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봉우주도 無限峰宇宙圖

아타락시아, 비움이 머무는 우주

by 미풍


바니타스 창작 민화는 죽음이라는 거울을 통해 삶의 참된 형상을 비추어보는 여정입니다. '바니타스'는 허무의 철학이 아닌, 삶을 더욱 긍정하고, 제대로 살아내자는 다짐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의 본뜻은 '그러니 포기하라'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을 제대로 살아라'입니다. 바니타스는 삶의 종말을 노래하는 비가(悲歌)가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의 가지를 쳐내고 본질적인 행복으로 돌아가자는,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권유입니다.


<무한봉우주도 無限峰宇宙圖>


그림의 중심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서 있습니다. 회색 구면 위에 무릎을 꿇듯 자리를 잡고, 두 팔을 들어 거대한 원형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가 천구(天球)를 어깨에 이고 있듯이.

무한봉우주도 / 48x68cm / 한지에 채색 / 미풍 作

하지만 이 아틀라스는 신이 아니라 기계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의 집합체라 해도, 그것이 떠받드는 무게 앞에서 그 어깨는 조금 고단해 보입니다.


로봇이 두 손으로 받쳐 든 원형 안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전통 민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의 풍경입니다. 하얀 달과 붉은 해가 나란히 뜨고, 다섯 봉우리의 산이 우뚝 솟고, 금빛과 청록의 파도가 출렁이며, 붉은 소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켓이 넘쳐나는 우주 한가운데, 창백한 푸른 점 속 우리의 자연이 원형의 빛 속에 고요히 담겨 있습니다.


찬란하지만 서늘한 성취

아틀라스의 주변으로 현대 기술문명의 정점들이 떠다닙니다.

오른쪽 상단에는 우주정거장이 있습니다. 수십 개국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인류 협력의 결정체. 그 옆으로 로켓이 질주합니다. 중력을 거스르고 별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인간의 오랜 꿈. 왼편에는 인공위성이 지구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미 스며든 기술.

그리고 오른편 아래에는 별자리처럼 빛나는 파란 로봇 개가 있습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스팟을 닮은 그 로봇은 반짝이는 별들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와 우주, 기술과 자연이 뒤섞인 존재. 인류의 찬란한 성취들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질문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외곽의 작은 정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빵과 물과 대화. 그것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가 추구한 것은 오히려 절제에 가까웠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자연적이고 필요한 것 — 음식, 안전, 우정. 둘째, 자연적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 — 사치와 탐닉. 셋째, 자연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 — 권력과 명예.

그가 말한 것은 간단했습니다. 첫 번째 조건만 충족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좇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불만족의 사슬에 스스로를 묶는다.

욕망의 소란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에 이르는 것,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아타락시아(Ataraxia, 평온)’라고 불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물 같은 마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주정거장을 띄우고 인공지능을 만들었지만, 우리의 마음은 2,300년 전 에피쿠로스의 정원보다 더 평온해졌을까요.


아틀라스의 어깨 —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대가

이 그림 속 아틀라스가 떠받치는 것은 현대 기술문명의 무게입니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많이. 인류는 멈추지 않는 질주를 찬양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기술문명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폭주 기관차와 같습니다. 목적지도, 방향도 상실한 채 오직 '가속' 그 자체만을 위해 나아가는 이 맹목적인 속도감은 우리에게 재앙에 가까운 불안을 안겨줍니다.

분명 기술은 더 많은 편리를 약속하지만, 제어 능력을 잃고 가속 페달만 밟아대는 문명은 결국 우리를 평온(아타락시아)에서 멀어지게 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의 궤도로 밀어 넣습니다. 아틀라스의 어깨가 유독 고단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이 찬란한 탑이 언제든 그 가속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숲속 오두막에서 혼자 살며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깊이 살고 싶었다. 삶의 모든 골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사는 것. 소로우가 숲으로 간 이유가 에피쿠로스의 정원과 닮아있고, 이 그림 속 일월오봉도의 고요한 산과 파도 역시 그 둘과 또 닮아있습니다.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

전통 민화가 '복(福)'을 빌며 채우는 예술이었다면, 저의 바니타스 민화는 '비움'을 통해 삶의 참된 행복를 발견하려는 과정이었습니다. 우주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인류의 기술조차 찰나의 점 하나에 불과함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오늘 나에게 허락된 이 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이 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매달리는 탐욕을 잠시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살아있음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더 뜨겁게 살기 위한, 가장 솔직한 준비입니다.


바니타스는 삶을 긍정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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