는 날은 으레 방바닥과 습기가 견우와 직녀라도 된 듯 딱 들러붙어 물 위를 걷는 듯하게 했는데 이곳은 보송보송 아주 솜털 위 같았습니다.
이사하며 새로 바뀐 가구와 가전도 아주 좋습니다. 특히 로봇 청소기는 저의 신혼 때만 해도 턱이 있으면 맥을 못 췄는데 이제는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기술력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는 걸 코 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기술력은 빠르게 편리해지고 있지만 노동자 아내의 현실적 지갑은 너무 얇고 가벼워 혜택을 누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의 눈은 부러움을 가득 담았으나 아닌 척. 우리들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먹고 웃고 아주 신나게 보냈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지인이 늦은 출근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가 없는 그녀를 위해 드라이브 겸 함께 나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비가 오는 도로 위 차들은 줄 선 개미떼처럼 많고 느렸습니다. 천천히 가다 보니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습니다. 그러다 오일장이 선 걸 발견했습니다. 출근하는 지인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에 그곳을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골목골목마다 빨주노초 파라솔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간간히 손님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장사치들이었고 그들끼리 모여 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날씨 탓을 하는 듯했습니다. 비좁은 통로를 어깨를 비스듬하게 통과하며 이것저것 구경했지만 마땅히 살만한 걸 찾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둘러보다 돌아선 길에 기역자로 꼬부라진 허리 머리 위로는 하얀 눈이 빼곡히 내린 할머니의 삐뚤빼둘하게 '직접 만든 도토리묵'이라는 손글씨를 발견하고 얼마 전 텃밭에서 수확한 상추랑 청량초가 떠올라 큼지막한 것으로 한 덩이 샀습니다. 비가 와 손님이 거의 없었나 봅니다. 저의 구매가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듣고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간단 씨는 매일 마시는 술이지만 특히 비 오는 날 전이나 매콤한 무침에 막걸리를 특히 더 좋아합니다. 탱글탱글한 도토리묵도 샀으니 무침을 하기로 했습니다. 향긋한 쑥갓이 없어 아쉽지만 대신 정성과 사랑을 듬뿍 담고 잘 쑨 묵을 듬성듬성 썰어 각종 채소와 어슷하게 썬 매콤한 청량초도 넣었으니 맛 보장 군침 예약입니다. 역시 간단 씨는 벚꽃 축제에서 먹었던 도토리묵무침보다 백배는 더 맛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막걸리와 도토리묵무침을 맛있게 먹는 간단 씨 앞에 앉아 종일 지인의 새집을 부러워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크고 고급스럽진 않으나 가족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즐기며 할 수 있는 깔끔한 주방이 있는 제 집이야말로 최고란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집보다 즐겁고 맛있는 요리로 만든 집. 그곳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