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남고 싶어진다 - <구르브 연락 없다>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90번.

by 이태연




외계인의 시선으로 현대 도시인의 삶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1992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바르셀로나입니다. 에스파니아 문학의 거장인 멘도사가 바르셀로나에 바치는 유쾌한 찬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음은 작가의 말입니다. "바르셀로나와 나, 우리는 무척이나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 왔고, 무척이나 강하고 튼튼한 자식들을 두고 있다."

<< 주인공의 시선 >> - 이름을 알 수 없는 외계인입니다.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이 두절된 구르브를 기다리며 지구인생활을 시작합니다. 은행 계좌를 조작해 큰 돈을 만들고, 지구상의 다양한 유명인으로 변신해가며 구르브를 찾아다닙니다. 결국 매춘부로 변해 있는 구르브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지구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남아 있던 돈으로 알고 지내던 지구인들에게 집, 땅을 사주며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구르브는 사라져버립니다.

* 이 도시에서 가장 안 좋은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양한 성분의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코가 킁킁 막히고,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

* 살다 보면 무엇인가를 가까이 놔둔 채 멀리서 찾는 경우가 다반사다.




20230414_191249.jpg <남과 여>




* 이 도시에는 안락한 가정들이 두 가지 문제를 두고 고민한다. 자식을 공부시키자고 미국으로 보낼 것인가. 주차는 어디에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래 전, 그러니까 자동차가 없었을 때는, 아니, 자동차는 고사하고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 우리 별에서 우리가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타인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에 어울리는(그리고 적확한) 삶을 살아가는 반면, 지구인들은 곤충과 비슷한 세 가지 성장 단계 혹은 성장 과정, 즉 아동기, 청장년기, 노년기로 나뉘어 살아간다.

*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골치가 아프면 아프도록 지구에 남고 싶어진다. 지구에 남는다는 것은 구르브(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리고 연락조차 없다)와 나한테 주어진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배신이다. 그런데도 지구에 남는다면?

* 나는 내가 원하면 지구인의 인체를 구성하는 분자구조에 맞추어 내 몸을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어떤 모델을 선택했을 경우에는 극도로 신경을 써야 한다. 도중에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작정을 하고서 변신까지 했는데, 내가 원했던 행복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화장실.jpg < 남과 여>




* 전 우주에서 지구인의 인체보다 위대한 졸작도 없고 못난 대작도 없다. 이러한 단언은 두개골 옆에 달린 귀만 봐도 충분하다. 발은 왜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내장은 왜 그렇게 징그럽게 생겼을까. 하나같이 웃고 있는 해골은 아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지구인들은 죄인의 신세나 다를 바 없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 구르브 역시 운이 없었나 보다. 처음에는 대학 교수 행세를 했단다. 마음에 들었지만,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포기하고, 그 뒤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단다. (···) 내가, 못된 매춘부로 변신한 탓이라고 일침을 놓자, 구르브는 그게 아니라고, 나한테 자기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항상 삶을 억누르려는 내 시각 탓이란다.

* 사실 우리 별은 너무 따분하고 고루해. (···) 난 여기 남았으면 해.

* 사랑하는 구르브,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오랫동안 함께 살지 않았지만 서로를 잘 아는 경우도 있겠지. 또한 오랫동안 함께 살다 보면, 둘 중 하나가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경우도 생기는데, (···) 나는 우리가 여기를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해.




20230414_191307.jpg <남과 여>



* 구르브가 시큰둥한 눈치다. 우리한테 주어진 새로운 임무 앞에서 별반 긍지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볼 때 구르브는 규율에 의해(동시에 나에 의해) 주어지는 새로운 임무에 열의가 없는 것같다. (···) 요 며칠 동안 웃기지도 않는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구르브는 젊고, 아름답고, 청순하고, 유유자적하게 변한 새로운 자신을 포기한 채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현실이 끔찍한 모양이다.

* 20 : 00 한번 상관은 영원한 상관임을 내가 상기시키려는데, 이미 지나가던 택시를 손짓으로 불러 세운 구르브가 택시를 향해 뛰어간다. 치렁치렁한 치마를 걷어 올린 채, 구르브를 태운 택시가 저만치 멀어져 간다. 내 눈앞에서. 02 : 00 구르브, 연락 없다.
















<페이지 생략><주인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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