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고양이 눈1>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424번.

by 이태연






화가 일레인 리슬리가 유년기의 상처를 새기며, 진정한 '고양이 눈'을 완성해가는 성장 소설입니다. 제목인 '고양이 눈'은 어린 일레인을 지켜 주는 부적이고, 삶 전체를 보게 만드는 세삼의 눈이며, 잃은 것과 부서진 것들을 되살리고 결합해 주는 예술의 상징입니다. 일레인과 그녀를 괴롭히는 코딜리아, 이 두 사람은 상보적(相補的) 관계입니다. 서로를 반목하고 배반하지만 서로를 반영해주면서 각자를 완성시켜 주는 반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일레인의 시선 >> - 화가이며 소설의 화자입니다. 낡은 여행용 트렁크에서 우연히 고양이 눈 구슬을 발견한 후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합니다.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 다니던 어린 시절의 '나'는 토론토에 정착한 후에야 여자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러나 코딜리아를 주축으로 한 친구들의 괴롭힘에 구덩이 속에 갇히기도 하고, 눈 오는 겨울 밤에 얼어붙은 강가에 혼자 남겨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훗날 이 경험들은 자신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 시간은 선이 아니라 공간의 차원 같은 하나의 차원이다. 만일 공간을 구부릴 수 있다면 시간 역시 구부릴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시간의 선을 따라 회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헤엄치듯 시간의 심연을 통과해 가며 회고한다.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 저것이 수면 위에 떠오르며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SE-b82101fd-d6af-48dc-8392-0b5a45bd1298.jpg 레오의 눈





* 나는 화가다. (···) 아직도 이따금 내가 화가라는 사실에 민망함을 느낀다. 품위 있는 사람은 화가가 되지 않는다. 오직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며 꾸며 대는 사람들만이 화가가 된다. 예술가라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화가라는 직함이 더 좋다. 그것이 확실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 낯선 사람을 사귀는 것이 점점 더 시들해진다. 한때는 흥분에, 아슬아슬한 모험에 열중했다. 이제 그것은 어수선함, 귀찮은 일일 뿐이다. 옷 우아하게 벗기,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 투명한 유리 안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꽃잎이 들어가 있는 구슬은 고양이 눈, (···)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 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 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 눈처럼 생겼다.






SE-4e43fde3-6dca-478d-a29a-2048f92077bb.jpg 잠자는 레오






* 코딜리어와 그레이스와 캐럴은 코딜리어네 집 뒤뜰에 있는 깊은 구덩이로 나를 데려간다. (···) 구덩이 속은 어둡고 차갑고 축축하며 두꺼비 굴 같은 냄새가 난다. 구덩이 위, 바깥쪽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 구덩이에 묻힐 때까지는 이것이 놀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슬픔을, 일종의 배반감을 느낀다.


* 코딜리어가 내게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그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시기, 나는 발의 살갗을 벗겨 내곤 했다. (···) 아침이면 피부가 벗겨진 발에 양말을 신었다. 걷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고통은 내게 생각할 확실한 무엇, 즉각적인 무엇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무엇이기도 했다.


* 증오는 분명하고 금속처럼 차가우며 편향적이고 동요하지 않는다. 사랑과는 달리.






SE-52a6f6de-b671-4dda-87c6-c16988a0e18a.jpg 무아지경






* 나는 불완전함, 그러니까 잘못된 식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들은 항상 행복하다. 아니,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행복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떤 때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가? 가식적으로 들리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어디까지가 가식인가?


* 나는 겨울 내내 책상 서랍 한구석에 들어 있던 내 푸른 고양이 눈을 끄집어낸다. 햇빛이 관통하여 빛나도록 구슬을 치켜들고 꼼꼼히 살펴본다. 그 수정 구형체 속의 눈은 너무나 푸르고 너무나 깨끗하다. 얼음 속에 무엇이 동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코딜리어는 그냥 넘어간다. 그녀는 이 고양이 눈이 나를 방어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때로는 나도 이 구슬이 보는 대로 볼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빛나는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을, 그들이 입을 벙긋거리지만 어떤 진정한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형태와 크기를, 그들의 색깔을, 그들에 대한 아무런 느낌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눈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SE-725822ec-04a2-496b-aa01-6922d4027a4c.jpg 애교 부리는 레오






* 나는 이제 (···) 뒷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하지 않고 걷고, 내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귀 기울이지 않고 말한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도 한다. 나는 이제 말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말 없음 속으로 주저앉을 수 있고, 마치 침대로 들어가듯이 무상(無常)한 흐름의 리듬 속에 잠길 수 있다.


* 나는 내 고양이 눈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꼭 붙잡고 있는다. 보석처럼 소중한 그것은 내 손 안에서 그 공정한 눈으로 뼈와 천을 꿰뚫고 밖을 내다본다. 그것이 지닌 힘의 도움을 받아 나는 온전한 시력을 회복한다. 내 앞에는 코딜리어, 그레이스, 캐럴이 있다. (···) 그들은 앞에서 움직이는 작고 선명한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나는 내 의지에 따라 그들을 볼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 나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들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기절은 샛길로 내려서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 안으로, 내려서는 것, 깨어나 보면 그 후의 시간이다. 시간은 나 없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SE-8521782a-ecd7-443c-8a17-f1f65a649867.jpg 사색하는 레오






* "감히 우리를 무시하고 가 버리다니. 당장 이리 돌아와!" 코딜리어가 뒤에서 소리친다. 나는 이제 그녀가 하는 말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그것은 모방이며 연기일 뿐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놀이다.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놀이였으며, 나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그들에게만큼이나 나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무관심하다. 내 안에는 단단하고 투명한 무엇이, 유리로 된 핵 같은 것이 존재한다.


* 나는 그들에게 귀를 거의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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