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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나라의개짱이 Feb 18. 2024

당신은 연애 상대로 몇점입니까?

요즘 30대 평균의 연애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였다. 친구 중 한 명이 한숨을 푹 쉬었다. 최근에 헤어졌다고. 입을 모아 상대를 성토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 그를 위로했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소개팅으로 흘렀다. 자인 친구들이 하나 같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요즘 사람 만날 곳이 없어." "괜찮은 사람이 참 없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최근 통계를 보면 30대 중 '현재 연애하고 있다'라고 답한 사람은 39.4%다. 미혼인 30대 10명 중 6명은 혼자라는 거다. 또래에 솔로가 이렇게 많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니? 소개팅 어플에 SNS에 각종 소셜링과 취미 모임에, 관계의 홍수라고 해도 될 시대에 살고 있는데 만날 곳이 없다니? 연애라는 게 왜 갈수록 어려워지는 걸까.


문득 블라인드 앱에서 최근 큰 이슈가 됐던 글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결혼적령기 남자 평균'이라는 글이었다.



1. 175 이상의 키 + 뚱뚱하거나 마르지 않은 체격
2. 잘생기진 않아도 호감형 외모
3. 모나지 않고 둥근 성격
4.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
5. 4년제 인서울 지거국 이상 학력
6. 부모지원 포함 2~3억대 자산
7. 화목하고 노후대비된 집안
8. 기타 (종교 및 흡연 유무 등)





 기본적으로 타고난 외모가 평균 이상이어야 하고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해서 데리고 다니기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인성은 당연히 좋아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할수록 좋다. 연애나 결혼을 할 때 남들 하는 걸 못하면 안 되니까, 또 좋은 곳에 가고 좋은 것을 먹으려면 필수적이니까. 학벌도 인서울권 대학을 다닐 정도는 돼야 한다. '대화 수준'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현실이니 내 집 마련을 할 정도의 자산이나 부모님의 지원 유무 중요하다. 특정 종교에 깊게 몰두하거나 흡연을 하고 있다면 앞의 것들을 다 만족하더라도 과락이다. 그런 사람과 만나는 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평균 여자의 조건이다.



1. 164 이상의 키 + 날씬함
2. 호감형 외모
3. 피곤하지 않은 둥근 성격
4.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
5. 4년제 인서울 혹은 지거국 졸
6. 부모지원 포함 1~3억대 자산
7. 화목하고 노후대비 된 집안
8. 기타 (경제관념, 종교, 흡연 유무 등)



 남자의 조건과 흡사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연애할 만하다고 한다. 심지어 저 조건들은 '또는'이 아니라 '그리고'다. 하나하나만 보면 만족하는 사람이 꽤 많을지 몰라도, 모든 조건의 교집합이라면 100명 중 1명이 될까 싶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가 아니라 개인의 의견이긴 하나, 여러 커뮤니티에서 해당 이야기가 활발히 논의되고 공감받았고, 숱하게 재생산이 됐. 애와 결혼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니즈가 잘 반영된 글이라는 거다.


저런 조건들과 함께 나오는 말이 '육각형'이다.









 위와 같이 각각의 조건들을 하나의 꼭짓점으로 해서 육각형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거다. 외모, 자산, 직업 등 여러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다는 거다. 어느 부분에서도 하자가 없고 평균 이상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거다. 이래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건가 보다. 평균과 조건으로 필터를 건 후 어긋나는 대상은 후보에조차 두질 않으니 만날 사람이 없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10명 중 6명은 그럼 저 평균과 육각형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인 걸까. 씁쓸하다.



 이런 세태를 비판하려는 듯 글을 써 내려갔지만 사실 나는 객관적이지 못하다. 솔직하게 말해본다. 사람을 이렇게 급으로 평가하느냐 반발심이 들다가도 나도 모르게 스스로는 몇 각형인지 슬그머니 계산해 보게 되더라. 대한민국 남자 평균이란 글 읽어보며 때로는 분노하고(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기준에 대해), 때로는 공감하(내가 만족하는 기준에 대해)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더라. 이 이야기에서 나는 제삼자가 아니다. '평균 이상의 남자'가 되려고, '육각형'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살아왔단 건 인정다.


 명문대에 가기 위해 놀고픈 걸 참아가며 공부하고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 생활 내내 스펙에 목맸다. '평균'에 들어가기 위해 평균 이상의 노력을 하고 살아온 것 같다. 마른 몸이 싫어서, 넌 왜 이렇게 왜소하냐는 말이 듣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힘든 걸 참아가며 헬스장에 갔다. 남들이 유난하다 할 정도로 피부 관리, 그루밍에 공을 들였다. 좋아하던 여성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게 너무 분해 화술, 매너, 한때는 진화심리학로 보는 여성의 마음 같은 것 따위까지 정독했다. 글로 정리된 걸 보니 더 잘 보인다. 난 저렇게 살아왔다. 자기 계발이란 명목 하에, 자기 관리란 핑계로 사실 대한민국 평균 이상이자 육각형이 되고 싶었나 보다. 왜? 연애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매물이 될까 봐 불안해서다. 분수에 맞지 않게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서다. 렇게 해야만 좋은 연애를 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착각해서다.



 나처럼 자신에게 투자하는 노력이 많아질수록, 자아가 비대해지고 자기애가 과해지고 자기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희미해져 간다. 쉽게 말해, 눈이 높아져간다. 주제파악이 잘 안 되는 거다. 내가 '삼각형'이니 내 연애 상대도 '삼각형'이면 충분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삼각형이어도 상대는 육각형이어야 한다. 혹은 없는 각을 쥐어짜 내서라도 나 정도면 육각형이다라고 자한다. 주위에 MBTI상 F형 친구가 많다면 이에 대한 동조와 확신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아주 작고 귀여울지라도 육각형이니 육각형을 만날 자격이 있다. '소중한 내'가 '귀한 나의 시간'을 들여 아무나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SNS에, TV에, 하다못해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만 해도 저렇게 괜찮은 사람이 많은데 왜 내가 저런 사람을 두고 아무나 만나야 하나 생각이 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수많은 선택지와 범람하는 정보를 가려내는 게 습관이 다. 누구나 본인만의 디테일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다. 스스로가 원하는 조건들로 필터링을 여러 번 거치며 선택하는 데 익숙하다. 당장 '오늘 저녁 뭐 먹지'나 '밤에 넷플릭스 뭐 보지'같은 고민에서조차 '아무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사소한 결정을 할 때조차도 정보를 검색하고, 다른 경험자들의 후기를 참고하고, 다른 선택지와 꼼꼼히 비교한다. 


그렇게 선택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왜냐면 실패하기 싫으니까. 실패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내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테니까.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실패했을 때 후유증이 크다. 감정소모도 크고, 자존감이 깎이고, 우울, 외로움, 원망, 자괴감 등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엄습해 온다. 내가 왜 그런 것들로 괴로워해야만 하나. 게다가 실연의 아픔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어쩌지. 가뜩이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진 시댄데. 결혼할 것도 아닌 사람과 남이 되면 그에게 쏟은 내 시간은 전부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이 되어 버다. 거기다가 심지어 헤어진 뒤에조차 추스르는 데 시간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다. 처음부터 그런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게 상대를 고르고 골라야만 하는 거다. 결국 여러 조건들로 필터를 걸고 연애를 시작해야 내 감정도 시간도 고이 지켜낼 수 있는 말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 한편으론 연애애서 조차 가성비, 가심비, 시성비(시간 대비 가성비)를 따지게 된 게 아닌가.


 나의 변화에 씁쓸해졌다. 한때는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아프던 사랑이 있었다. 너무 귀하고 설레서 손 한번 맞잡는데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나 찬란하고 신성하게까지 보였던 사랑이라는 게 이제는 이렇게 세속과 물질의 영역으로 추락한 것일까. 내 중심을 온통 무너뜨려버리는 폭풍이었던 연애가 이제는 밑줄을 긋고, 치수를 재고, 저울에 매달아 보고서도 혹여나 나를 무너뜨릴까 염려하는 폭탄이 되어버린 걸까.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어느 시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커다래진 시대. 쉽게 변질되는 사랑과 쉽게 인성을 망가뜨리는 이별을 겪는 일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연민도 시혜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질적 정서적 풍요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권을 준다. 배려도 스스로에게 하고, 돌봄과 아낌과 희생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든다. 한 연애가 기억난다. 육각형의 여자였다. 예쁘고 잘 꾸몄다. 세련된 취향을 가졌고 집안도 좋았다. 모임에서 남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너무 탐이 났다. 운이 좋 그녀의 마음을 얻어 1년 정도 만나고 헤어졌다. 지나간 그 연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렇겠다. '빛 좋은 개살구'. 조금 더 이 장의 주제에 가깝게 직설적으로 말해볼까.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여자와 만나 연애를 했지만 평균 이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고 할까.


 나는 그 사람에게 5순위쯤이었다. 자기 자신이 최우선, 그다음이 가족, 그다음이 고양이, 그 뒤가 자신의 일상들, 그리고 나였다. 그런 거다. 육각형의 연애란. 연애 역시 하나의 많은 꼭짓점 중 하나인 거다. 운동, 독서, 인맥, 그리고 연애. 피부과 가기, 필라테스하기, 고양이랑 놀아주기, 그리고 데이트하기. 우리의 연애는 삶의 여러 요소 중 하나였다. 남보기 부끄럽지 않고, 우리 일상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많은 것들 중 '하나'. 결코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걸 건드리지 못했. 나는 사랑했다고 혹은 사랑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질 못하겠다.



소설 은교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 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좋은 연애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모두 안다. 내게 행복을 주는 연인의 조건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학벌, 집안, 직업 같은 게 내게 사귀는 내내 행복감을 주진 않는다. 내 불편과 우울을 알아채고 보듬어 주는 다정함,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걸 알고 내 쪽으로 쓱 밀어주는 섬세함,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함께 터져버리는 웃음, 가만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만 나눠도 시간이 훌쩍 가버리는 밀도 있는 대화, 서로에게 무심한 듯 건네는 말 한마디에 눈에 눈물이 핑 고여 버리는 따뜻함, 이런 조건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육각형이 아닐까. 이런 연애가 행복이다.


 육각형과 육각형이 접해지는 게 아니라 그와 내가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 대한민국 남자 평균과 대한민국 여자 평균이 만나는 게 아니라 나와 그 두 고유한 객체가 만나는 것. 그게 사랑이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랑이 다시 하고 싶어졌다. 행복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이 증명한 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맺는 긍정적인 관계가 행복에 가장 결정적이란 거다. 누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느냐가 삶의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거다. 결국 내가 연애할 사람을 찾는 건,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고르는 거다. 행복을 고르는 거다.










- 에필로그 (어느 봄)


 얼큰하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정이 코앞이었다. 갑작스레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연애 중인 사람이 있는데, 둘이 술을 마시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여자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은데 지금 볼 수 있냐고.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 취기에 발걸음이 움직였다.


 술자리가 깊어졌다. 친구의 연인이 술에 들떠 급작스런 제안을 했다. 자신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부르겠단다. 새벽 3시였다. 잠에 들어도 열 번은 더 들었을 시간. 이 시간에 무슨 민폐냐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는 사람은 마침 이른 저녁부터 자다가 깼다며 택시를 타고 왔다. 그렇게 평소라면 열 번도 더 잠에 들었을 시간에 우연히 깨어있던 네 명이 모였다. 그날 그렇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무뚝뚝했고 나는 취했다. 대화는 뚝뚝 끊겼다. 내가 평소 이상형이라 여기던 여성상과 맞는 구석은 없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 그렇게 성대한 자리에 올진 몰랐던 터라 둘 다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나는 강아지가 프린팅 된 편한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그녀도 내 옷차림을 보고 생각했단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군.' 그녀는 강아지를 병적으로 무서워하고, 귀여운 스타일로 옷을 입는 남자는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이었다. 내 패션은 그녀에게 최악으로 보였다. 삐걱거리는 우리는 옆에서 보기도 티가 났나 보다. 내 친구와 그의 연인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고 했다. "망했네."


 그럼에도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단다. 사투리였다. 취했던지라 그날따라 사투리를 숨기질 못했다. 내 억양을 들으며 그녀는 생각했단다. '경상도 남자네? 사투리 신기해.' 나 역시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었다. 취했기 때문에 그녀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조차 잘 기억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모자 아래로 보이던 웃는 모습만은 선명했다. '무뚝뚝하더니 웃을 땐 되게 애처럼 해맑게 웃네.'

 

 그래, 뭐, 한 번 더 만나나 보자.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내 세계가 되었다. 내 일상이 되었고, 행복의 원인이 되었다. 나는 사랑한다고, 혹은 사랑받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술자리에서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면, 만날 사람이 없다고 말하던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말해주고 싶다. 필터를 조금만 빼라고. 그 사람이 내게 고유명사가 될지, 내 세계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 '평균'과 '육각형'이라는 좁디좁은 기준의 안경을 쓰고는, 우주에까지 신에게까지 확장시킬 그 경이로운 과정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자는 거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 보거라

-순간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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