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바니타스 민화가 건네는 위로

by 미풍

여행을 시작하며...


민화를 처음 만난 건 2017년이었습니다. 첫아이 입시를 준비하며 학부모 모임에서 동양화 선생님을 만나면서였죠. 어릴 적 학교 복도에 내 그림이 걸리던 날의 설렘이 불쑥 되살아났습니다.

민화는 소망을 담은 그림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대로였습니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호작도를 그리고, 자녀의 앞날을 빌며 어변성룡도와 일로연과도를, 부귀영화를 소망하며 모란도와 일월오봉도를 모사했습니다. 오방색의 강렬함과 힘 있는 선들은 지친 일상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소망을 그리는 걸까, 욕망을 키우는 걸까?

저에게 그림은 자신과의 대화이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록입니다. 달콤한 욕망에 중독되어 조금씩 더 큰 욕망에 휩쓸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정해진 도상을 모사하는 대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만의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작이 우리 민화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넓히는 계기가 되길,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로마 시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 행진을 하는 장군의 뒤에는 반드시 노예 한 명이 따랐습니다. 노예는 장군의 머리 위로 화관을 치켜들며 끊임없이 이 말을 외쳐야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영광이 영원하리라 믿는 인간의 오만을 잠재우는, 서늘하지만 꼭 필요한 경고였죠.

필리프 드 상파뉴 / 바니타스 혹은 인생에 대한 알레고리 (1646년)

제가 시작하는 '바니타스 민화' 연작은 바로 이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허무함', '덧없음'을 뜻합니다. 성경 전도서의 첫 구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에서 유래한 말이죠.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바니타스 회화는,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들이 화려한 정물화를 즐기면서도 그 풍요가 영원하지 않다는 성찰을 함께 담고 싶어 했던 장르입니다.

저는 이 정신을 우리 민화의 따뜻하고 힘 있는 선으로 재해석해 보려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삶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더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가장 솔직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Dear Van Gogh>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볼 때마다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하늘의 저 빛나는 별들을 볼 때도 같은 꿈을 꾸게 된단다. (...)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에 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수단을 써야 한단다." (1888년 7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고흐는 죽음을 두려운 종착역이 아니라, 별로 가기 위해 타는 기차로 묘사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에게 이보다 따뜻한 위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DEAR VAN GOGH / 60.6X72.7cm / 한지에 채색 / 미풍 作

우리는 흔히 고흐를 '광기 어린 천재'로 기억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들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성스러운 순수함이 흐릅니다.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를 그리며 꿈을 키웠던 그는, 동시에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와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습니다. 한때 목사를 꿈꾸었던 그는 제도권 교회 대신 예술을 통해, 낮은 곳의 이웃들에게 경의와 연민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전통 민화의 책가도(冊架圖) 형식을 빌려, 고흐가 평생을 바쳐 좇았던 거룩한 삶의 궤적을 담아보았습니다.


• 상단: 영혼의 지향점

책가도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고흐의 영혼을 상징하는 두 가지가 놓입니다. <해바라기>와 성경입니다.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드는 해바라기의 강렬한 노란색은 그가 갈구했던 절대적인 사랑과 예술적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펼쳐진 성경은 목사였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갈등, 그리고 그 자신의 숭고한 신앙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몇 달 뒤 단 하루 만에 완성한 〈성경이 있는 정물〉, 그 치열했던 마음을 책가도의 가장 높은 곳에 헌정했습니다. 뒤편의 푸른 배경 속 〈꽃피는 아몬드 나무〉는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피어나는 희망입니다.


• 중단: 몸과 마음의 양식

고흐가 가장 사랑했던 소재, <감자>가 중간 선반에 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정직한 양식인 감자 곁에는 책이 함께 있습니다. 지식과 노동의 결실을 나란히 두어, 삶과 예술이 결코 별개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즐겨 읽던 소설들 위에는 아를의 <노란 집> 이미지를 입혔습니다.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머물렀던 그 집처럼, 책은 그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유토피아를 설계하는 토대였으니까요.


• 하단: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

책가도의 맨 아래, 화려한 장식물 대신 흙먼지 묻은 농부의 <구두한켤레>가 자리합니다. 이것이 이 그림에서 제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입니다. 고흐가 지향했던 '가장 낮은 곳의 삶',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이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담긴 자리입니다. 그 옆의 술병에는 <별이 빛나는 밤>이 입혀져 있고, 술병 곁의 <황제산누에나방>은 죽음 직전 요양원에서 그렸던 소재입니다. 육체는 피폐해졌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언제나 밤하늘의 별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출세와 부귀영화를 바라던 전통 책가도의 욕망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고흐의 소박하고도 거룩한 정물들을 채워 넣으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본 작업이었습니다. 고흐가 농부의 신발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했듯, 낮고 평범한 것들 속에 숨겨진 빛나는 가치를 발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