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산책에 천부적인 재능 4화
눈알의 안쪽까지 녹을 것 같은 계절. 개에게 얼음팩을 넣은 쿨조끼를 입혀도 30분이면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다 공원 내 정자 밑으로 들어가 앉고 마는 여름, 땡볕. 들러붙기 시작한 옷감을 떠안고 걷다 보면 매미 우는 소리가 눈구덩이의 위쪽을 저미듯 파고든다. 공기 중에 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질 듯이 습도가 높은 날에는 눈알을 빼다가 빗물에 도륵도륵 씻고 싶다.
작년보다 더 더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걷고 난 뒤에 생활이 있고 그 뒤에 또 걷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매일의 한계치를 초과했던 지난여름. 바람이 불면 코끝을 들고 실려 오는 것들을 추적하는 찬을 쓰다듬으며 무엇을 맡았느냐고 물어볼 여유가 생겨나지 않았다. 얼굴 옆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날벌레의 윙윙대는 소리에 두 귀를 틀어막느라, 나뭇잎 사이를 통과해 산책로의 고동색 나무 데크타일 위로 떨어지는 햇빛도 그을림으로 보였다. 일 2회 오전과 저녁, 3시간 내외의 산책, 세 번의 샤워. 어떻게 죽게 될지 이따금 궁금했었는데, 알 것 같았다. 산책하다 죽을 것이다.
가을이 올 때까지 걷는 시간을 좀 줄이는 방안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3시간이 말이 3시간이지, 산책이 끝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가사 노동과 수면을 뺀 하루의 전부를 산책에 쓰는 셈이다. 그래도 강아지에게는 하루 24시간 중 외출 및 배변할 수 있는 단 두 번의 기회였다. 게다가 찬은 더위에 헉헉거리면서도 길바닥에 코를 박고 달려 나가는 게 좋은, 겨우 두 살. 탈수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산책 시간을 줄이지 못했다. 그렇게 하는 게 너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일이 맞는지 알지 못하면서 계속했다.
그런데 올해 여름에는 오전 30분, 저녁에는 한 시간 내외로 산책 시간을 타협했다. 짧은 산책으로 만족할 줄 아는 세 살의 강아지가 되어서는 아니다. 단지, 산책하다 죽을 수는 없었다. 귀가할 때면 거의 강아지를 끌고 집에 들어온다. 집에 갈 체력은 남겨 둔 시점에서 귀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꾸만 뒤돌아보며 멈추고 싶어 하는 개가 등 뒤로 맨 짐이 아래로 쳐지듯 무거웠다.
내년의 여름 산책은 이보다 더 짧아질까. 그럼 우리 개는 어떻게 하지.
산책 사이에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든 끼워 넣으며 보냈던 여름이 두 번 지나고 있다.
찬은 밥을 달라고 울거나, 산책하러 가자고 조르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침실에 누워있을 뿐이다. 다만 마음이 들린다. 산책할 시간이 되면 나가서 걷고, 뛰고, 움직이는 것을 쫓고 싶은 바람이 등 뒤로 밀려온다. 일에 바로 착수해야 하는 오전, 쭉 이어가야 하는 오후,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토요일 밤에도 책상에서 일어난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하려는 눈빛이 방문 앞에 앉아 있다.
나갔다 온다고 해서 개가 아주 행복해하는 것도 아니다. 귀가 후 발을 씻고 나오면 침실에 늘어져 결국 또 집이냐는 얼굴이다.
얼마나 더 걸어야 만족할 거야?
바람에 부응하려 애썼던 과정이 힘겨웠는데 성과도 그다지 크지 않을 때 행복이 망연해진다. 단지 개가 만족해하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서뿐은 아니다.
- 개랑 놀고 싶다고 일단 지나가는 사람이 개랑 오는 것 같으면 앉아요. 다른 집 개들은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안다는데 얘는 왜 헥헥거리면서도 무턱대고 놀고 싶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산책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 그냥 앉아 있는 거면 완전 선비 아닌가요? 모가 문제죠^.^? 찬이 입장 대변합니다.
당근 애플리케이션으로 만난 동네의 강아지 단톡방에 하소연했다가 받은 답장의 내용이었다. 그러게.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왜 강아지가 단지 주저앉는 걸 못마땅해하는 걸까. 단순히 불볕더위의 산책이 힘들어서?
오른쪽 발목과 손목이 쉴 새 없이 아프다. 찬이 내 오른쪽에서 걷기 때문이다. 같이 산 지 2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개와 줄을 당기지 않고 같이 걷는 법을 합의하는 중이다. 이제는 “서” 혹은 “기다려”와 같은 음성 언어와 리드줄을 짧게 잡으면 옆에서 걷기, 내가 몸으로 막아서면 타견/타인에게 달려들지 않기 등의 규칙을 잘 알아듣는다. 하지만 급박하거나 정신없는 순간, 가령 맞은 편에서 오는 자동차를 앞질러서 피하려고 하는 행동을 보일 때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고양이나 개에게 달려가려는 경우에는 힘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규칙을 익혔다고 방심하여 매일 반복하지 않으면 도루묵이 될 때가 많아서, 며칠 멋대로 하도록 두면 바로 줄을 당기고 앞서나가려고 하기도 한다. 아무리 내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간다고 하더라도, 사족보행자가 앞질러 나가려는 의지는 이족보행자의 것보다 강력하다.¹ 그렇지 않아도 새벽이나 아주 늦은 밤이 아닌 시간에는 쉽게 지치고 짜증 나기 쉬워서, 사소한 고집에도 자꾸만 강아지와 불화하게 된다.
¹ 찬은 현재 22킬로그램이다.
정형외과 의사는 내가 개에게 너무 ‘허용적’이라고 했다. 의례적인 인사로 요즘 어떠세요, 더운데 지치지 않으세요? 라는 말로 시작했던 이야기였다. 개 산책 3시간은 너무 길단다. 하지만 개가 크고 어려서, 사실 크고 어린 것과는 상관없고 그냥 우리 개의 성향이 그래서, 산책을 오래 길게 하는 습관이 나와 지낸 약 8개월 동안 들어서 어쩔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의사는 내 생활이 먼저라고 말했다.
그런데 허용적이란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30분 산책 코스를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나섰는데 개가 중간에 10분만큼 주저앉아 쉬면, 걷지 않은 10분만큼은 30분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허용적인 것인가? 반환점을 찍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개가 한 블록 더 돌아가겠다고 주장한다면, 단 5분 더 산책하는 것이 허용하는 것인가? 그렇게 두 블록, 세 블록, 네 블록을 돌아 20분을 더 걷는 것이 허용적인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집에 오면 처음의 산책보다 두 배 정도 길어지게 된 산책을 아침, 저녁으로 거듭하여 24시간 중 단 2시간의 외출을 3시간 정도로 늘리게 해 주는 것이 허용적인 보호자인가?
문제는 허용해 주다가도 내가 참기 힘듦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리 와”가 좀처럼 통하지 않을 때, 간식으로 회유하는 차선을 택하지 않고, 순간 올라오는 불화함의 감정에 휘둘리고 마는 것이다.
나와 걷는 걸 즐거워하지 않잖아.
불화는 개의 의사와 부딪히는 것에도 불편해하는 나로부터 나온다. 산책이 끝나갈 무렵 공원의 출구,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개가 멈추어 서거나 가기 싫어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동안 생겨나는 불협화음에 인상을 구기고 만다. 사람과의 사소한 갈등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처럼.
길가의 냄새를 맡는 것에 몰두하는 뒤통수를 뚫어져라 보면서 개의 뒤를 쫓는 상황에서, 때때로 왜 소외를 느끼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산책 중 벤치에 앉으면 이 옆으로 와 앉기는커녕, 가고자 했던 방향을 쳐다보고 서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좀 밉거든.
공원 안의 강아지들이 자주 모이는 공간을 좋아해서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려 하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머무르려 하는 거. 몇 번이고 재출입하려고 하는 거. 네 산책의 목표는 곧장 그곳에 가는 것이 전부인 거야?
나랑 연결된 이 목줄이 지겨울까? 나는 가끔 지겨워.
좀처럼 목줄 너머에 있는 나를 쳐다보지 않는 게. 안중에 내가 없을 때마다 팽팽해지는, 손목과 발목을 아프게 하는 1.8미터의 줄이. 산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다 이 줄 때문인 것 같아서, 지겨워.
태풍이 오기 전날이었다. 찬이 이상하게 걸었다. 전진도 후진도 안 하려고 했다. 평소 같으면 고집을 피우더라도 이리 와, 라고 했을 때 내 쪽으로 왔는데, 오지 않더라도 힘을 주어 줄을 당기면 따라왔는데, 되려 목줄을 뒤로 강하게 당기며 움직이지 않고 싶음을 주장했다. 당시 산책 중에 보호자로서 주도권을 가져오기에 몰두해서, 단순히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고집을 부리는 거로 생각하며 짜증을 냈다. 이 자식이……. 그래,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 그렇게 내버려두었더니 찬이 공원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거나 건물 벽 아래로 붙어 있으려고 했다. 바람이 이렇게 불어도 산책하러 나왔는데, 그렇다고 집에 가기는 싫어하고, 움직이지는 않겠다고 하니. 개춘기인가?
문득 알았는데, 바람이 불어 마구 휘날리는 수풀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네가 이상하게 구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알게 되니 한결 너그러워졌다. 앉아서 도닥여 주기도 하고,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기다려도 주었다.
수긍할 만한 이유가 중요했던 걸까. 훈련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가 끝까지 자기 욕구를 꺾지 않으면 참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짜증을 발화했던 걸까.
정말,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