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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Feb 23. 2024

내 인생의 희로애락

세상을 다 가진 맛

눈이 번쩍 떠졌다. 가슴 위로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듯해 깜짝 놀라 깼다.

후드득, 후드득


빗소리다. 까만 어둠이 가득한 방안에 습한 공기까지 한 몫하고 들어찼으니 몸이 먼저 버거웠나 보다. 지붕 위로 거세게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여름 장대비같이 우렁찼다. 떠진 눈은 어둠에 점점 익숙해져 쉽사리 감기길 거부했다. 그렇게 가만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다 보니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솔직히 말해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생각났다. 예상치 못한 강한 빗소리와 어둠이 무서움을 불러올 때쯤 그보다 빠르게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추억의 맛이 깜깜한 한밤중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달래 왔다. 그렇게 나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추억의 맛과 만났다.


가을에 수확한 콩 잎을 잘 삭혀 매콤 달콤한 빨간 양념을 켜켜이 발라 담근 콩잎김치와 고춧가루로 기름을 듬뿍 만들어 빨간 기름이 둥둥 떠있는 소고깃국이 내 마음 위로 빠르게 부유했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몇 안 되는 음식이 콩잎김치와 소고깃국이다. 콩잎김치 하나면 뜨끈한 밥 한 그릇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그때 맛을 떠올려 따라 만들어 봤지만 엄마의 손맛을 흉내 내지 못하고 포기했다. 다음은 고춧가루를 참기름에 달달 볶아 기름을 내 끓인 소고깃국이다. 밥 세끼 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때라 고깃국은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돼지고기도 아니고 소고깃국이라니 그 시간만은 세상이 온통 내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차갑게만 느껴지던 어둠을 따뜻하게 만들어 줬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냉동고에 설에 선물 받은 소고기가 떠올랐다. 여기에 시댁에서 가져온 큼지막한 무와 텃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대파 그리고 콩나물까지 모든 재료가 준비한 듯 완벽했다. 그때부터 잠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콩닥콩닥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그렇게 설레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완전히 잠을 떨치고 일어났다.


냉동실에서 소고기를 가장 먼저 꺼내고 창고에 있는 무와 냉장실에서 지저분한 잔털이 가득한 다리를 다듬어 깨끗이 씻어 물에 담가둔 콩나물까지 싱크대 위로 꺼냈다. 잠자는 남편과 아들깨지 않게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어둠이 자욱한 텃밭으로 대파도 한 줌 잘라왔다. 준비한 재료들은 빠르게 손질했다. 고기는 한입크기로 깍둑썰기하고 무는 단면이 넓게 삐졌다. 대파도 크게 어슷썰기 했고 이미 다듬어 둔 콩나물까지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남편은 기름이 떠있는 음식을 싫어하니 고추기름은 내지 않기로 했다. 우선 달군 냄비에 한입크기로 썰어 놓은 소고기를 달달 볶다 고춧가루를 넣어 한 번 더 볶았다. 여기에 삐져놓은 무와 국간장을 넣어 뚜껑을 닫고 무에 간이 배도록 한소끔 끓여줬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면 준비해 물을 가득 부어 다시 팔팔 끓였다. 마지막으로 콩나물과 대파까지 넣어 한 김 더 끓이면 지상 최고의 맛이 완성된다.


솥밥을 짓고 새벽에 끓인 소고깃국을 큰 국그릇에 가득 담아 서둘러 상을 차려 남편과 아들을 식탁에 앉혔다. 내 옆에 앉아 맛있게 국을 먹는 모습을 보며 아들이 물었다.

엄마, 맛있어요?
응. 세상을 다 가진 맛이야.

아들은 전혀 엄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봤다. 그래, 아들은 나를 이해지 못 할 테다. 하지만 그 시절 내 어릴 적 소고깃국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게 들어줬다.


추억의 소고깃국을 생각하며 끓여 내는 시간은 나에게 더없는 희로애락의 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 생각에 기뻤고, 빨간 기름 둥둥 소고깃국으로 끓이지 못한 아쉬움에 살짝 삐칠 뻔했으며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잠깐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더없이 즐거웠다.


빨간 국물을 한 숟가락 듬뿍 떠 입으로 넣으며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도 나처럼 매일매일 희로애락을 기르며 상을 차려내셨겠구나 싶어 더욱더 그리워지는 순간과 맛있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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