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를 담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핑크뚱 Oct 29. 2023

가을 들녘

마음이 쓰이는 게 가장 우선순위다.

지난 주말, 유난히 따가운 가을 햇살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마 전 까지도 길을 따라 황금 들녘이 자동차와 경주하듯 따라왔으나 이날은 대부분 추수가 끝나 휑한 들녘의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따라붙었다. 노랗게 익었던 벼의 알곡을 수확하고 지푸라기만 들녘에 남아 바람에 쉽게 어질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낡은 집에 홀로 두고 온 늙은 시어머님의 모습과 겹쳐져 마음이 울컥했다.


예전의 양상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고도 없었고 전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지금 내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 걸까. 남편에게 바로 쏟아내는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그래서 더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한다.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봤다. 지난 주말 시어머님을 뵙고 돌아오던 들녘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내 안으로 스며든 탓을 해본다.


지난 토요일 아침. 여덟 시를 조금 넘겨 집을 나섰다. 아들은 웹툰, 나는 목공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아들이 꼭 듣고 싶다는 작가 강연도 들었다. 나와 아들이 함께 읽고 서로 좋아했던 동화책 작가님이 도서관에서 강연을 한다는 걸 알고 아들이 먼저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몇 주 전에 신청했고 이날 작가 강연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듣고 나니 늦은 오후가 돼서야 어머님댁에 도착했다.


도착해 대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반갑게 맞아줄 시어머님의 기척이 없다. 대신 제법 친구들을 모아 덩치를 키운 먼지 뭉텅이가 데구루루 구르며 오래된 시골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나를 맞았다. 마루로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어머님은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아직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우리들 인기척에 깨어나신 시어머님. 나이에 비해 주름 없는 얼굴은 중년의 모습이나 뽀얗게 앉은 하얀 머리카락이 영락없는 늙은 사람이라고 알려준다. 이것저것 준비해 간 것들을 정리하고 어머님이 유난히 좋아하는 통닭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옆에 앉았다. 방금 잠을 털어낸 게 맞나 싶을 만큼 너무도 맛있게 잘 드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허기가 많으셨구나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도 깨우자 겨우 일어나신 어머님. 아침 식사는 어제보다 더 허기진 모습에 멍한 눈빛까지 두려움이 생겼다. 이대로 홀로 시골집에 계셔도 될지,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걱정에 애달픈 나와는 다르게 남편과 시누이들은 무덤덤했다.


전날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드셨다는 어머님.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유튜브만 보시는 어머님. 드시고 싶은 것을 침대로 가져다 달라며 누워서 모든 것을 드시는 어머님. 점점 살이 불어나고 있는 어머님.


다음날 걱정에 요양보호사님과 통화를 했다. 그녀도 내가 걱정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어머님께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신은 멀쩡하다며 아마 그날 그랬다면 수면제 탓일 거라 했다. 시어머님댁에서 돌아와 내내 마음이 쓰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오랜 시간 숙성시켜 발효되는 과정에서 가스가 폭발하듯 뱉어내던 말들이 전조를 느낄 새도 없이 남편에게 정돈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냈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어 더 서럽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을 곱씹어 봤다.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들녘에 울컥했었다. 뜨거운 햇볕과 거센 바람을 고스란히 품어 잘 익은 벼는 마치 어머님의 젊은 모습 같았다. 추수가 끝나 바람에 나부끼는 지푸라기만 남은 휑한 들녘은 마치 자식들이 풍성한 알곡만 챙기고 늙고 병든 몸으로 홀로 오래된 시골집에 둔 지금의 어머님과 닮아 있어 화가 났다.


나에겐 누구보다 미운 사람이다. 조금만 나에게 마음을 주셨다면. 그래서 더 가엽게 보였다. 이렇게 마음이 쓰인다는 건 지금 내 삶에 가장 우선순위가 아닐까. 매일 전화로 안부를 챙기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먼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