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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Nov 02. 2023

다정하지만은 않은 이웃사촌

함께 동거를 시작한다

계절에 맞지 않게 봄 아지랑이라도 끌고 온 듯한 노곤한 기운이 나를 지배한 주말 오후. 영화가 보고 싶다는 아들 옆에 눈꺼풀이 반쯤 내려온 눈을 하고 살포시 누웠다.     

 

아들은 유치원 때부터 핼러윈날을 좋아했다. 그리기부터 만들기까지 마치 일 년을 핼러윈데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아이 같았다. 그런 아들 덕에 매년 우리는 그림 그리고 종이접기 한 유령이나 호박을 현관문에 붙이고 집 안도 꾸며 아들의 많지 않은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런 아들에게 이날만큼은 친구들과 마음껏 즐기고 노는 축제의 날이었다.


이번 핼러윈은 평일이고 주말에 일정이 있는 남편 덕에 아들 친구들과 엄마들을 초대해 1박 2일 집에 머물며 양껏 즐겼다.  다음날 손님들을 보내고 난 후 흔적 지우기라도 하듯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렸고 스팀 물걸레질까지 했다. 크게 대접한 건 없었으나 나름 신경이 쓰인 탓에 몸이 너무 무거웠고 여기에 청소까지 끝내니 피곤까지 붙어 잠을 요청하니 누울 수밖에.     


스피커 볼륨도 제법 컸고 여기에 신난 아들의 웃음소리까지 보태지니 평소라면 절대 잠과 한 몸이 되지 못할 분위기였으나 이날은 귀속으로 소란함이 전혀 스며들지 못했다. 얼마를 잤을까. 잠결에 ‘어지러워. 너무 어지러워’라는 절박한 소리에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깨어났다.      


머리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반듯이 누운 내 주위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잠결에 들었던 어지럽다는 소리도 내가 한 말이었다. 살며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빈혈이 아주 심했을 때도 이렇지 않았다. 누워있는 상태인데도 이렇게 어지럽다면 일어서면 중력을 느껴본 적 없는 무거운 내 몸이 제대로 땅으로 당겨져 쓰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덜컥 생겼다.     


 분을 어지럽고 놀란 마음에 일어나질 못하다 조금씩 어지러움이 잦아들고서야 겨우 일어나 앉아 보았다. 웬걸, 앉으니 아무렇지도 않아 어리둥절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뭐지, 뭐지. 를 되뇌었고 그 후 희한한 경험을 한 주말 오후는 별 탈 없이 잘 마무리했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희미한 가습기의 전원 불빛이 어둠과 맞서고 있는 한밤중이다. 방금 떠진 눈은 아직 약한 불빛을 알아채지 못해 모든 게 까맣게 보였다.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어지러움이 더 심해졌다. 낮에 경험한 그 어지러운 증상이었다. 까만 밤의 세상은 밝은 세상에서 느낀 거와는 또 다른 공포가 되어 나를 덮쳤다. 좀체 잦아들지 않는 어지러움은 마치 나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다 말다 반복하며 완전히 잠에서 깬 아침은 간밤의 기억을 깡그리 지운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출근해 일도 별 어려움 없이 끝냈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 중에 전날 경험한 나의  증상을 이야기하게 됐고 누군가 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다.


하지만 흘려 들었다. 평소처럼 아무 지장 없이 하루 일과를 소화해 낸 날이라서. 그러다 그날 밤에 또다시 전날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 동료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다음날 곧바로 이비인후과에 가 진료받았다.     

이석증입니다.

의사는 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눕혔다 앉혔다를 반복한 후 혈액과 청력검사를 처방했다. 여기에 고글을 쓰고 상하좌우로 따라가며 눈동자의 움직임도 검사한 후 진단한 병명이다.


이석증은 몸의 균형 유지에 관여하는 이석이라는 물질이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반고리관 내부의 액체로 들어가 자세를 느끼는 신경을 과도하게 자극하여 흔하게 주위가 빙글빙글 도는듯한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라고 했다.     


내 주변 중년의  지인들에게 자주 들었던 병명이다. 본인이 앓거나 그 주변에 앓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였지 그 속에 내가 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진료실을 나오며 생각이 많아졌다. 예전에 나라면 억울함에 지배당해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었을 텐데 이번은 한 가지로 단정 지어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나를 얼마나 홀대하며 살았나 하는 의문에서 시작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병을 몸으로 끌고 들어올지 걱정으로 마무리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저녁을 챙겼고 설거지하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다. 앞으로 나는 내 몸에 함께 동거를 시작한 병들에 대해 물리치려 안간힘을 쓰지 말자 다짐했고 그들과 몸에 대한 권리를 사납게 다투지 말고 사이좋은  이웃사촌처럼 지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생이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동안 홀대한 몸에 대한 대가로 마일리지 쌓듯 쌓아 톡톡한 값어치를 치르고 있는 지금. 억울한 마음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과 다정하게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를 사랑하라는 신호라 생각하며 달갑지만은 않은 이웃들과 다정하게 살아가보자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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