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산책에 천부적인 재능 3화
첫 번째로 임시 보호한 강아지는 8개월의 갓 구운 빵 같이 노릇노릇한 모색을 가진 진도믹스, ‘코코 Coco’ 였다. 2022년 여름에 와서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캐나다의 한 가정으로 입양을 갔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입양 후 소식을 받았는데 코코는 눈 먹는 걸 좋아한다고 적혀 있어 그 겨울을 나랑 같이 봤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가, 커다란 트리를 보고 무서워했다는 말에 그 염원을 접었다. 나는 큰 트리를 보여줄 수 없으니까. 다음 해 여름에 받아 본 소식에는 가족의 딸아이 둘과 절친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두 살이 되어가는 다 큰 강아지의 얼굴이 동봉되어 있어 ‘나하고 있을 때는 아가였는데’ 라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숱하게 말하도록 만들었다. 어린이들을 좋아했던 강아지라 잘 맞는 가족 구성원에게로 간 것 같아 기뻤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작은 눈을 꿈뻑이며 졸고 있는, 햇살 받은 병아리 같던 얼굴. 임시 보호처를 구한다는 내용의 SNS 게시글 속 첨부된 동영상으로 코코를 처음 봤다. 화면을 꽉 채운 이목구비를 한참 바라보았던 순간은 여태 잊히지 않고 때때로 말을 건넨다. 이렇게 완벽하게 생긴 강아지는 처음 보지 않아? 그러면 대답한다. 응. 지금도 그래. 그처럼 예쁜 강아지는 보지 못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¹
¹ 찬에게는 미안하다만 원체 이상형이란 최초에 사랑했던 이가 원본이 되어, 그 이후의 부합이란 패러디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에게 적용하자면 코코가 그 원본이다. 그런데 찬은 이 사실을 알게 되어도 딱히 서운해 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시 주변 친한 친구에게 개를 임시 보호하는 것에 관해 묻고 다니며 말했다.
-어때? 해외 입양 가기 전에 딱 두 달만 봐주면 된대.
-괜찮을 것 같은데?
-그치. 까짓것 두 달쯤이야, 내가 집밥 먹여 줄 수 있어.
코코를 데려오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입양처가 정해지기는커녕 해외 입양 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은 상태여서 임시 보호 기간을 못 박을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코코는 두어 달이 안 되어 캐나다로 떠났다. 코코에게도, 그의 가족들에게도 행운인 일이었고 다만 나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색감이 선명해서 일어난 뒤 되짚어 본 대로 남는 꿈결 같은, 그해 가을.
윗면만 구워진 식빵 같은 엉덩이 털에 길고 풍성하게 늘어진 꼬리. 정수리 위로 높게 솟은 귀는 두툼하고 부드러운 모서리를 가지고 있었고, 새카맣고 큰 코와 그에 비해 콩알만치 작은 눈, 얄상한 몸매. 보는 이로 하여금 ‘쟤는 왜 저렇게 다리가 길어?’라는 외마디 비명 같은 감탄을 자아냈던 긴 다리. 어느 모로 보아도 예뻤던, 입양 가기 딱 이틀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침대 위로 와 얼굴을 내 몸에 붙여 주었던, 작별 후 포인핸드며 시 보호소며 밤새 찾아서 저장한 강아지 사진마다 조금씩 들어있던, 코코. 너에게는 금방 잊히길 바라는 꿈결. 두어 달.
# 2022.09.26 / 오전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코코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같이 산지 이제 한 달 되었는데, 벌써 이 친구에게 기대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일어날 수 있게 된 것도 다 코코 덕분 아닌가. 같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얼추 하게 되어서 큰일이다.
한 존재를 삶에 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감당하기 힘든 일일까.
내가 코코와 잠시나마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입양자와 달리 임시보호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이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고, 집안 사진을 몇 장 보내고, 매일의 산책을 제공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면 충분했다. 임시 보호 환경에 대한 관대함은 아마도 어느 가정집이든 보호소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안락사가 시행되는 시 보호소를 제외하고, 개의 입양자가 될 수 있는 요건으로 제안되는 것들을 보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전제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개를 먹이고 입히고 아플 때 병원비를 낼 수 있는 경제력뿐 아니라 특정한 삶의 형태를 충족할 것까지 포괄하는데, 가령 1인 가구가 아닐 것, 신혼부부도 아닐 것, 임신 계획이 없을 것, 우울증 및 불안증이 없을 것 등이 그렇다. 결혼, 출산 후 결혼 생활 유지 등이 어느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 밑받침되어야 가능하고, 가족임을 입증할 수 있는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 형태에 조준된 기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개를 보내는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 삶은 일시적인, 과정적 기간으로 간주하거나 그렇기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결혼 후 출산하여 수년이 지난 이성애 부부이거나, 그 슬하에서 경제력을 갖춘 성인이 될 때까지 독립하지 않아도 되었던 자녀이거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 중인 딩크족-이성애 부부이지 않으면 개를 키우기에 부적합한 것이 된다. 아니면 1인 가구도 2인 가구도 아닌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동거 중인 동성 커플이든지. 나는 앞선 사례 모두에 해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 입양을 가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잘 적응해 사는 모습을 비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1인 가구이면서 당시에 프리랜서 직업의 불안정한 수입 조건, 만약 입양의 문제였다면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사람이었음에도 코코와 살 수 있었다.
다방면의 불안정함이 개와 살도록 만들었다. 그 무렵의 나는 일종의 불안증으로 심한 편두통과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약 없이는 취침하지 못했고 약을 먹어도 새벽 늦게 잠 들었으며 정작 일어나야 할 오전에는 약기운에 일으켜지지 않는 몸과 사투를 벌이다 정오가 지나고서야 겨우 눈을 뜨는 삶을 앓았다. 그러던 와중에 짧은 기간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개의 소식을 본 것이고, 생각했다. 어차피 계속 잠과의 사투에 실패하여 만성적인 무력감과 생산성 없음의 오전을 보낼 거라면 차라리 그 시간을 갈 곳 없는 개에게 바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코코와 살았던 한 달 반, 그해의 가을을 기점으로 편두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코코는 단지 존재만으로도 오전 7시에 번쩍 눈을 뜨게 했는데, 실외에서만 배변한다는 강아지의 방광이 새벽 내내 터질까 봐 잠결에도 불안했기에 그랬다. 기상하자마자 시계를 보고, 침대 아래에서 눈을 뜬 채 내가 깨기를 바라만 보는 강아지를 쓰다듬고는 양말만 신고서 바로 바깥으로 향했다. 한 시간 조금 넘도록 공복의 오전 산행을 하고 있자면 –코코는 땅에 떨어진 모든 걸 주워 먹는 애였기에, 그나마 주워 먹을 것이 덜한 등산로가 나았다.- 목이 마르고 화장실이 가고 싶고 수십 분마다 체력적 한계에 도달했지만, 강아지에게 어느 수준의 만족을 선사한 후에는 만족스러운 오전이 찾아왔다. 강아지는 껌 간식을 먹고 낮잠에 들고, 나는 그 앞에서 출근 전까지 잠시간 글을 썼다. 몸은 고되었지만 눈 뜨고 책상에 앉아 있는 오전이 기꺼웠다. 하염없이 강아지를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코코를 쓰다듬고 있으면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이 금방 흘렀다. 때로는 오전 산책 후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개 옆에서 따라 눈을 감기도 했다. 몇 년 만에 든 낮잠이었다. 그렇게 나의 오전은 성공적으로 헌납되었다. 오전뿐이겠는가? 퇴근 후 모든 시간도 마찬가지, 심지어 퇴근하는 내내 안달복달했다. 약간의 분리불안이 있었던 코코가 집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 주가 더 지났을 때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게 된다. 개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누가 개와 함께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하였는가?
마냥 꿈 같았던 기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코코를 돌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임시 보호를 한다니 입양 보낼 때 슬퍼서 어떡하냐는 말에 일관되게 했던 말은 얼른 갔으면 좋겠고, 가면 시원할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개 육아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를 수도,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일이니 쉽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관리가 잘 된 강아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산책 가는 길이 행복하다고 찍어 올릴 수 있는가? 윤기 나는 털과 부족함 없는 돌봄을 받는 개, 그리고 그런 개와 지내는 삶이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의 웃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공감할 수 없었다.
오전 산책으로 산을 오른 뒤 강아지의 밥과 간식을 주고 현관문을 나선다. 파편화된 노동을 하나씩 해치우고 늦은 시각에 귀가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이의 이름을 전전긍긍 되뇌며 현관문을 열면 –코코!- 품으로 뛰어드는 강아지의 밥부터 챙기고, 다시 서둘러 밤 산책을 수행하고 돌아와 간단하게 삶기만 하면 되는 것들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가사 노동을 마치니 새벽 한 시였다. 단순 육체의 피로함이 괴로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일 외의 모든 시간을 개에게 전부 주고, 장이 좋지 않아 자꾸만 설사하는 컨디션의 강아지에게 맞는 사료 찾기를, 그러면서 자꾸 길에서 뭘 주워 먹는 개에게 화내지 않도록 인내하기를 –자꾸 무른 변을 보니 사료 급여량을 줄이는 처방을 했는데 그럴수록 배고팠을 테니 땅에 떨어진 것을 먹으려고 했던 것 같다. 유산균을 급여했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에는 잘 알지 못했다.- 배에 피부 질환이 있어 매일 약 바르러 쫓아다녀야 하는 일을 전부 다 수행하고도 어쩐지 이 개에게 충분한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도 괴로웠다. 나를 갈아 개의 행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어째 존나게 불행해져 있었다. 비어버린 통장 잔고, 쉬지 못해 드는 우울, 한 달 사이 4킬로그램이나 빠져버린 체중, 돌봄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벌면 벌수록 강아지와 같이 있지 못하는 시간 빈곤의 문제, 그럴수록 애정 결핍이 되어가는 강아지, 사랑하는 코코.
# 2022.09.30 / 오후
코코가 출국 일자가 번복되었다. 10월 9일이었다가 10월 4일로 당겨졌다는데, 벌써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개가 너무도 그리워지면 어떡하지, 나 혼자가 된 기분을 못 버티면 어쩌지 싶어서.
둘은 버겁다. 하지만 혼자는 무섭다.
하지만 코코가 왔다 간 것이 앞으로의 삶에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헛발질 같은 기대감을 걸어본다. 코코 덕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법과 오래 걷는 법을 배웠으니까. 일이 끝나면 속으로 중얼대는 말. 코코한테 가야 하는데. 얼른 코코에게 가야 하는데. 이전에 누군가를 사랑해서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던 때처럼.
코코랑 지내는 저녁을 소중히 여겨야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소중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니, 어리석다.
지쳐서 혹은 돌봄에 몰두하느라 기존에 겪던 삶의 어떤 불행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약을 먹어도 잠을 잘 수 없다거나 잠을 자다 악몽에 시달릴 때면 침대 밑에서 자고 있던 코코를 쓰다듬고, 그 애가 다시 잠들 때까지 지켜보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하루의 모든 고됨은 잠자기 전의 잠깐을 위한 거구나.
‘생활’이란 것이 무엇인지 체감했다. 산책하고 와서 같이 낮잠에 드는 일. 저녁 산책하러 가기 위해 점심을 먹는 일. 자꾸만 배고파하는 청소년 강아지에게 급여하기 위해서 더운 날씨에 생선을 삶아 가시를 전부 손으로 발라내어 먹이는 일. 그 후 내 점심으로 꺼낸 복숭아 한 알을 먹고 싶어하는 강아지를 위해 껍질을 완전히 벗겨내고 씨앗 부근을 전부 도려내어 작게 썰어서 입에 쏙 넣어 주는 일. 일을 위해 점심을 생략하거나, 걷지 않거나, 잠에 들지 않는 삶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는 일.
# 2022.10.05. / 시간 알 수 없음
코코가 갔다. 어제 갔다. 수화물 탑승 수속을 마치고 단체의 활동가 분이 자리를 뜨게 되어 마지막 인사를 혼자 했다. 새벽에 깨어 비행기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왔는지 확인했다. 그 사이의 꿈에 코코가 나왔다. 보고 싶었다. 더 잘해 줄 걸, 하는 생각을 또 했다. 관계란 정말 한 순간이다.
코코의 발톱을 깎아 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자꾸만 피하려고 해서 몸통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코코는 계속 발버둥 쳤고, 제압하듯 품에 가두다 힘겨루기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이 코코의 두려움을 가중한 것 같다. 결국 코코가 허벅지를 할퀴며 도망쳤고, 나는 일순간 소리를 질렀다. 코코가 무서워서 오줌을 지렸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왜 발톱을 반드시 깎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마음대로 안 된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애를 무섭게 했을까.
일정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먼저 다가가지는 못한 채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코코야. 이리 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좀 전까지 억지로 무언갈 하려고 했던 인간에게 바로 올 강아지가 어디 있어. 그런데 코코는 단번에 다가왔다. 과거의 두려움이 현재의 행복을 망치게 두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헌신했는지, 얼마나 품을 기울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돌봄을 제공하는 자의 마음은 결코 애정을 붙이려는 이의 마음을 능가할 수 없다.
# 2023.01.28 / 저녁
잠에 꿈이 한가득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 집에 사는 것이 나 혼자라는 것을 천천히 자각했다.
늦게 일어났는데도 달리 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겠다고 늦은 시각에 조금 먼 길을 나섰다. 문득 이전에 개와 사는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개의 세상이 인간 보호자에게 한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은 동의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와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개가 그런 존재로 태어나 사람에게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개를 기를 것이다. 나의 이기라도 그것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네 필요에 의존했다는 걸 너는 알까. 누군가가 찾는 사람이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네가 알까. 너를 보살펴야 하는 일에 불평하고 마땅치 않아 했지만 정작 그 행동으로 인해 나 또한 보살핌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을까. 그 언젠가 다시 그런 관계에 봉착하게 된다면 나는 깨달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