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사랑하지 않는 개

개 산책에 천부적인 재능 2화

by 재승



어떤 감정은 쌓여가며 그 실체가 드러난다. 주의 사항을 읽는 것만으로는 사고를 실감할 수 없듯이, 겪고 난 이후에도 마음을 즉각 알지 못하듯이 말이다. 입양한 개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과정이 그랬다. 개에게 가진 자원을 다 내어줬는데 그 어떤 것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돌려받지 못했을 때의 마음이 어떠할는지 몰랐다.


찬과의 관계 맺음은 불신을 해소하는 과정에 있었다. 임시 보호 중 찬의 걸음걸이가 묘하게 이상하다고 여겨 병원에 갔다가 오른쪽 다리에 슬개골 탈구 3기 증상이 있음을 진단받았다. 찬을 보호하고 있던 단체와 협의하여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을 때 찬의 나이는 1년이 좀 지난 상태였고, 나와 만난 지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어린 개의 입장에서는 자동차나 병원 처치실 같은 무서운 공간에 억지로 떠밀고 -분명 싫다고 표현했는데도!- 꺼림직한 일을 다 겪고 난 뒤에야 나타나는 인간과 멀어지고 싶었을 것이다.


수술 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찬은 실외 배변을 고집하기에 짧게 외출하기로 했다. 담당 의사에게 배변만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은 괜찮다고 미리 답변을 받았었다. 오른쪽 다리에 깁스한 20킬로그램의 개를 안고 빌라 건물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길가에 내려놓았을 그 찰나, 사고가 일어났다. 목줄이 바닥에 늘어지면 계단을 내려오다 발에 걸릴 것 같아서 하네스의 연결 고리에 손잡이까지 같이 묶어 두었는데, 개를 내려 두고 손잡이를 뺀다는 것이 그만 목줄과 하네스가 연결된 고리를 풀어버렸다. 수술 후 운동 제한으로 이틀간 집에 갇혀있었던 찬은 몇 걸음 앞으로 걷더니 금세 나와의 거리를 넓혔다.


- 찬아.


다급히 부르며 뒤에서 쫓으니 갑자기 개가 달리기 시작했다. 집 앞이 내리막길이었다. 그저께 다리 수술을 한 채로 뛰어나갈 경사가 아니었다. 찬, 찬! 이름을 불렀으나 콜링(Calling)이 되지 않았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차분히 서서 목소리를 내어 돌아보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새 도망치듯 내려가고 있는 골목의 바로 앞이 찻길이었다. 침착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걷던 사람들이 몇 있었으나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찬은 골목 끝에서 돌아 찻길로 내달렸다. 나 또한 추격하듯 뛰어 겨우 거리를 좁히고 손을 뻗었는데 하네스를 잡으려던 순간,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인간이 넘어지든 말든 찬은 붙잡히지 않으려고 꼬리를 말고 저 아래로, 아래로 멀어져갔다. 때마침 천만다행히도 자주 보던 동네 강아지의 보호자 분이 산책을 마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 잡아 주세요.


넘어진 채 외쳤다. 개를 좋아하는 찬은 그 강아지와 보호자를 보고 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멈춰 섰다. 그 둘이 아니었다면 자주 가던 공원까지 곧장 뛰어갔을 것이다. 찬아, 너 지금 이렇게 뛰면 안 돼. 맞은 편에서 올라온 보호자가 그렇게 말했다. 슬개골 탈구 수술을 할 거란 소식 후 며칠 만에 나타난, 파란색의 붕대를 감고 뛰어오는 개와 만신창이의 꼴로 리드줄을 하네스 고리에 연결하는 나를 보면서, 그 외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 또한 고맙다는 말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배변 산책은 취소였다. 줄을 잡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귀가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돌아와서 생각했다. 줄이 풀렸을 때 뛰쳐나가서 불러도 붙잡을 수 없는 개를 다시 잡아 와야 하는가?


물론 잡아 와야 한다. 사실 콜링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개는 줄을 놓친 상황에서 으레 달아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겁을 먹고 도망칠 수도 있고,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하는 줄 알고 뛰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알면서도 그 하루를 다 보내고 밤이 지날 때까지 찬을 마주보기 힘들어할 정도로 분해했다. 왜였을까. 크게 다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어서? 보호자 노릇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큰 개를 통제할 수 없으면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통상적인 사고를 신경 쓰며 제대로 관할 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려서? 그보다는 배신감이었다. 뛰면 뛸수록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이 개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단지 내가 제공하는 ‘산책’이 좋은 걸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수술 전에도 찬은 나에 대한 애착보다 밖에서 탐색하고 장난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찬은 그저 평소의 산책처럼 공원 입구에서 마킹을 하고, 가장 좋아하는 공간까지 술래잡기하듯 놀러 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연유로 인간의 손에 잡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공원 내 뛰어놀 수 있는 곳에서 한참 놀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도망치던 것처럼. 태어난 지 두 해도 지나지 않는 개에게 그 생애의 반절도 같이 보내지 못한 인간을 왜 가장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우습게도. 줄을 당겨 달아나는 개와는 같이 살 수 없다고, 줄이 끊겨도 내 곁에 머무르는 개와 같이 살고 싶다는 욕구를 속으로 계속해서 발설했다. 왜 악의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두고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앙심을 품었을까?


수술 후 다리의 붕대를 풀기 전까지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벌어졌다. 퇴근하고 보니 무릎 위 일자로 절개해 둔 부분이 벌어져 검지 길이 정도 되는 지름의 둥그런 피부 조직이 붉게 드러나 있었다. 넥카라를 벗어버리고 붕대를 풀어 수술 부위를 봉합한 실을 핥아서 전부 빼 버린 것이다. 플라스틱 넥카라가 불편할 것 같아 쿠션형을 씌워주고 출근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이 사태에 대해 더듬더듬 설명했다. 병원에서는 내일 오후 5시에 다시 내원하라고 말했다. 이 정도는 응급도 아닌 모양이었다. 우선은 생살이 드러난 곳을 소독하라고 했다, 나더러 직접. 피부 아래 조직에 소독약을 붓고 닦아내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다음 날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가기까지의 시간이 영겁처럼 길었다. 병원에 가서도 2시간을 대기하여 다시 의료용 타카로 절개 부위를 봉했다. 이튿날에는 쿠션형과 플라스틱 넥카라를 두 개 씌워 두고 출근했다. 그런데 또 벗었다. 또, 붕대를 풀고 봉합을 풀려고 시도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절개한 부위가 완전히 다물리기 전까지 퇴근하고 집에 오면 개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무릎부터 확인했다. 붕대를 찢었으면 둘러메고 병원에 가는 일이 지속되자 찬은 퇴근한 나를 반기지 않고 외려 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개를 혼내는 일이 무용하다는 것을 안다. 개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왜 험한 곳에(병원) 계속해서 들려오고, 기껏 제거해 놓은 이물질들을 다시 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라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다리의 속살을 벌려 놓을 수가 있어. 어떻게, 어떻게! 나무랄수록 개는 불편해했고, 나는 노력할수록 미움받고 있다는 생각에 속상해했다.


다리가 회복된 후로도 찬은 산책 중 나를 놓고 갈 수 있는 순간이 오면 -도대체 개 산책 중 ‘놓고 간다’라는 수사가 가리키는 것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지?- 반드시 갔다. 가령, 강아지를 ‘파킹’하고 가게를 출입했다 나오면 사라졌었던 적도 있고, 아는 개가 다목적 공원 안에 있는 것 같으면 줄을 당겨 미사일처럼 날아간 적은 셀 수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임시 보호했던 강아지 모두 줄을 놓쳐도 내 주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나 외의 사람들에게 더 친밀감을 보이는 경우가 없었기에 찬의 태도는 더욱 당황스럽고 생소했다. 이 개에게는 나와의 동행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는 없나 보다. 그래서 내가 만질 때 적정 거리 이상 떨어지는 것일 수도, 가까이 붙어 자지 않는 것일 수도, 다른 강아지의 보호자를 만났을 때만 부쩍 애교가 많은 건가 보다, 라는 상념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개는 나의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돌보는 강아지가 무언갈 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 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어쩌면 내가 아니구나, 라고 덤덤하게 느낄 수도 없었다. 개에게 조건 없는 애착을, 그러니까 인간과 불편한 일을 겪고 나서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가올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개의 모습, 미디어에 곧잘 유통되는 면모, 으레 개에게 바라고 요구할 수 있을 거라고 예측되는 것들을 얻어내고 싶어했다.


그 무렵 사 놓은 소국이 2주째 시들지 않고 있었다. 줄기에서 무언가 싹트고 있는 것도 같았다. 소국은 생명력이 강해서 줄기가 잘린 상태에서도 물에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절화가 오래 가도록 약을 타 놓은 물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절단된 것에서 새로운 것이 날 수 있을까.


그랬다. 산책하다 보니 어느샌가 찬의 애착이 옆에 걷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만 바라보던 강아지의 걸음에서, 아주 작고 옅게, 하루걸러 하루마다,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마음이 보였다. 의지가 맞을까? 아니면 나와 같은 공간, 길목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혹은 그저 걷다가 불 예측하게 주는 간식이 흡족했던 걸까? 이렇게 세분화하는 것이 그에게는 무의미하겠지만,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어떤 접착을 만들긴 했다.


불신은 아직도 해소 중이다. 찬은 산책을 마친 후 바로 작업실에 들어오면 찬은 작업실 뒤에 앉아 있지 않는다. 그런데 오-십 분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들어오면, 한 15분 정도는 작업실 뒤에 앉아 있다가 다시 침대로 간다. 살금살금 걸어와 약 1미터를 남기고 앞에 서서 내 눈치를 살피다 다시 돌아가고, 어느 때엔 멈추어 서서 날 바라보는 형태의 애정. 아무래도 익숙져야 하는 것은 나인 것 같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무작정 나를 신뢰하고 애착을 금방 형성하는 강아지가 있었다. 코코가 그랬다. 애착을 형성하지는 않아도, 인간에게 의존적인 강아지도 있다. 푸요가 그랬다. 내 헌신보다 더 큰 사랑을 돌려받았다고 확신했던 코코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찬과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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