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15일 그러니깐 오늘 2월 5일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설날보다 해가 바뀌고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설날은 집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음식을 만들고 차례를 지내는 조용한 분위기였다면, 그에 반해 정월대보름은 시끌벅적 온 동네 잔칫날 같았습니다.
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정월대보름을 떠올리면 평소랑 다른 상차림, 시끌벅적 지신밟기와 화려한 쥐불놀이 그리고 쟁반같이 둥글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달맞이가 생각납니다.
이날은 평소랑 사뭇 다른 아침상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없는 오곡밥에 갖가지 나물반찬 그리고 생선구이, 김 등 정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어린 제 눈에는 꺼뭇꺼뭇한 밥과 나물반찬만 가득한 평소처럼 맛없는 밥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전날 음식을 만드는 엄마는 좀 더 정성을 담았던 기억이 아직도 그려집니다.
꽹과리, 장구, 북, 징을 앞세워 동네 어르신들이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귀신과 나쁜 운을 막는 액맥이와 복을 비는 지신밟기를 했습니다. 어린 우리들은 소리를 쫓아다니며 지신밟기하는 집에서 나눠주는 떡이며 음식을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었습니다.
지신밟기 따라다니며 빵빵하게 배를 채운 우리들은 솔가지를 주우러 뒷산으로 갔습니다. 저녁에 쥐불놀이를 해야 합니다. 산에서 솔방울과 솔가지들을 한가득 주워 내려오면, 쥐불놀이의 필수템 빈 깡통을 찾아 동네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어렵지 않게 찾은 빈 깡통은 구멍을 뚫어 뒷산에서 주워온 솔가지들로 가득 채웁니다. 솔직히 여자인 저는 쥐불놀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빙글빙글 붉은 동그라미가 만들어지는 모습이 너무 이뻐 항상 남자들 틈에 끼었습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달맞이였습니다. 다른 동네에서는 달맞이 달집을 아이들이 만들어 어른들에게 팔았다던데, 저희 동네는 달집을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각자의 집 마당에 볏짚단을 세워 태우며 가족들이 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저의 엄마도 달맞이를 가장 중요하고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달맞이에 빈 소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 굳게 믿었나 봅니다.
어린 제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나이 들 듯 동네 어른들도 늙어 갔습니다. 지신밟기할 젊은 어른이 없어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자취를 감췄고, 점점 불조심이 강조되면서 쥐불놀이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달맞이는 한해도 거른 적 없이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달님에게 매년 같은 소원을 빌었던 제 소원이 이루어진 적은 없습니다.
이 글을 쓰며 어린 시절 그때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집니다. 그때 차곡차곡 쌓은 많은 추억이 나이 든 지금 그 시절을 추억하니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그어집니다. 나름 저는 행복한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어린 저를 생각하며 가만히 아무거나 군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내가 생각하며 미소 짓는 정월대보름의 추억은 아무거나 군에게는 없을 것 같습니다. 쥐불놀이랑 지신밟기는 책에서나 배우겠죠. 지역마다 달집 태우는 달맞이 행사는 크게 하니 마음만 먹으면 찾아가 구경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쌓이던 추억은 이제 열심히 찾아다녀야 만들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서글퍼집니다.
엄마인 제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나물과 밥을 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과거의 오곡밥의 의미는 지금의 우리와는 상관없습니다. 충분히 잘 먹고 있고 건강도 병원에서 잘 챙기니 간단 씨와 아무거나 군이 안 먹는 오곡밥 대신 많이 티 안 나는 찹쌀, 수수, 차조를 넣어 밥을 짓습니다.
묵은 나물은 다가올 여름의 더위를 잘 이기자는 이유로 먹는다죠. 그리고 정월대보름 음식에 고춧가루를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는데 이유가 피부병이 생기고 벌레에 물릴 수 있어서랍니다. 요즘은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으니 건나물로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겠고, 피부병이나 벌레 물리면 병원을 찾으면 된다 싶어 그냥 우리들이 잘 먹는 것으로 내 마음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폼만 정월대보름 오곡밥과 나물입니다. 대신 아침을 먹으며 저와 간단 씨의 어린 시절 정월대보름에 대한 추억을 아무거나 군에게 이야기해 줬습니다. 듣는 아무거나 군도 조금은 신기해하며 나물을 먹고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맛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했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니겠습니까. 맛있는 아침을 먹으며 정월대보름 이야기도 하고 좋았습니다.
아무거나 군이 지금보다 더 성장해 정월대보름에 대해 배운다면 엄마가 해 준 나물과 잡곡밥,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이렇게 아무거나 군을 위해 최대한 입에 맞는 나물과 잡곡밥을 했노라 기록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